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9일 저녁 서울 구로디지털단지역 6번 출구. 명자씨가 지은 옷으로 꾸며진 패션쇼가 열렸다. ‘쇼미더봉제’(Show me the 봉제_ 자자[명자+영자]). 구로공단 대우어패럴 출신 강명자·권영자씨의 이야기와 봉제 기법을 활용한 패션쇼가 퇴근하는 이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명자씨의 제안을 받아 김선민 감독이 패션쇼 기획 연출을, 구로문화공단 예술가들이 디자인을 맡았다. 서울직업전문학교 학생들은 모델로 참여했다. 예쁘고 잘생기고 날씬한 모델들이 멋진 옷을 입고 걷는 여느 패션쇼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한땀한땀 새겨진 옷의 디자인이 달랐다. 빨간 원피스에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디자인을 넣었다. 또 다른 원피스의 밑단은 벽돌 모양이 그려졌다. 영자씨가 1980년대 빨간색 벽돌로 세워진 공장을 추억했다. 흰 원피스에는 디지털단지의 유리벽이 새겨졌다. 옷을 짓는 아름다운 손을 꽃으로 형상화했다. “시집갈 밑천도 주겠다는데 거절했죠” 여성 모델이 입은 붉은 원피스에 유명 상표들이 박음질되어 있다. 주제는 라벨. 수백만원짜리 브랜드에 가려진 노동을 표현한 디자인이다. 남성 모델이 입은 티셔츠와 바지 한 벌에는 1960~80년대 구로공단에서 옷을 만들었던 회사 이름과 천들이 조각되어 있다. ‘중고딩’ 나이에 공단에 들어와 타이밍(각성제) 먹고 졸린 눈을 비비며 시다와 미싱공으로 살다 떠난, 이름 없는 노동자들을 기억하는 옷이었다. 명자·영자씨 딸이 엄마가 만든 옷을 입고 모델로 출연했다. “해를 디자인한 원피스를 만들었어요. 그늘진 삶을 살았던 엄마와 달리 우리 아이들 앞날에는 서광이 비쳤으면 하는 바람으로. 우리 딸들은 조금 더 나은 공간에서 일했으면 좋겠는데….” 권영자씨가 패션쇼를 추억하며 밝게 웃는다. 명자씨가 봉제공장 대표 음료 박카스를 건넨다. 40년 전 그날을 떠올린다. 서울 금천구 가산동 패션의 거리 W몰 자리에 있던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사무장이었던 그는 1985년 6월22일 경찰에 끌려갔다. 대우그룹 계열사인 대우어패럴에선 2천 명의 직공이 일하고 있었다. 주당 80시간을 일해서 받은 월급으로 쪽방 월세 3만원을 내면 3만원 남짓한 돈으로 한 달을 버텨야 했다. 노조를 만들어 파업을 했고, 월급을 올렸다. 여공들의 분노가 구로공단에 물결칠 것을 두려워한 정권은 노사 합의가 끝난 두 달 뒤 노조 간부들을 전격 구속시켰다. 당국의 허락을 받지 않고 노보를 발행해 언론기본법을 위반했다는 이유였다. 6월24일 아침,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이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하자, 효성물산·선일섬유·가리봉전자·부흥사 등 구로공단 노조로 연대파업이 들불처럼 번졌다. 구로동맹파업,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연대파업이었다. 35명 구속, 370명 연행, 2천 명 해고라는 아픔을 남겼지만,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시집갈 밑천을 주겠다고 했어요. 사무장만 포기하라고 했죠. 고민도 안 하고 단번에 거절했어요. 저는 그냥 노동조합이 좋았거든요. 그때 돈 받고 갔으면 지금의 나는 없겠죠.” 당시 회사가 제시한 금액은 2천만원. 지금으로 치면 5억원쯤 될까? 저들은 구로동맹파업의 상징 강명자를 지금도 유혹한다. “새누리당으로 가버린 당시 노조위원장이 저에게 너 언제까지 미싱 할래, 자리 하나 준다고 그만하라고 하는데, 전 불편한 옷을 입는 게 싫어요. 난 미싱이 그냥 좋아요.” 대신 기륭전자를 비롯해 열심히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명자씨 곁에 있다. 그는 최근 박근혜의 노동정책이 노동개혁인지 노동재앙인지를 묻는 국민투표 제안위원으로 참여했다. 단 한 번도 남의 밑에서 월급 받으며 일한 적 없는 대통령이 우리 딸·아들을 평생 비정규직 만든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동네에도 국민투표소를 설치할 계획이다. ‘요꼬’ 공장의 막내는 65살
