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밥을 지어 제각각 먹방을 찍고제1064호외국에서 공부할 때 몇 년에 한 번 한국에 들르면 가장 긴급한 일은 지인들과 밥 약속을 잡는 일이었다. 모두들 “밥이나 한번 먹자”고 했다. 밥 대접과 차 대접, 밥상과 술상 사이에는 우정과 친밀성의 위계서열 같은 것이 있다. 가까운 친구나 지인은 차를 사거나 저녁 대신 점심을 사면 자신들의 선의와 우정,...
동물원 사육사 얌제1064호 얌은 얼마 전까지 계약직 동물원 사육사였다. 주로 원숭이들을 맡았다. 얌은 새끼 알락꼬리여우원숭이의 기저귀를 채워주었고 히말라야원숭이의 목욕물을 덥히고 망토원숭이의 텃세를 버티기 위해 기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일을 그만두기 전까진 혼기를 놓친 다람쥐원숭이들의 소개팅을 주선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얌은…
여럿의 무심함을 먹고 자라는 콩나물제1064호다섯 평이나 될까 한 방을 안방이라고 했었다. 겨울이 시작되면 할머니와 형, 누이 둘 그리고 내가 안방에 모여 잠을 잤다. 누이들은 봄부터 가을까지 건넛방에서 지내지만 날이 추워지면 안방으로 옮겨와 지냈다. 건넛방은 나름 신식으로 연탄보일러가 놓여 있었지만 보루쿠(구멍 뚫린 큰 벽돌) 담벼락에 벽지 ...
여성·연대·공유, 세 개의 처방전제1064호*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조지 밀러 감독은 의사 출신이다. 의대생 시절에 영화 특강을 듣고 동료와 함께 단편영화를 찍으며 영화의 꿈도 함께 키웠다. 1970년대 후반, 병원에서 구급전문의 수련의로 일할 때, 오스트레일리아 폭주족들이 부상을 입고 실려왔다. 이들은 몸이 나으면 또다시 자동차와...
레나타 살레츨의 <불안들> 등 신간 안내제1063호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1만6천원 라캉의 틀을 빌려 현대사회의 병리적 이면을 분석해온 슬로베니아학파인 저자가 다섯 가지 테마로 불안을 분석한다. 다섯 가지는 전쟁, 노동, 사랑, 모성, 아버지의 권위다. 불안은 권위가 부재해서인가 너무 많아서인가, 미디...
동물화한 스놉, 그 얼굴을 보았을지도제1063호한국에서 두드러지기 시작한 혐오에 관한 분석들이 이어지고 있다. <여/성이론> 32호는 ‘혐오의 시대’를 커버로 다루었다. ‘혐오의 시대-2015년, 혐오는 어떻게 문제적 정동(affect)이 되었는가’에서 손희정(여성문화이론연구소)은 87년 체제의 실패와 ‘혐오하는 스놉’의 ...
절실하다, 깊숙히 톡 쏘는 그 무엇!제1063호TV 드라마는 ‘사’자 직업을 좋아한다. <모래시계>의 검사, <하얀 거탑>의 의사, <풍문으로 들었소>의 변호사… 그리고 이젠 <프로듀사>다. 그럴 만도 하다. <꽃보다 할배> <삼시...
독거노인 령제1063호독거노인 령은 얼마 전 타투 전문가를 찾아갔다. 령은 그동안 폐지를 주워서 모아놓은 돈을 내놓았다. 자신의 앞가슴에 DNR(Do Not Resuscitate)라는 글씨를 새겨 넣어달라고 주문했다. 얼마 전 령은 전세계에 자신처럼 가슴에 이런 문신을 한 노인이 많다는 것을 양로...
기억이 빠져나간 인간제1063호*<스틸 앨리스>에 관한 스포일러가 들어 있습니다. 기억이란 무엇일까. 직장에 심란한 일들이 쌓여가면서, 오늘 내일쯤 나 출근길 어디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딱 한 달 뒤 회복 가능할 만큼만 다쳐서 코앞에 닥친 일정들에서 싹 빠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즈음...
새댁이 다리 다치곤 갑부 되겠네제1063호새댁 서정분이는 물푸레 골짜기 중목재 밑에서 나물을 뜯어 먹고 삽니다. 봄이면 매일같이 나물을 뜯어 날라다 장날엔 풋나물로 팔고 무싯날은 데쳐 말려놓고 1년 내내, 나물 팔아 돈을 모읍니다. 이른 봄, 나물이 났나 보러 산에 올라갔다가 쭐쩍 미끄러지면서 발을 헛디뎌 다리를 삐었습니다. 큰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