이후의 이후, ‘포스트 담론’ 20년제894호 시인에서 기자를 거쳐, 청와대 행정관으로 소속을 ‘이탈’해버린 김중식은 1990년대 초반에 쓴 시 ‘이탈 이후’에서 동시대를 견뎌야 하는 운동권들의 난감함을 이렇게 적었다. “활처럼 긴장해도 겨냥할 표적이 없다.” 그가 묘파한 1990년대식 우울은 동년배 시인 진은영이 쓴 ‘70년대산’의 시정(詩情)과도 ...
“화두는 바뀌어도 포지션은 그대로”제894호 “20년이오? 벌써 그리 됐군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노(老)교수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20년 전 자신을 ‘얼치기 청산론자’로 몰아붙이던 ‘정통파’들의 소리 없는 전향에 대해서도 “이해한다”고 했다. “고민이 많았겠지요. 우리 사회의 변화 속도가 워낙 빨랐으니까.” 1992년 봄 <...
특별한 인연에 대하여제893호 얼마 전 케이블 온스타일 채널에서 방송된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다. 1965년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출연진들이 45년 만에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줄리 앤드루스의 눈은 세월과 무관하게 반짝거렸고, 백발이 된 크리스토퍼 플러머에게선 여전...
인류 진화의 비밀이 만화에 숨어 있다제893호 인류는 오래도록 채집과 수렵을 통해 삶을 영위했다. 수렵과 채집에 나선 남성들은 공간을 정확히 인지해야만 자신과 가족을 살릴 수 있었다. 공간을 인지 못하는 남성은 도태되고, 오랜 시간 남성의 DNA에는 공간을 효과적으로 인지하는 정보가 입력됐다. 남성이 넓은 들판과 산 같은 공간을 인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
북트레일러에 스타가 떴다제893호 ‘최대한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해 본편으로 유인하라.’ 세상의 모든 예고편이 떠안은 임무다. 출판사의 책 홍보 수단으로 서서히 자리잡아가는 북트레일러도 그 임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북트레일러는 예고편(Trailer)과 책(Book)의 합성어로, 책의 동영상 예고편을 말한다. 인터넷 동영상 사이...
베를린의 우정은 영원히제893호 눈앞에 출현한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동화적이었다. 사람을 원통형으로 그리는 남미의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의 인물들처럼 낙천적인 몸통의 동상이었다. 특별할 건 없지만 나는 이 사나이들이 가진 응시의 표정이 좋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서 좋았다. 서울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과 세종대왕 동상은 같…
세기의 이야기꾼들과 함께한 산책제893호 노벨문학상 수상작이 세상에서 가장 탁월한 문학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01년부터 2011년까지, 108명의 수상자 중 81명이 유럽 작가들이다. 나머지 중 대다수는 미국 국적의 작가들이다. 스웨덴 한림원이 ‘유럽 편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서구의 문학관을 세계의 문학관인 것으로 ...
곤란이가 왔다, 운명이다제893호 2011년 6월 말, 우리 부부는 ‘윈도 기본 바탕화면’으로 잘 알려진 중국 내몽골 자치구의 초원에 돗자리를 깔고 누웠다. 밤이었다. 까맣게 맑은 하늘에는 별이 아롱아롱 박혀 있었다. “내몽골은 하늘이 다르다”기에 벼르다 온, 이른 여름휴가였다. 돗자리에 누워 와인을 마셨다. 남편의 눈동자에 내가 ...
슬픔으로부터 위로받는 이들제893호 지난 월요일 아침으로 크리스마스이브에 만들어 먹고 남은 감자 요리를 먹고 출근을 했다. 찐 감자를 으깨 생크림과 버터와 꿀을 잔뜩 넣고 비빈 다음 다진 호두를 다시 버터에 버무려 으깬 감자 위에 덮어 오븐에 구운 이 (단순한 레시피의) 요리를 만들고 박수를 쳤더랬다. 너무 맛있어서. 따뜻하고 보드...
부조리한 현실에 쫄지 마제893호 정지영 감독의 오랜만의 연출 복귀작인 <부러진 화살>의 진짜 힘은 영화를 보고 나면 실제 사건의 전후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좀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영화 속에서 문성근이 연기하는 판사가 잘 쓰는 말대로 ‘실체적 사안’에 대해 종합적으로 알려주는 데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