9월9일 저녁 서울 구로디지털단지역 6번 출구. 명자씨가 지은 옷으로 꾸며진 패션쇼가 열렸다. ‘쇼미더봉제’(Show me the 봉제_ 자자[명자+영자]). 구로공단 대우어패럴 출신 강명자·권영자씨의 이야기와 봉제 기법을 활용한 패션쇼가 퇴근하는 이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명자씨의 제안을 받아 김선민 감독이 패션쇼 기획 연출을, 구로문화공단 예술가들이 디자인을 맡았다. 서울직업전문학교 학생들은 모델로 참여했다. 예쁘고 잘생기고 날씬한 모델들이 멋진 옷을 입고 걷는 여느 패션쇼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한땀한땀 새겨진 옷의 디자인이 달랐다. 빨간 원피스에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디자인을 넣었다. 또 다른 원피스의 밑단은 벽돌 모양이 그려졌다. 영자씨가 1980년대 빨간색 벽돌로 세워진 공장을 추억했다. 흰 원피스에는 디지털단지의 유리벽이 새겨졌다. 옷을 짓는 아름다운 손을 꽃으로 형상화했다. “시집갈 밑천도 주겠다는데 거절했죠” 여성 모델이 입은 붉은 원피스에 유명 상표들이 박음질되어 있다. 주제는 라벨. 수백만원짜리 브랜드에 가려진 노동을 표현한 디자인이다. 남성 모델이 입은 티셔츠와 바지 한 벌에는 1960~80년대 구로공단에서 옷을 만들었던 회사 이름과 천들이 조각되어 있다. ‘중고딩’ 나이에 공단에 들어와 타이밍(각성제) 먹고 졸린 눈을 비비며 시다와 미싱공으로 살다 떠난, 이름 없는 노동자들을 기억하는 옷이었다. 명자·영자씨 딸이 엄마가 만든 옷을 입고 모델로 출연했다. “해를 디자인한 원피스를 만들었어요. 그늘진 삶을 살았던 엄마와 달리 우리 아이들 앞날에는 서광이 비쳤으면 하는 바람으로. 우리 딸들은 조금 더 나은 공간에서 일했으면 좋겠는데….” 권영자씨가 패션쇼를 추억하며 밝게 웃는다. 명자씨가 봉제공장 대표 음료 박카스를 건넨다. 40년 전 그날을 떠올린다. 서울 금천구 가산동 패션의 거리 W몰 자리에 있던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사무장이었던 그는 1985년 6월22일 경찰에 끌려갔다. 대우그룹 계열사인 대우어패럴에선 2천 명의 직공이 일하고 있었다. 주당 80시간을 일해서 받은 월급으로 쪽방 월세 3만원을 내면 3만원 남짓한 돈으로 한 달을 버텨야 했다. 노조를 만들어 파업을 했고, 월급을 올렸다. 여공들의 분노가 구로공단에 물결칠 것을 두려워한 정권은 노사 합의가 끝난 두 달 뒤 노조 간부들을 전격 구속시켰다. 당국의 허락을 받지 않고 노보를 발행해 언론기본법을 위반했다는 이유였다. 6월24일 아침,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이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하자, 효성물산·선일섬유·가리봉전자·부흥사 등 구로공단 노조로 연대파업이 들불처럼 번졌다. 구로동맹파업,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연대파업이었다. 35명 구속, 370명 연행, 2천 명 해고라는 아픔을 남겼지만,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시집갈 밑천을 주겠다고 했어요. 사무장만 포기하라고 했죠. 고민도 안 하고 단번에 거절했어요. 저는 그냥 노동조합이 좋았거든요. 그때 돈 받고 갔으면 지금의 나는 없겠죠.” 당시 회사가 제시한 금액은 2천만원. 지금으로 치면 5억원쯤 될까? 저들은 구로동맹파업의 상징 강명자를 지금도 유혹한다. “새누리당으로 가버린 당시 노조위원장이 저에게 너 언제까지 미싱 할래, 자리 하나 준다고 그만하라고 하는데, 전 불편한 옷을 입는 게 싫어요. 난 미싱이 그냥 좋아요.” 대신 기륭전자를 비롯해 열심히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명자씨 곁에 있다. 그는 최근 박근혜의 노동정책이 노동개혁인지 노동재앙인지를 묻는 국민투표 제안위원으로 참여했다. 단 한 번도 남의 밑에서 월급 받으며 일한 적 없는 대통령이 우리 딸·아들을 평생 비정규직 만든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동네에도 국민투표소를 설치할 계획이다. ‘요꼬’ 공장의 막내는 65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