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한 기질 아래 숨겨진 따뜻함제1074호 대지는 기질을 만들고, 그 기질은 부엌에 서면 식탁 위에, 거울 앞에 서면 입성으로, 술광에 서면 술통 안에, 그리고 전장에 서면 역사에 반영된다. 정복하지 못한 곳이 없었던 로마가 거의 유일하게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러난 곳이, 그들이 칼레도니아라고 불렀던 지금의 스코틀랜드다. 잉글랜드에서 ...
집을 집이게 하는 밥 냄새제1074호장사를 시작하고 몇 개월이 지나 사람 없는 집 안에 발을 들인 그녀는 어쩐지 우리 집이 아니라 낯선 집에 잘못 들어선 느낌이 들었노라고 말했다. 책장·걸상·침대·서랍장·세탁기·냉장고를 비롯해 집 안의 물건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자리잡고 있었지만 공간을 채우던 냄새가 사라지자 낯설게 느껴졌다는 것이…
저 낮고 어두운 기적이 계속되길제1074호가끔씩 한국의 헤비니스 음악을 들으며 비인기 종목을 떠올리곤 한다. 여자 핸드볼이나 남자 하키 같은 종목들이다. 대중의 무관심 속에서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는 건 같지만, 큰 국제대회가 열릴 때 잠깐이나마 열광의 대상이 되는 비인기 종목에 비해 헤비니스 음악은 늘 관심 밖에 있다는 게 다르다. ‘척박하다’는…
현실과 환상 사이, <어셈블리>제1074호 한때 정치드라마 열풍이 일던 시절이 있었다. 최초의 기록은 1981년 방영된 <제1공화국>(MBC)이다. 유신 체제의 종식과 함께 야심차게 등장했음에도 연출자가 안기부에 불려가는 사태까지 빚어내며 조기 종영을 당하고 만 비운의 드라마였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야 더 ...
당신도 ‘체’를 존경하나요제1074호우리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체 게바라를 존경하고 소비한다. 축구장에 대형 초상 사진으로 등장하고, 티셔츠에 프린트된 이미지로도 사랑받는다. 록 페스티벌의 관람객도, 서울과 미국 뉴욕 거리의 젊은이들도 체 게바라 옷을 입고 활보한다. 스타벅스의 머그잔에도 있다. 무한복제되는 이미지로 굳어진 지 오래다. 시대...
박래군의 펜제1074호박래군이 감옥에 있다. 그가 또다시 감옥에 갇혔다. 검찰은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직접행동을 불법 시위로 규정하고 그 책임을 박래군에게 묻고 있다. 무정부 vs 지휘체계가 분명한 시민 검찰은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을 박래군이라는 수괴의 지령을 받아 행동한 폭력배인 양 취급하고 있다. ...
해변은 누구의 것인가제1074호프랑스에서 30대를 다 보내고 마흔이 넘어 서울과 파리 사이에서 엉거주춤 가정을 꾸리고 일을 하는 나는 프랑스에서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들뜬 여행을 떠날 때면 프랑스 사람 흉내에 꽤 능해졌다는 생각을 한다. 이국의 문화이자 이해 가능한 문화, 이탈리아 문화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선망을 모방하고 있다는 생…
진짜 엄마는 딴 곳에 있을 거야제1074호엄마는 줄곧 불행을 하소연했고 나는 그런 엄마가 미웠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죽음조차 무책임했던 아버지는 조금도 미워하지 않으면서 그 뒤 온갖 고생을 하며 자식들을 키운 홀어머니는 이렇게 열렬히 미워하다니. 사춘기 때는 “어머니는 아들 그 자체보다도 아들 속에 있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는 니체의 말에 …
우리의 밤은 맥주만큼 풍성하다제1074호 그날 저녁 거룩한 순례자가 되기로 했다. 맥주 불모지라 불리던 한국에서 최근 개성 있는 맥주들이 넘실댄다. 맛 좋기로 이름난 수입맥주들이 속속 소개되고 국내 소규모 양조장에서 제조되는 개성 있는 맥주들을 펍에서 쉽게 맛볼 수 있게 됐다. 맥주가 만든 물길을 따라나섰다. 8월5일 서울 신사동 가로...
‘귀향’, 시민이 직접 극장에 걸어볼까요?제1074호일본군의 우악스런 손에 끌려가는 14살 소녀, 그 어린 딸이 어느 곳으로 가는지 짐작조차 못하고 땅에 주저앉아 우는 엄마와 아빠, 지옥 같은 위안소 생활, 타국의 산골 구덩이에 밀어넣어져 불에 타는 위안부 소녀들…. 지난 7월28일 미국 워싱턴 레이번 의원회관에서 6분으로 압축된 한 한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