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분노를 읽다제1204호 두 번째는 더 깊고 아린 체험이었다. 지난 1년 여에 걸친 월례 세미나를 통해, 김석범(1925~ ) 대하소설 <화산도>(火山島) 전 12권을 다시 완독했다. 2015년 10월 <화산도>가 한국어로 완역된 직후 약 석 달에 걸쳐 처음...
“4·3은 내 숙명이었다”제1204호예술로 피어난 4·3 제주4·3이 잊힌 게 아니라면, 광기의 역사를 고발한 문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4·3이 외롭지 않았다면, 야만의 세월을 기록한 예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순이삼촌>의 현기영부터 김석범, 강요배가 있어 4·3의 슬픔이 뭍으로 전해질 수 있었다. 영화 <지슬&g...
4·3을 관광상품화 말라제1204호 “미안하다고 하지 말걸 그랬다. 죄송하다고 하지 말걸 그랬다. 나는 내가 피스메이커(peacemaker)인 게 싫다.” 얼마 전 일기장에 내가 적은 말들이다. 내 안에서 갑자기 분출된 말들이라 당황스러웠다. 내 안에 ‘나는 내가 이러는 게 싫어’라는 감정이 오랫동안 쌓여 있었던 것 ...
알뜨르 비행장에 평화 내릴까제1204호 1944년 말 일본군은 일본 본토 방위를 위해 ‘결호작전’(決號作戰)을 세웠다. 일본군은 미군의 공격 경로를 예상해서 제주도를 작전계획에 포함시켰다. 이 작전을 ‘결7호작전’이라 한다. 제주도 방어를 전담하는 제58군 사령부가 창설되고, 그 밑에 관동군 111사단과 121사단이 투입됐으며, ...
극우반공국가의 탄생제1204호 역사의 도미노였다. 제주4·3은 여순사건을 낳았고 여순사건은 분단체제를 완성했다. 정부 수립 2개월 만인 1948년 10월19일, 4·3 진압을 거부하며 국군 제14연대가 봉기했다. 위기를 느낀 이승만 정부는 가용 병력을 총동원해 초토화 진압 작전을 벌였다. 반란군과 민간인의 구분은 중요...
비극의 뿌리를 기억하라제1204호 해방공간은 극적인 시대였다. 해방과 분단, 좌익과 우익, 혁명과 반혁명의 시간이 공존했다. 해방의 기쁨과 새 세상에 대한 열망은 벼락처럼 왔다가 한순간 꿈처럼 사라졌다. 고작 3년도 채 안 된 시간이었지만 해방공간은 새 세상의 열망이 곳곳에서 분출하는 나날이었다. 그 열망은 한반도 끝자락 제주에서 폭발했다. ...
미국, 제주 4·3의 또 다른 가해자제1204호70년 전, 그날들 제주4·3 70주년이다. 그해 죽음을 피해 태어나 살아남은 이들이 칠순을 맞았다. 70년. 희생자들의 주검이 흙으로 돌아가고도 남을 시간이다. 무차별적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극우 반공국가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여전히 그날의 상처에 괴로워하며 몸서리치는 유족들에게 대한민국은 얼마나…
아직도 구천 헤매는 영혼들제1204호 비행기 굉음이 고막을 타고 들어와 머리를 때린다. 거기 중장비 기계음이 더해져 소리 분간이 잘되지 않았다. 그때였다. 누군가 다급하게 굴착기를 멈춰세웠다. 자갈이 가득 찬 구덩이로 미끄러져 내려간 사람이 작은 뼛조각을 찾아냈다. 유골이었다. 60여 년 만의 해후였다. 너무도 소중한 뼛조각 하나 ...
이젠 ‘치유’를 얘기할 때제1204호 제주4·3은 탐라 개벽 이래 제주도에 유례를 찾기 힘든 희생을 몰고 왔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아물지 않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사건이 전개되는 7년7개월 동안 제주도민들은 너무나 큰 희생을 치렀다. 고립무원의 40년 군경 토벌대는 1948년 11월 중순께부터 넉 달 동안 젖먹...
死·삶을 말한다제1204호 형을 날려버렸다. 일정 때 일본으로 간 아버지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었다. 조천중학원에 다니던 큰형은 집안의 가장이었다. 할머니와 어머니, 누나와 같이 살았다. 둘째 형은 몸이 아파서 집에 누워만 있었다. 어머니가 의지할 데라곤 큰형밖에 없었다. 그런 형이 경찰의 수배를 받았다. 난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