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
제주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왓은 ‘밭’을 뜻하는 제주말이다. 왓을 따라 사람들이 살았다. 해안길을 따라, 중산간 길을 따라 어디든 왓이 있다. 제주 서쪽에 비옥한 왓이, 동쪽에 척박한 ‘빌레왓’(너럭바위가 있는 돌밭)이 있었다. 왓을 지키기 위해 검은 돌로 쌓은 ‘밭담’은 제주의 마을 풍경을 만들었다. 제주 전역의 밭담을 이어붙이면 용이 구불구불 솟구쳐오르는 모습이 보인다고 해 ‘흑룡만리’라는 말도 있다. 오랜 세월 제주 사람들을 먹이고, 살리는 구실도 왓이 했다. 해녀들이 물질로 먹거리를 가져오던 바다는 아예 ‘바당밭’(바다밭)이라고 불렸다. 왓을 따라 제주 여행을 떠나보자. 아직 그 길이 낯설다면, 여기 <한겨레21>이 건네는 제주 비밀노트가 있다. 제주의 길과 오름, 자연, 문화, 역사, 맛과 재미를 담았다.
제주의 하늘과 바다, 오름을 따라 걷다보면 필연적으로 음악이나 그림과 만나게 될 것이다. 협재 근처에서 음악에 홀려 걷다보면 만나게 될, 공연이 열리는 밥집 ‘빛밝을 랑’. 정용일 기자
동·서 일주도로와 함께 제주를 둘러싸는 또 하나의 길은 바다를 낀 구불구불한 해안도로다. 여유 있는 날에는 종종 바다를 보며 해안도로를 달리는데, 가장 좋아하는 코스 중 하나가 바로 하도리를 지나는 길이다. 피아니스트 임인건이 연주하고 싱어송라이터 강아솔이 목소리를 얹은 <하도리 가는 길>이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하도리 가는 길 따뜻한 밝은 햇살/ 하얗게 곱게 핀 억새 웃고 있네/ 지금쯤 철새들은 호숫가 위를 날까”라는 노랫말에 나오는 것처럼, 철새 도래지가 펼쳐져 있고 바로 옆에 드넓은 하도해수욕장이 있다. 이렇게 하도리 해안도로를 천천히 지나다보면 카페 벨롱과 마주치게 된다. ‘반짝반짝’이라는 뜻의 제주어 ‘벨롱벨롱’에서 가져온 이름으로, 다양한 장르의 음악공연과 예술전시가 이뤄지는 복합문화공간이다. 홈페이지에서 공연 소식과 아티스트 소개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지난 주말, 세화포구쯤부터 노을에 홀려 해안도로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카페 벨롱에 잠시 멈춰섰다. 안쪽에서 ‘낭만유랑악단’의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연주하는 이들 뒤로, 커다란 유리문 너머 발그레한 바다가 숨죽이고 있는 모습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술 마시다 옆 테이블에서 울리는 연주 주말에 오랜만에 이중섭 거리에 들렀다. 한낮의 뜨거운 햇살 탓인지 평소보다 조금 한산했다. 서귀포항 근처 올레 6길과 7길 사이에 있는 이곳은 화가 이중섭이 1951년 가족과 함께 피란을 와 생활했던 초가집이 보존돼 있다. 운이 좋으면 뮤지션들의 거리연주를 만날 수도 있다. 언덕을 따라 크고 작은 카페와 공방들을 구경하며 걸어 올라가면 오른쪽에 작가의 산책길로 통하는 길이 보인다. 5km가 조금 안 되는 도보탐방 코스 안에 미술관, 전시관 등이 있으니 참고하면 좋다. 같은 골목에 위치한 (구)서귀포관광극장에도 여행자를 위한 다양한 공연 프로그램들이 8월 말까지 빼곡하게 차 있다. 한라산 중턱에서 1100도로를 타고 중문 방향으로 내려오면 대포동 마을 안쪽에 자리잡은 에리두 Cafe n Beds가 있다. 이름 그대로 기본적으로는 숙박시설이지만, 1층 카페에서 틈틈이 공연을 비롯해 지역 주민들의 중고장터나 각종 공예 세미나 등이 열린다. 날씨가 좋은 날엔 중고장터가 소담한 잔디마당에 자리잡기도 한다. 지금까지 요조, 짙은, 한희정, 주윤하 등이 이곳에서 공연했다. 이들과 비슷한 느낌의 음악을 좋아하는 분들은 여행 계획을 짤 때 공연 일정을 함께 눈여겨보면 좋을 듯하다. 40명 남짓 앉을 수 있는 크지 않은 공간이라 티켓은 대부분 매진된다. 제주공항에서 리무진버스를 타고 중문까지 바로 내려오는 것도 편리한 방법이다. 각종 정보와 예매 방법 등은 ‘에리두 Cafe n Beds’ 네이버 블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행자일 때와 달리 막상 제주에 살게 되면서는 동서 혹은 남북을 오갈 일이 거의 없지만 어제는 시간을 내어 80km 가까이 떨어진 서쪽 협재에 다녀왔다. 아는 동생이 운영하는 오리엔탈 식당 빛밝을 랑이 협재해변 바로 맞은편에 있고, 여기에선 제주에서 먹기 힘든 쌀국수나 팟타이 등을 먹을 수 있다. 하지만 먼 거리를 달려간 진짜 이유는 말로만 듣던 그 피아노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앞면을 투명하게 개조한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면 해머가 움직이는 것이 보여 꽤나 근사하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장님답게 구석구석을 악기로 채워놓았는데, 드럼을 포함한 대부분이 실제 공연에 쓰인다. ‘랑콘’이라 이름 붙인 콘서트는 매달 1∼2회 정도 열리지만, 밥집이 술집으로 변하는 심야에는 옆 테이블 뮤지션의 즉석연주를 우연히 즐길 수도 있다. 본점인 아일랜드포소랑이 한경면 청수리에 있는데, 이곳에는 그림이나 예술작품 전시 외에 기타교실, 캘리그래피 수업 등이 꾸준히 열리는 ‘공간 다락’이 있다. 공연과 전시 등의 정보는 ‘빛밝을 랑’ 페이스북 페이지 혹은 ‘아일랜드포소랑’ 네이버 블로그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행자 기다리는 공연 빼곡 우연이어도 필연이어도 좋다. 누구에게든, 이 섬에서 마주치게 될 어떤 하늘이나 바다 혹은 오름이 수많은 감각과 화학작용을 일으키기를. 어떤 음악이나 그림을 만나 오래오래 함께 기억되기를. 가슴 뛰는 환상으로 남아주기를. 정나리 ‘스왈로우’ 키보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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