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과 남자는 길에서 줍는 거 아닌가요?제1170호 “동전과 남자는 길에서 줍는 거 아닌가요?” 이렇게 말하자 그는 목젖이 두드러진 긴 목을 뒤로 살짝 젖히며 크게 웃었다. 언젠가 저 도드라진 사과를 깨물어주겠어, 생각하며 그를 바라봤다. 그를 처음 만난 날을 거슬러 올라가면 닷새 전 내 이혼파티에서였다. 경애하는 나의 이혼 선배가 제안...
옛터 찾기제1169호 “나를 낳아준 분은 어디에 살아?” 다엘이 어릴 때 처음 생모에 대해 물었던 말이다. 이후 가끔 생각날 때마다 생모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 사는지 물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그런 질문이 뜸해져서 어느 날 내가 물었다. “낳아준 분에 대해 왜 안 물어봐? 궁금하지 않아?” “안 궁금해. 혹시 만나서 ...
삶의 쉼표를 노래하다제1170호 “개울가에 올챙이 한 마리 꼬물꼬물 헤엄치다….” 성악을 전공한 아빠는 병원에서 네 살 아이 손을 잡고 나지막이 노래를 불렀다. 아이와 함께하는 마지막 순간일지 몰랐다. 이날은 아빠에게도 아이에게도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코르넬리아드랑게증후군과 뇌전증을 앓는 혜송이는 2013년 4월1일 하루 동안 여섯...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외 신간 안내제1169호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채효정 지음, 교육공동체 벗 펴냄, 1만5천원 기업 논리에 맞서 인문학 최후의 보루로 떠오른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그 명성을 함께 만들었으나 결국 해고당한 시간 강사가 질문을 던진다.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사회학자 시대에 응답하다 김동춘 지음,...
그의 손은 거칠고 투박했다제1169호 사람 손엔 저마다 삶의 궤적이 남아 있다. 화가의 손톱 사이엔 지워지다 만 물감이, 작가의 중지 손가락 마디엔 오랜 시간 펜을 잡아 생긴 굳은살이, 역도 선수의 손바닥엔 아무리 뜯어도 되살아나는 단단한 살갗이 있다. 노르웨이의 목수이자 기능장인 올레 토르스텐센의 손은 자재나 도구에 긁히고 찢겨 거칠...
미로에서 만난 안내자제1169호 “헤겔은 개념이 움직이는 것 같아요. 한 문장 안에서도 시작과 끝에서 그 개념이 지칭하는 게 달라요. 개념이 문장 안에서 진화하는 걸까요?” 대학교 3학년 때였던가.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어가는 모임에서 헤겔의 책을 앞에 놓고 내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외쳤다. 이후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
어떤 물고기를 좋아하세요?제1169호 세점박이씬벵이라는 물고기가 있다. 주로 바닥에 파묻혀 있으며 얼핏 봐선 물고기 같지 않다. 한마디로 못생겼다. 반점으로 얼룩덜룩한 피부, 둥글게 휘어버린 등허리, 퉁퉁 부은 눈두덩과 처진 눈, 사람으로 치면 노인 같다. 문득 궁금하다. 물고기도 인간처럼 늙을까? 얼굴에 주름이 늘고, 흰머리가...
‘삐득삐득’ 말려야 제맛제1169호 내 의지와 상관없이 오늘 먹을 안주는 반건조 고등어로 결정됐다. 생선이라면 무조건 싱싱한 생물이 맛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겠지만 반건조 생선의 야릇한 감칠맛은 먹어본 사람들만 안다. 요즘 흔히 쓰는 ‘반건조’란 말을 내가 어릴 때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지역마다 표현이 달랐겠지만 우리 집에선 ‘삐득삐득…
블링블링한 인형보다 슈퍼히어로가 좋은Girl제1169호 핑크 vs 파랑. 여기는 어디, 지금은 어느 시대? 중학교 3학년 윤민희(15) 학생은 분홍과 파랑으로 양분된 대형마트 장난감 코너에서 순간 얼어붙었다. 학교에서 활발한 성격의 친구가 선생님에게 “여자애가 조신해야지” 라는 지적을 듣고 친구들이 억울해하던 일이 머리를 스쳤다. ‘지연이가 블링...
‘호모 게이머스’ 종말 맞나제1169호 1980년대 얘기다. 그땐 <갤러그> 좀 한다고 하면 누구나 ‘탄 빼기’를 구사했다. 최후의 나방 한 마리가 남으면 죽이지 않고 몇 바퀴 빙빙 돌렸다. 그러면 어느 순간 적들이 총을 쏘지 않는다. 일종의 버그다. 덕분에 동전 하나로도 죽지 않고 게임을 오래 즐겼다. 그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