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천 교수 <한겨레> 자료
상황은 소련이 몰락하고, 마르크스주의 위기가 공식화한 뒤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1992년 한국의 ‘전통 마르크스주의’ 진영은 현실과 정면으로 대결하기보다 루이 알튀세르의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함으로써 위기를 우회하려 했다. 노동계급과 노동운동의 중심적 지위는 폐기돼야 하고, 노동·환경·여성 등 다양한 사회운동이 연대해 민주주의의 폭과 깊이를 확장·심화해야 한다는 이 교수의 주장은 성급한 청산론으로 간단히 기각됐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이 교수는 더 이상 포스트마르크스주의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마르크스주의에서 신속하게 이탈했듯, 이번에도 발빠른 변신을 시도하는 것이라 추측했다. 하지만 이 교수는 더 오른쪽으로 가지 않았다. 그가 매진한 것은 한국 자본주의 연구였다. 재벌경제의 역사를 추적하고,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비판했던 것도 그 일환이다. 이 교수는 “화두가 바뀌었을 뿐 (포스트마르크스주의라는) 학문적 포지션은 그대로”라고 말한다. “박정희 시대를 연구하는 것도 한국 민주주의의 확장과 심화를 가로막는 역사·제도적 요인을 탐색하기 위한 겁니다. 2002년 창간한 잡지 <시민과 세계>를 10년째 발행하는 것도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급진적 문제의식을 시민정치 영역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지요.” 광주의 기억, 1987년의 환희 포스트 담론의 도입 과정에 성급함이 있었다는 지적에 대해선 담담하게 수긍했다. “유럽에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와 노동의 시민권이 확보된 뒤에 나온 것인데, 국내에 들여오는 과정에서 이런 배경적 차이가 엄밀히 논구되진 못했죠.” 경제적 이슈의 중요성이 커지는 세계화 국면에 대해 선제적 통찰이 부족했던 점도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고 덧붙였다. 나이가 들어서도 ‘진보적 연구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냐고 묻자 뜻밖에도 “1980년 광주에 대한 죄의식과 1987년 6월의 벅찬 환희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