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를 인질 삼다제1036호번역하다보면 이따금 슬럼프가 찾아온다. 생활 리듬이 무너지거나 몸이 아프거나 고민거리가 생겼을 때도 슬럼프가 찾아오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원인은 받아야 할 번역료가 제때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번역료가 들어오지 않으면, 자금 운용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질 ...
강 같은 들깨밭이 물들면제1036호마을 야산 위에 있는 배수가 잘되는 못둔지 들깨밭은 아주 사랑스럽습니다. 장정 손바닥같이 큰 깻잎이 달린 깨밭은 어른들 가슴이 넘치고 아이들 키가 묻히도록 잘되었습니다. 희끗희끗한 깨꽃이 핀 초록 깨밭은 바람이 불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시름하게 쓸렸다 이쪽으로 쓸렸다 하면서 햇빛 비치는 강물같이 시원한 기쁨…
임대료 걱정은 매한가지로군요!제1036호2011년 3·11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일본에 올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건만 4년도 채 지나지 않아 오게 되었다. 여전히 풍요롭다. 그 풍요로움에 혹해 생선·고기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잘도 먹고 다니고 있다. 아무런 위화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방사능의 대기는 달달한 파멸...
머무름 없이 이어질 그의 따뜻한 당부제1036호뮤지션 시와는 음반을 내기 전에 작은 공연을 계속한다. 그녀의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이 모인 곳에서 발표할 노래를 먼저 부른다. 그리고 당부한다. “이 노래를 음반으로 듣고 싶은 분들은 투자자가 되어주세요.” 그렇게 음반을 같이 만든 이들의 이름이 최근에 발표된 음반 <머무름 없이 이어지다>에 빼곡...
영혼도 주머니도 탈탈 털렸다제1036호이 책이 어떻게 씌어졌는지 안다. <한겨레21> 정은주 기자는 12년차 기자 경력을 숨기고 경력 단절 여성들의 취업시장에 뛰어들기로 했다. 가장 먼저 들은 말은 “외모를 바꾸지 않으면 게을러 보일 것” “문제 해결 능력이 떨어진다”는 ‘전문가’들의 진단이었다. 일자리를 구하는 40살의...
결국 빛남은 딱 거기까지제1036호*<보이후드>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생은 결국 무엇으로 남을까?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이라는 소설도 있지만, 한 사람의 일생은 결국 응축된 그러나 찰나적으로 포착된 몇 개의 장면으로 남는다. 친구 집 앞 골목길에서 연탄재를 발로 차다 들은 ...
끝없이 반복되는 밥상의 일일극제1036호요리하는 남자들이 대세다. 적어도 텔레비전 예능에서만큼은 앞치마를 두른 여자보다 남자를 더 많이 만날 수 있다. 오죽하면 ‘요리 솜씨로 여성을 매혹하는 남자’를 뜻하는 신조어도 생겼다. 미식가라는 뜻의 ‘게스트로놈’(gastronome)과 성적 매력을 뜻하는 ‘섹슈얼’(sexual)을 합친 ...
계속 입어라, 등산복 빼고제1036호시그니처 스타일이라는 게 있다. 좀 패션지스럽게 허세스러운 표현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걸 한겨레가 좋아하는 순수 한국말 표현으로 바꿔보자. 뭐가 있을까? 시그니처(Signature)를 네이버 영어사전에서 찾았더니 ‘서명’ 혹은 ‘특징’이라고 해석해준다. 그렇다면 시그니처 스타일은 ‘서명 맵시’? 아니...
세상이 변했다, 롯데만 모른다제1036호나에게 사직야구장은 1980년대 아버지와 함께한 유일한 추억이 묻어 있는 곳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퇴근버스가 서는 곳에서 기다려 기름때 묻은 작업복 차림의 아버지 손을 잡고 매일 사직야구장으로 향했다. 경기에 질 때마다 “꼴데 해체하라”를 외치면서도 다음날 또 깃발을 흔들고 응원가를 부르던 사직아재들이 …
어른이의 장래희망제1035호출근 준비를 하며 아일랜드 소녀풍의 니트를 꺼내 입었다. 그리고 바라본 거울 속엔 털옷 입은 임꺽정이 서 있었다. ‘아, 진짜 빼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왔구나.’ 피눈물을 흘리며 “오늘부터 필살 다이어트”라며 굳게 결심하고 나왔지만, 퇴근길 내 손에는 어김없이 맥주와 과자가 들려 있다. ‘내일부터 하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