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땡큐] 겸손제1325호배달하다보면 길을 물어보는 사람이 많다. 누가 봐도 배달 복장이니, 길을 잘 알 것 같은가보다. 잘 찾았다. 조금 자랑하자면, 서울 마포구 합정·홍익대·망원 쪽 주소만 불러주면 머리에는 내비게이션 3D 그래픽처럼 지도가 떠오른다. 길을 잃었다면 근처 배달라이더를 붙잡고 신주소(도로명주소)를 불러주면…
[독서방역본부] ‘불임 이유서’ 시대의, 전위 시인제1325호쭈글쭈글한 노인인데 머리는 짧고, 살집 없는 얼굴에 눈썹을 가늘게 그렸다. 눈물방울 모양 귀걸이는 한쪽만 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 가는데 주름진 목 아래로 넉넉한 젖가슴이 있으니 여성인 듯하다. 표정은 지적이며 슬프지만 존엄해 보인다. 손가락은 뒤틀리고 변형돼서 류머티즘관절염으로 평생…
[TV직시] 루피에겐 죄가 없다제1325호뽀로로의 친구 루피는 수줍음 많고 상냥한 꼬마 비버다.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가 방영된 EBS 공식 누리집 소개에 따르면 루피는 “따듯한 마음에 여린 심성의 소유자로 말썽쟁이 친구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잊지 않는 숲속 마을의 모범 소녀”지만, 요즘 포털 사이트에 ‘루피’를 치면 자동 ...
[내가 사랑한 동물] 어머니 따라 집에 온 네눈박이제1325호평창 장날입니다. 어머니가 장에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후평 버덩을 지나는데 눈썹 위에 눈처럼 동그란 회색 점이 두 개가 있어 눈이 네 개처럼 보이는 네눈박이 검정 개 한 마리가 꼬리를 설렁설렁 흔들며 따라붙어 사람들 틈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옥고재를 함께 넘었습니다. 너무 천연…
[몸생물학] 자궁 그림 보고 두려워마세요제1325호 1918년 겨울, 미국의 제조사 킴벌리클라크는 3천t 넘게 재고로 쌓인 셀루코튼(Cellucotton)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한 해 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하며 야전병원에서 거즈로 사용할 면이 부족해지자, 킴벌리클라크 연구진은 목재에서 추출한 섬유질을 가공해 셀루코튼이라는 ...
화성 탐사 60년…인간 발자국 한 발 더 가까이제1325호1865년, 프랑스 소설가 쥘 베른이 공상과학(SF)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를 출간할 때만 해도 우주여행은 아득한 상상 속 이야기였다.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동력 비행에 성공한 것은 1903년이 되어서였다. 베른이 처음 묘사한 우주 비행체는 초대형 대포로 쏘아 ...
당신은 학부모입니까, 부모입니까제1325호시작할 때는 학생이 몇 명 있더니, 얼마 안 돼 다들 자리를 뜨고 J 혼자 남았다. 어른들만 있는 강연장에 중1 여학생이 끝까지 앉아 있는 건 드문 일이다. 이 아이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질의응답 시간에 내 편에서 말을 걸었다. “뒤에 앉은 학생은, 혹시 질문이나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J가 ...
[뉴스 큐레이터] 넌 세상을 지켜 난 너를 지킬게제1325호포스터만 보면 익숙한 대만 청춘영화인가 싶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소년, 소녀. “넌 세상을 지켜, 난 너를 지킬게”라는 대사. 하지만 세상을 지키는 쪽이 소년이 아닌, 소녀(저우둥위)라는 점에서 이 영화의 특별함은 시작된다. “저우둥위처럼 몇 년에 걸쳐 매 작품 새로운 모습을 증명해 보인 이가 ...
[페미니즘 읽는 시간] 우리는 ‘아플 권리’가 있다제1324호봄볕이 포근했지만 코로나19 감염 확산을 걱정하며 집에 가만히 머물던 4월 말. 어린이날을 앞두고 질병관리본부에서 마련한 특별 브리핑을 생중계로 지켜봤다. 기자들을 대신한 어린이들의 질문은 봄바람처럼 다정하고 정성스러웠으며 간절했다. “친구들과 생일파티를 하면 안 되나요?” “집 밖에서 자전거 씽…
책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었다제1324호다다서재의 첫 책은 현직 임상심리학자가 쓴 교양서였다. 저자는 일본 오키나와의 돌봄시설에서 조현병 환자들과 함께한 경험을 바탕으로 ‘일상’과 ‘돌봄’에 대해 이야기한다. 얼핏 에세이나 소설 같지만 철학, 사회학, 인류학, 심층심리학을 광범위하게 인용한 학술서다. 어려운 내용인데 잘 읽혔다. 재미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