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그랬으면 좋겠네제1294호한 주 안에 두 해가 공존하는 이번 주는 연말연시라는 말이 잘 들어맞는다. 2020년. 내게 이 숫자는 어쩐지 우주를 연상시킨다. 어릴 적 주말 아침을 간절히 기다려 영접하던 우주 서사, <은하철도 999>의 시대 배경은 서기 2221년.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
5일 만에 양성되는 진술분석전문가제1294호한 여성이 출산했다. 자신도 가족도 모르는 사이에 산모가 되었다. 가족은 아이 아버지가 누군지 추궁했고 여성은 울면서 자신의 휴대전화 연락처 속 한 남자를 지목했다. 길을 걷는데 처음 보는 남자가 졸졸 쫓아오며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조르더니 거절하는 자신을 빌라 주차장으로 끌고 가서 성폭행했다는 것이다. 피…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습니다제1294호며칠 전 출판마케팅 부장한테서 전자우편을 전달받았습니다. “<한겨레21>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독자입니다. ‘뉴스룸에서’ 코너에서 후원자에게 달력을 보내주신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역시 은 마음이 참 예쁩니다. 후원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싶어서 달력을 제공해주신다는 마음이겠죠? 저도 최소한의 ...
그 사상검사는 대권을 꿈꿨다?제1294호1949년 국회 프락치 사건은 ‘프락치’ 반공 신화의 고전 텍스트다. 이 사건 이후 한국에서 프락치는 오랫동안 ‘빨갱이’처럼 저주받은 낙인으로 각인됐다. 각인되면,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사회에서 추방돼야 할 존재가 되었다. 가혹한 고문을 받아도, 조작된 증거로 ‘사법 살인’을 당해도 사회는 이의를 ...
인생 걸고 화장을 버리는 이유제1294호20대 나는 지금 탈코르셋한 사람들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1990년대다. 짧게 친 머리에 청바지만 주야장천 입고 다녔다. 한 록밴드 로고가 새겨진 검은색 면티를 하도 입어 친구가 불태우고 싶다고 했다. 마음속은 탈코르셋과 정반대였다. 여성이라는 표지를 다 지워버리려 든 까닭은 얕잡아 보이기 싫어서였다. 내게 여성...
나를 받아들이는 데 반평생이 걸렸다제1293호내 아이는 께름칙한 감정을 잘 털어내며 모드 전환이 빠르다. 목 놓아 울 정도로 서럽고 억울한 일을 겪고도 곧 괜찮아지는 모습에 당황한 적도 많은데, 단지 어려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착해서도 둔해서도 아니다. 단순하고 뒤끝이 없어서다. 내가 열 살 무렵부터 40년 가까이 지니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것을 열 살짜...
<부러진 날개> 외 신간안내제1293호부러진 날개 안토니오 알타리바 글·킴 그림, 송민주 옮김, 길찾기 펴냄, 1만5천원 아나키스트 아버지의 생애를 만화로 펴내 온갖 상을 휩쓸었던 작가가 어머니의 일대기를 그렸다. 전쟁·파시즘·가부장제로 얼룩진 스페인 근대사에서 숱한 죽음의 위기와 성폭력, 성차별을 겪고 묵묵히 ...
그의 ‘자유론’은 언제나 현재시제 의문문제1293호세상을 둥글게 둥글게만 사는 사람을 보면 흐린 눈을 뜨는 이, 누구보다 자기 자신과 잘 지내는 삶이 더 소중한 이들의 ‘수호성인’ 같은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가 ‘세상과 대결하는 태도’를 풀어쓴 에세이 <사는 것은 싸우는 것이다>(바다출판사 펴냄)를 내놨다. 특유의 기개와 과단성은 더욱...
도마뱀제1293호도마뱀은 숨죽여 앉아 있었다. 민경은 척추로부터 흐르는 모든 신경이 보풀처럼 바짝 일어난 채 꾸역꾸역 진술서를 써갔다. 오랜만에 장시간 잡은 펜에 검지가 아릿해질 때쯤 목을 슬쩍 세워보니 김 팀장과 한 팀장, 유 대리의 숙인 뒤통수가 보였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뒷목을 저릿하게 타고 오른다. -솔직히 쓰시면 ...
“오늘을 잘 버티면 그게 내일이 되고 모레가 된다”제129호 젊은 학자이자 가장이던 아버지는 말기 암 진단을 받고 1년여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전업주부인 아내와 중학생, 초등학생인 삼 남매를 남겨두고. 투병 기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번갈아가며 썼던 투병일기는 아버지의 사후 책으로 나왔지만, 어머니는 출판사가 집으로 보낸 책 수십 권을 몽땅 쓰레기통에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