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을 깨우고 꿈을 흔드는 노동제1102호 부우우우우~ 부르르르르르르~ 입술이 사르르 떨린다. 하헤히호후흐허~ 목청을 가다듬는다. 숨을 깊이 마셨다 내쉬며 발성 연습을 이어간다. 따뜻한 물로 목을 적시고, 영어 문장을 큰 소리로 읽는다. 세계적인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가 2009년 내한해 불렀던 <그리운 금강산>을 들은 이후 ...
사라져버릴지 모를 성수동의 장인들제1099호 서울 성수동 제화의 거리 뒷골목, 낡은 작업대에 네 명의 구두장이가 앉아 있다. 제화공 앞에 하나씩 놓인 칼판, 고무보다는 강하고 아크릴보다는 연한 구두 제작 판이다. 망치, 가위, 칼이 칼판에서 순서를 기다린다. 강력 접착제를 바른 쇠 지퍼와 구두 겉감으로 쓰일 소가죽이 쌓여 있다. ...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제1097호 지팡이를 든 어느 노부부가 경기도 과천시 서울대공원 등산로를 향해 걷는다. 그 뒤를 따라 일군의 노인들이 산을 오른다. 방학을 맞은 학생들은 떼 지어 서울랜드로 달려간다. 놀이기구를 타는 아이들의 비명을 들으며 문쌍용(57) 조경사가 톱과 전지가위를 꺼낸다. 서울대공원 호수 둘레길 무궁화 정원, ...
뚝딱뚝딱 쿵쾅쿵쾅 한겨울의 ‘건축 교향곡’제1095호 새해 둘쨋날 해가 고개를 내민다. 드럼통 화로에 언 손을 녹이던 목수들이 연장을 챙겨 건물 속으로 사라진다. 고원길(54) 목수가 ‘못주머니’를 어깨에 두른다. 허리춤 왼쪽엔 망치와 시노가 꽂혀 있다. 시노(shino)는 끝이 가늘고 굽어져 있는 쇠막대다. 오른쪽엔 낡은 가방이 달렸다. 칸마다 ...
정(情) 싣고 달리는 산골 전령사의 고달픈 질주제1093호 빨간 오토바이가 산골마을 샛길을 오른다.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핸들을 틀어 시골집 대문에 비스듬히 선다. 오토바이에서 내리지 않고 팔을 뻗어 우편함에 편지를 넣는다. 편지함이 없는 맞은편 기와집엔 대문 사이에 우편물을 꽂는다. 다음 골목, 오토바이에서 내려 등기우편물을 들고 문을 두드린다. 몇 ...
1500도 쇳물에서 피어난 1.5mm 꽃제1091호 ‘윙~’ 굉음을 울리며 시뻘건 쇳물을 토해낸다. 무쇠(선철, 탄소 함유량이 1.7% 이상인 철)와 무른쇠(연철, 탄소 함유량이 0.2% 이하인 철)를 품은 2.5t 전기로가 출렁인다. 이영원(38) 계장이 ‘반재’라고 부르는 가시 모양의 쇳덩어리를 던져넣는다. 화염에 휩싸인 전기로가...
존중과 경멸이 흐르는 전화선제1089호 따뜻한 물 한 모금을 마셔 목을 적신다. 헤드셋을 착용한다. 왼쪽 귀에 이어폰, 오른쪽에 마이크가 달렸다. 전화벨이 울린다. “120다산콜센터 지윤재입니다. 수도요금 어떤 부분 때문이세요? 계량기 마지막 숫자가 어떻게 되나요? 시민님, 확인 감사드립니다. 11월3일부터 오늘 22일까지 총 4...
‘송곳’을 모아 ‘노동법’ 울타리를 친다제1087호 전화벨이 울린다. 임금 체불 상담 전화다. 연장수당과 주휴수당을 받지 못했단다. 근로기준법 제56조. 계산기를 두드려 체불 액수를 알려준다. 위법 사항이 한둘이 아니다. 그의 뇌에 저장된 근로기준법 116개 조에서 해당 조항이 하나씩 호출된다. 대학 3학년 때 처음 만나 책장이 닳도록 달달 외운...
우리는 인터넷을 설치하는 유령제1085호 “안녕하세요? 고객님 SK 인터넷입니다. 208-2번지 2층으로 방문드려도 될까요?” 빨강·주황·회색이 어우러진 잠바, 잘 다려 ‘각’ 잡힌 바지를 입은 SK브로드밴드 이영한(41) 기사가 공구 가방을 어깨에 걸친다. 오른손에 동축케이블, 왼손에 랜선을 들고 계단을 오른다. 방 두 개짜리 ...
40년째 미싱은 잘도 도네제1083호 오른발이 페달을 살짝 밟았다 뗀다. 실타래가 스르르 풀린다. 윗실은 흰색, 밑실은 옅은 회색이다. 바늘이 옷감 원단에 ‘자바라’(주름)를 박는다. 드륵 드륵 드르륵. 손가락으로 원단을 밀어올린다. 페달 윗부분을 지그시 밟는다. 드르르르르르르르르륵. 고급스런 무늬가 새겨진다. 그녀의 왼손 검지와 중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