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보지 않던 나’ 대신 다른 이를 돌보며제1429호 “저는 너무 당연히 그리는 사람이어서.” 그림을 그리지 않는 삶은 상상한 적 없다고 했다. 하얀 벽지를 크레용 색으로 채워가던 꼬마는 또래들이 있는 어린이집이 아닌 미술학원으로 갔다. 중학생 언니 오빠들 틈에서 소묘용 석고상을 따라 그리며 컸다. 그러고 들어간 초등학교에서 전포롱은 어딘가 모자란 아이였다. “사…
실리콘의 발견 [연휴에 뭐 할까]제1429호 실리콘을 ‘발견’(발명 아님 주의)했다. 지난해 이사하면서 산 부착형 밀대에는 실리콘 솔이 딸려왔다.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알았다. 이게 물건이라는 것을. 더러워진 발판 매트가 세탁기를 갔다 와도 여전히 먼지투성이라 다시 욕실에 데리고 갔다. 물을 축이고 이걸 어쩌나 하다가 빨랫비누 옆에 손이 가는 ...
동·식물을 알면 지구의 역사가 보인다제1429호 지구는 생명으로 가득 찬 행성이다. 푸른 하늘과 산과 바다도 온갖 식물과 동물이 없다면 삭막한 풍경이지 않을까? 39억 년 전 바다에서 생명의 씨앗인 원시세포가 처음 합성되고 세균이 탄생했다. 6억 년 전에는 최초의 동물 유기체가, 4억 년 전에는 최초의 식물이 출현했다. 지금까지 장구한 시간의 역사에서 셀 ...
“반박시 니 말이 맞음” 시대의 역사학제1428호 시민이란 말은 꽤 복잡미묘하다. 보통 국민은 너무 딱딱하고, 개인은 너무 가벼울 때 궁여지책으로 쓰이지만 의미는 그때그때 다르다. ‘평범한’이 앞에 붙으면 흔히 ‘소시민’으로 불리는,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뭔가 억울한 상황에 놓인 생활인이 연상된다. 반면 ‘깨어 있는’이 붙으면 세상을 향해 열심히 목소...
일본 경찰과 밀정을 피할 ‘암호’를 만들라제1428호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회 책임비서 김재명은 우편물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각 도 위원회 책임자와 원거리 교신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식민지 통치기구가 관장하는 우편제도를 활용하는 것은 비밀결사 간부로서 위험한 행위였다. 교신하려면 안전을 보장하는 두터운 장치가 필요했다. 무엇보다 믿을 만한…
그 향수의 삶은 꽤 향수할 만하지 않나제1428호 2007년 홍콩 완차이. 한국으로 치면 서울 종로3가 같은 지역이다. 구도심의 오랜 번화가라 세월이 켜켜이 쌓여 있다. 이런 곳엔 꼭 현지인들만 찾는 솜씨 좋은 작은 양복점이 숨어 있게 마련이다. 마흔 중반의 여자 혼자 슈트를 만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영어를 못한다는 것. 양복...
패잔병의 전리품 ‘개복숭아술’제1428호 올해 농사는 망했다. 옥수수, 고추, 오이, 호박, 가지도. 숨넘어갈 듯한 가뭄에 이어 한 치 오차도 없이 들이닥친 장마를 이기지 못했다. 얼치기 농군이 부지런하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주말마다 덥다고 안 가고 비 온다고 안 가고 피곤하다고 안 갔더니 밭이 작살났다. 지금 밭을 지배하는 건 내가 아니라 ...
청년과 연대 꿈꾸는 86세대의 자기성찰제1428호 “1년 남짓한 정규직 교수 노릇을 그만두었다. 지금 대학은 누구나 가는 곳이 된 대신 공고한 서열과 세계 최고 수준의 등록금으로 민중에게 고통을 안기고 있다. 엘리트주의적 상아탑 모델이 답은 아니다. 나는 떠나는 쪽을 선택했다.”2019년 11월 조형근 전 한림대 교수가 <한겨레>에 쓴 칼럼...
넘어져도 괜찮아 함께 달리자... 가이드러너 세계제1428호 붉은 우레탄이 깔린 육상 트랙을 두 사람이 나란히 몸을 붙인 채 달렸다. 어느덧 트랙 저편까지 뛰어간 둘은 한 사람이 된 듯 포개져 보였다. 각자의 손과 팔목에 걸린 끈으로 연결된 두 사람은 동시에 한쪽 다리로 땅을 밀고 다른 쪽 다리로는 무릎을 들어올려 몸을 띄웠다. 지면을 딛고 차고, 빠르게 달리는 두 사람...
사지 못할 책을 책방에 내놓는 이유제1427호 충남 천안의 책방 노마만리는 3층 규모의 건물로 외벽을 파벽돌로 장식해 꽤 육중해 보인다. 여기에 100년을 훌쩍 넘긴 고서를 포함해 낡고 오래된 책을 다룬다. 그러다보니 책방이라는 앙증맞은 이름보다는 서점 혹은 서관이라는 고식의 이름이 더 적합해 보인다. 지금 이곳 1층 서가를 장식하는 책은 1960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