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감각하는 시 읽기제1126호때론 이해가 잘 안 돼도 계속 본다는 점에서, 시 읽기와 사랑은 닮았다. 눈을 뜨고 보는 일의 찬란 앞에 어떻게 보는지는 부차적이란 점에서. ‘감각하다’의 뜻은 ‘믿는다’일지 모른다. 좋은 예술을 많이 누릴수록 믿음이 붙는다. 내게 의미 있는 무엇을 스스로 찾을 수 있다는 믿음. 좋은 예술은 감상자가 머물러 ...
냄비 근성, 국가가 키운 ‘병’제1126호 냄비 근성. 한국 사람들이 여러 사회 이슈에 보이는 반응에 붙여진 수식어다. 금방 끓고, 금방 식는다. 오랫동안 열기를 보관하는 ‘뚝배기’와 비교되며 자조적으로 쓰여왔다. 우리는 왜 이렇게 금방 끓고 금방 식는가. 최근에는 세월호 참사를 겪은 유가족들을 향한 반응에서 ‘냄비 근성’이 두드러졌...
책무덤에서제1125호 밤 11시. 남녀 다리가 닿았다. 남자의 왼쪽 다리와 여자의 오른쪽 다리. 하나는 내 것이요, 하나는 그녀의 것이다. 착잡한 퇴근길 시내버스, 맨 뒷자리. 모르는 아가씨가 곁에 끼어앉았다. 비어 있던 공간은 웬만큼 날씬하지 않으면 엉덩이를 들이밀기 힘들 만큼 좁았다. 그녀는 피곤했나보다. 양쪽에 사내를 ...
“쟤는 애를 안 낳아봐서 그래”제1125호 우리 언니는 결혼한 지 6년 됐다. 나이는 서른아홉. 아이가 없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아니, 왜 아직 아이가 없대?” “아이를 낳고 싶지 않대요.” 이렇게 대답하면 또 다른 질문이 꼬리를 문다.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 “네가 아이 낳은 걸 부러워하지는...
삼복더위 장어죽 한 그릇제1125호 다수리가 끝나는 어두니골 어귀에 보를 막아 우리 집 앞까지는 2km가 넘는 잔잔한 모래강이었습니다. 우리 집 위쪽에서 서서히 여울이 지다가 삼치라우소 근방부터는 아주 사나운 여울이 지고 삼치라우 소용돌이를 만나게 됩니다. 저녁때면 모래밭에 거뭇거뭇 골뱅이가 즐비했습니다. 건너편은 허공다리 벼랑 밑이어서 ...
더위 먹지 말고 이것제1125호아침에 눈떠 창문 열고 밖을 내다봤더니 건너편 빌라 옥상에서 중년 남자가 그물 손질을 하고 있었다. 그의 아내로 보이는 여자는 그물에서 떼어낸 자잘한 물고기들을 모아 아이스박스에 담고 있었다. 그물은 가느다란 나일론 줄로 엮은 자망이었는데 그물코 사이사이에 은빛 물고기들이 제법 많이 박혀 있었다. 그물코 ...
10년 동안 지구 돌다 마침내 귀환제1125호 ‘두번째달’의 음악을 처음 들은 건 꼭 12년 전인 2004년 가을이었다. 이나영, 김민준, 김민정, 현빈 등이 출연한 MBC 드라마 <아일랜드>(인정옥 작가는 요즘 뭐하시나?)를 보다가 제목처럼 ‘아일랜드스러운’ 선율에 꽂혀버리고 말았다. 극중 인물들의 운명이 서로 엇갈리는...
“내 질투에선 썩은 냄새가 나”제1125호 한국 드라마에는 ‘여주인공 친구’라는 역할이 있다. 대개 주인공의 지지자나 대변자에 가까운 역할로, 독립적 서사 없이 주인공의 서사에 종속된 이들이다. 물론 남주인공 곁에도 이런 감초 같은 친구는 존재한다. 문제는 기본적으로 ‘호모 소셜’한 사회에서 남주인공은 다양한 인간관계를 보여주는 데 비해, 여주인공…
조금 이상하고 많이 사랑스러운제1125호 수풀이 여름에 울창해지는 이유를 하나는 알겠다. 그늘 많아지라고. 푸른 잎이 우거진 나무나 수풀을 뜻하는 녹음(綠陰)이란 단어도 ‘그늘 음’ 자를 쓴다. 푸름과 그늘은 함께다. 그리고 푸름만 풍경인 건 아니다. 빛은 제 무늬를 그늘로 만든다. 그늘은 풍경이 된다. 푸르뎅뎅한 10대의 시작, ‘푸르른 해’...
<일제의 흔적을 걷다> 외 신간 안내제1125호 일제의 흔적을 걷다 정명섭 외 지음, 더난출판 펴냄, 1만5천원 서울 남산에는 일본식 사찰 ‘신사’가 있다. 제주에 가면 성산일출봉 절벽에 일본군의 동굴 진지가 있다. 남산은 데이트 코스, 성산일출봉은 관광 코스 아니냐고 물을 법하다. 지은이들의 정당한 반론. “기억한다는 것이 쓸모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