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엔 이제 이들이 없다제1044호이 사진들은 한 달 전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11번 출구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길에는 스무 개 남짓의 노점상이 있었다. 여든의 할머니는 1만원짜리 모자를, 서른셋의 청년은 2천원짜리 닭꼬치를 팔았다. 그리고 문어·호떡·떡볶이·어묵을 파는 포장마차들이 있었다. 지금 그 길엔 이들이 ...
다 주고 남은 것제1044호두 강물이 머리를 맞대듯이 만나 하나의 강으로 흐르는 경기도 양평군 ‘두물머리’와 자연정화공원 ‘세미원’에 부는 새해 강바람이 차디차다. 못물은 싸늘하게 얼어붙었고, 검게 탄 연줄기와 샤워기 꼭지를 닮은 연밥은 세찬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꺾여 어지럽게 엉켜 있다. “물을 보며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며 ...
미국이 저벅저벅제1042호쿠바의 심장부에 미국이 들어왔다. 12월17일(현지시각) 쿠바 아바나의 거리에서 한 여성이 미국 성조기가 그려진 바지를 입고 걸어가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이날 양국 관계의 정상화를 선언하는 성명을 각각 발표했다. 미국과 소련이 중심이 된 냉전 대결 ...
터키의 ‘구룡마을’, 그곳에 사람이 있다제1041호터키 앙카라 시내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시 외곽에 위치한 ‘디크멘밸리’ 철거촌. 허물어져가는 낡은 집들과 그 뒤로 보이는 높은 건물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돼, 고층의 타워팰리스가 뒤로 보이는 서울 강남의 구룡마을과 닮았다. 지금은 터키 내 소수민족인 쿠르드인과 시리아 난민 500여 명이 공동체를...
‘인권’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제1041호 2006년 12월 열여덟 번째 공연을 끝으로 중단됐던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이른바 ‘양밤’(2003년 이후 ‘인권콘서트’)이 8년 만에 부활했다. 지난 12월11일 오후 서울 광진구 세종대에서 인권단체연석회의, 세월호참사국민대책회의,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 등 5...
교육도 로또제1040호12월4일 늦은 오후, 고사리손을 쥔 학부모들이 긴장한 얼굴로 강당에 들어선다.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신입생 33명을 뽑는데, 8배 가까운 240여 명이 몰렸다. 꽉 들어찬 강당엔 당첨 숫자를 적어가는 대형 화면이 띄워졌다. 당첨된 학부모가 앞에 나와 탁구공이 담긴 박스에 손을 넣을 때마다 남아 있는...
그의 작디작은 소망 하나제1040호“8년 전 죽으려고 강원도에 갔다가 돈만 다 쓰고 질긴 목숨 가지고 다시 서울로 왔다.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을지로 지하도에서 밥 대신 술과 담배로 2년을 살았다. 갈 곳도, 쉴 곳도, 할 일도 없으니 거리나 공원, 지하철을 오가며 시간을 보냈다. 돈이 없어 구걸도 했으나 마음만 더 비참해졌다. 그리고 8개월...
고단한 잠제1039호겨울 진객 흑두루미(천연기념물 제228호)들이 11월27일 저녁 해가 떨어지자 충남 서산 천수만 간월호 모래섬에 내려앉고 있다. 삵이나 너구리 같은 천적이 접근하기 어려운 고립된 지역을 잠자리로 좋아하는 흑두루미는 그동안 모래섬이 물에 잠기는 바람에 천수만 주변 논에서 편치 않은 잠을 잤다. 간월호 주변...
아스팔트를 벗기면제1038호개발을 앞둔 서울 종로의 도심 한복판에서 옛 건물 터와 유물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수혈선(竪穴線)과 이전 건물의 기둥이 엉켜 복잡해 보이지만, 땅을 한 꺼풀씩 벗길 때마다 옛사람들이 살던 길과 집과 역사가 어렴풋이 드러나고 있다. 지금은 봉인하듯이 아스팔트를 씌우고 고층 빌딩이 줄지어 들어서 있지만 서울 도심…
무엇이 사진인가? 세월호 앞에 묻다제1038호사진이라는 매체는 기괴한 운명을 타고났다. 어떤 경우 행복하다. 많은 경우 잔인하다. 사진은, 직접 본 뒤라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내 사진’은 나와 사진기가 ‘그때, 그곳에’ 있었다는 반박하기 힘든 증언이다. 하나 그것을 ‘내 사진’이라고만 불러도 좋을까. 사진은 찍는 이보다, 찍힌 이에 더 의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