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어쩌란 말인가, 익어가는 옥수수를제1427호 우리가 올봄 옥수수를 심는다고 하니 마을 사람들이 “옥수수 힘들 텐데~” 했다. “지난해 심어보니 쉽던데요?” 해맑게 답했던 게 몇 달 전. 밭의 절반만 심자던 게 심다보니 온 밭을 가득 채웠다. 옥수수는 심는 것도 기르는 것도 쉬웠다. 가물어도 비가 많이 와도 쑥쑥 자랐다. 옥수수 수확기가 왔다...
뿌린 대로 거두는 희열과 운 앞의 종종걸음제1426호 봄 농사의 대미는 감자 캐기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 감자를 캐낸 밭은 고이 덮어 쉬게 둔다. 입추가 오기 전에 심을 배추와 무로 넘어가기 위함이다. 얼치기(!) 농사를 지으며 칼럼까지 쓰면서 감자를 캐낸 이후 배추, 무를 심기 전까지. 지난해 여름에도 뭘 쓰기가 괴로웠다. 짓는 농사(아니,...
풀을 뽑느니 항하사를 세겠다제1423호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세는 숫자 단위는 대개 억 이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내 주변에 조 단위 재산을 가진 이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조의 1만 배인 경이나, 경의 1만 배인 해 단위 숫자에 이르면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무람없는 인플레이션의 시대라 해도 그렇다. 항하사라는 숫자 단위가 있다. ...
빠져나가지 못하리, 풀의 블랙홀제1422호 뿌리를 뽑는다. 싹을 자른다. 근절한다. 뿌리 깊다. 싹을 밟는다. 싹이 없다. 싹이 노랗다. 풀을 뽑다보면 농사와 관련된 말이 많다는 걸 깨닫는다. 풀은 주로 뿌리를 뽑는데,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뿌리를 뽑아 고랑에 던져놓으면 비가 오거나 날이 구질구질 습하기만 해도 슬금슬금 머리를 들고 ...
호박, 요리의 주연이 되다제1421호 “이것 좀 먹어봐, 정말 맛있어.” “응 아니야, 아빠나 많이 먹어.”고기를 소금장에 찍던 아이는 냉정했다. 하지만 난 흔들렸다. 밭에서 난 채소들을 듬성듬성 잘라, 버섯과 함께 볶기만 했을 뿐이다. 간은 소금과 후추만 했고 들기름을 훌훌 둘렀다. 그런데 이럴 수가 있는가. 이렇게 쉽고 빠르고 무성의하...
김냉·불꽃놀이, 스케일이 미친 동문 축제제1419호 S초등학교 동문회에 초대받았다. 막국숫집에 갔더니 아는 얼굴 여럿이 국수를 먹고 있었다. 웬일이시냐 인사하니 “다음주에 동문회잖아요. 놀러 와서 밥 먹고 놀다 가요” 한다. 지나다니며 학교를 본 적이 없는데, 보건소 건너편 길로 조금 들어가면 있단다. 점심 먹고 학교를 찾아가보니 아까 국숫집에서 만난 사람...
이 오이의 쓴맛은 기후위기입니다제1418호 “파가 말라, 오이는 쓰고.” 운동하는 아이의 수발(!)을 드느라 지난 주말 포천에 가지 못했다. ‘와잎’은 심히 걱정스럽다는 말투로 ‘기후가 큰일’이라고 읊조렸다. 지난 주말 갓 딴 오이를 무쳐 먹었는데 너무 썼고, 파 끝은 누렇게 타들어갔다고 했다. 그게 기후까지 들먹일 일인가 싶지만 5월에 ...
기술영농과 ‘조치원 맥가이버’의 탄생제1416호 충청권엔 극심한 봄가뭄이다. 하늘이 우중충한데도 비는 내리지 않는다. 3주 전 심은 고춧잎이 누렇게 떴다. 적상추는 마치 이끼처럼 땅에 붙어 도무지 자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물 좀 달라”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내 마음도 타들어간다. 21세기 대명천지에 밭농사에 필요한 물을 하늘에만 기댈 순 ...
그냥 다 풀, 엄마들 눈엔 다 먹을 거제1415호 진부에 농막을 지어놓고 어른들을 초대했다. 팔순이 다 되신 우리 부모님, 시어머니 모두 자연에 풀어놓으니 ‘카이저 소제’가 따로 없었다. 나물만 보면 생기가 돌아 무릎 관절이 낫고 굽은 허리가 펴지는 기적이 실제로 일어난다. 자작나무에 물이 오를 즈음 아버지가 오셨다. 황무지나 다름없던 밭을 마지막으...
농민의 노동, 임금의 밥상제1413호 사람은 왜 삼시 세끼를 먹어야 하는가. 어려서부터 늘 궁금했지만 누구에게도 묻진 못했다. 그러다 언젠가 ‘하루 세끼를 먹는 이유’를 인터넷에 검색해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지식 정보를 공유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인류가 하루에 세끼를 먹게 된 이유가 발명왕 에디슨의 음모 때문이고 시기적으론 고작 1910년대 시작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