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세상이 필요하다고 외치자제1115호 1996년 5월, 군대 말년 휴가를 나와 켄 로치 감독의 <랜드 앤 프리덤>을 봤다. 강원도 철원 군부대에서 영화가 그리웠다. 군복 입은 관객은 나 혼자였지만, 관객은 제법 많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영국의 좌파 감독 켄 로치를 찾는 영화팬이 많았다. 얼마 전, 영화인들...
한강, 두렵고 낯선 세상으로 이끄는 영매제1115호 한강과 함께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의 공동수상자가 된 번역자 데버러 스미스에 대해 심사위원장인 보이드 톤킨은 “미와 공포의 기묘한(uncanny) 혼재”를 정확한 번역적 판단을 통해 결합시켰다는 점을 극찬했다. <채식주의자>(2007)에 구현된 세계뿐만 아니라 이에 대응되는...
챗봇에게 주문하세요제1115호 KLM네덜란드항공은 올해 3월 말 ‘새 직원’을 고용했다. 이 신입사원은 1년 365일, 하루 24시간 쉬지 않고 여행 일정 확인부터 체크인 알림, 항공기 발권, 예약 변경 관련 고객 응대까지 처리한다. 고객 불평이나 항의에도 화내거나 퉁명스레 대꾸하지 않는다. 분쟁 소지가 줄면...
갑반 A팀 막내 김군제1115호 * 각 언론사의 기사를 종합해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은성PSD 강북사무소 갑반 A팀의 막내 김군은 5월28일 오후 5시 구의역 5-3 승강장 스크린도어에 문제가 있다는 신고를 전달받았다. 다른 동료들은 모두 현장으로 나가고 사무실에는 입사 7개월차인 김군과 상황접수 직원 둘뿐이었다. ...
민주주의로 가는 정류장, 도서관제1115호 1987년 6월, 이한열과 나 그는 말하지 못하였다. 1987년의 이한열(1966~87)을, 그는 말하지 못하였다. 경찰이 싸지른 SY44 최루탄에 맞아 이한열은 27일간 사경을 헤매다 7월5일 새벽 숨졌다. 그도 중환자실 이한열의 바로 옆 침상에 누워 있었다....
아름답기만 한 것은 ‘미’가 아니다제1115호 오늘 산 최신형 스마트폰을 떨어뜨렸다. 하필 거친 아스팔트 위다. 동공에 지진이 일어난다. 밀려오는 절망과 좌절, 허탈은 떨어뜨려본 사람만 안다. 전화도 잘 걸리고, 문자를 주고받는 데도 문제가 없다. 본디 목적으로 쓰기에 부족한 건 전혀 없어도 분노를 삭이기 어렵다. 움푹 파인 모서리와 흠집 난 액정...
아무도 모른다제1114호 한 게이 커플이 몇 해 전 결혼식을 올렸다. 두 신랑은 서로 축가를 불러주기로 했다. 한 사람이 선택한 곡은 김경호의 <금지된 사랑>이었다. 동성 커플의 결혼식에서 부르면 사람들이 많이 웃을 것 같아 골랐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이 둘은 노래가 시작되자 슬프게 울었다. 노래 가사와 달리...
머리도 속고 몸도 속고제1114호 공부는 엉덩이로 하고 운동은 머리로 한다는 말을 믿었다. 축구나 농구처럼 경기 상대가 있는 운동에서 이기려면 머리를 써야 하고, 경기 중 움직이는 센스(감각)도 결국 머리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웨이트트레이닝이나 조깅처럼 혼자 하는 운동에서도 머리를 쓰려고 했다. 경기 상대가 없으니 머리...
날 좀 내버려둬제1114호 내 이름은 만세, 고양이다. 고양이들이 앞발 두 개를 가지런히 접어 가슴팍에 묻고 뒷발도 모아 배 아래 깔고 웅크린 자세를 ‘식빵 굽는다’고 말한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꼭 통통하게 잘 구워진 식빵처럼 반듯하기 때문이다. 봄볕이 내리쬐는 따뜻한 베란다나 커튼 뒤 아늑한 공간에서 이렇게 옹그려 앉아 있곤...
연애와 안전의 상관관계제1114호 최근 ‘데이트 폭력’이 가시화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데이트 폭력은 ‘폭력’보다 ‘데이트’에 방점이 찍힌다. 엄연한 폭력을 사적 영역으로 밀어넣고 ‘치정싸움’ ‘사랑해서 그랬다’라는 말로 문제의 본질을 은폐해온 관습은 힘이 세다. 실제로 3일에 한 번씩 여성이 친밀한 남성, 즉 남자친구나 남편, 혹은 ‘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