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꿀 때가 가장 젊을 때제1224호툭하면 뭔가를 세어보던 때가 있었다. 내가 가진 것들을 가늠해보는 시기였는데, 그게 뭐든 간에 되도록 많을수록 좋았다. 그래야만 사는 일이, 살아왔던 날들이 비교적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그즈음 나를 사로잡은 생각은 상실과 결핍에 대한 거였다. 내게 없거나 모자란 것, 설령 내가 갖고 있더라도 내 것이 아닌...
사별 뒤 입양의 자세제12224호 “아무도 없는 폐허의 전쟁터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습니다. 가슴에는 치명상을 입고, 온몸을 압도하는 통증에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눈을 감고 있습니다. 자그마한 발소리가 들려옵니다. 가만히 다가온 손길이 차갑게 식어가는 얼굴을 만져줍니다. 깊이 팬 상처를 매만진 다음 온몸의 피와 땀을 닦아주며 속삭입니...
폭염, 피라미는 자유를 찾았다제1224호‘1994년을 뛰어넘는 최악의 폭염’이라는 보도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문득 궁금해졌다. 나의 1994년이. 24년 전의 일기장을 펴기에 앞서 심호흡을 크게 했다. 조금 두려웠다. 사실, 1994년의 일기는 쓴 뒤로 단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 유년 시절의 나를 만나면 ...
‘짤’로 만난 동생, 빵 터진 웃음보제1224호단잠을 자던 아이를 깨운 다음 아빠는 설명한다. “일어나자. 오늘 동생이 와. 병원에 가서 엄마랑 아기랑 며칠 자고 집에 돌아올 거야.” 동생이니 아기니 엄마니 몇몇 단어는 알아들어도, 전체 상황을 파악하기에 두 살 반은 이른 나이. 아무튼 아빠는 첫째를 목말을 태워 집을 나선다. 으쓱으쓱 어깨춤을 추며 걸어...
나의 방을 열고 당신의 집으로제1224호 반복해서 꾸는 꿈이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꿈이다. 돌아가는 집은 몇 가지 유형이 있는데, 알고 보면 어떻게든 이어져 있다. 비밀 통로가 있고 그 통로를 따라가면 이전 꿈에 등장했던 바로 그 집이 나온다. 조금씩 구조가 바뀌어 있기도 하고 장식이 달라져 있기도 하지만 나는 그곳이 결국 하나로 연결되어...
나의 늙은 영웅들제1224호 그날 밤, 악몽을 꾼 게 확실하다.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화들짝 놀라 깼다. 30대 초반 친구가 방황하는 날 보다 못해 20대가 주축인 한 모임에 데려간 날이었다. 모두 예의 발랐다. 예의가 ‘너무’ 바른 사람들도 있었다. “어머, ○○씨 어머니세요?” 정말 밝은 청년이었다. 첫 번째 ...
공공의 예의제1223호 느지막한 오후 우동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식당은 꽤 넓고 대부분 자리가 비어 있었다. 홀은 중앙에 파티션을 두어 공간을 둘로 분리하고 테이블은 어림잡아 마흔 개는 돼 보였다. 입구의 직원은 어느 쪽이든 편한 곳에 앉으라 권했다. 왼편 중앙 열에는 노부부가 마주 앉아 우동을 먹고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체공녀 강주룡>외 신간 안내제1223호체공녀 강주룡 박서련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1만3천원 2015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고 등단한 작가 박서련의 첫 장편소설. 1931년 평양 평원 고무공장 파업을 주동하며 을밀대 지붕에 올라 우리나라 최초로 고공농성을 벌였던 여성 노동자 강주룡(1901∼31)의 일생을 ...
“서재는 다층적 자서전” 제1223호<밤의 도서관>을 쓴 작가이자 현재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인 알베르토 망겔은 독서 능력을 철저히 신봉하는 인물이다. 서가에 꽂힌 어떤 책의 특정 페이지에 그가 고민하는 문제의 해답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삶의 지식을 모으는 마음으로 책을 수집하다보니 소장한 책만 3만5천여 권이다. 그중...
독립운동 예봉 꺾은 개척리의 비극제1223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사회에는 냉기류가 흘렀다. 정순만이 석방됐을 때 그랬다. 양성춘 살인사건(제1219호 ‘개척리 살인사건’ 참조)의 피고인인 그는 불과 1년 만에 모든 죄과를 씻고 보란 듯이 밝은 세상에 나왔다. 그의 출옥을 보고서 두 개의 상반된 여론이 조성됐다. 잘됐다고 반기는 사람들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