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4·3과 다크투어리즘 나는 집에 돌아오면서 계속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안하다고 말하지 말걸, 죄송하다고 말하지 말걸, 나는 피스메이커가 아니야, 다시는 그렇게 비굴하게 죄송하다고 하지 않을 거야, 노처녀라는 말은 꼭 없어져야 해. 올드미스, 골드미스, 된장녀, 김치녀, 이딴 여성차별적인 단어들도 반드시 없어져야 해.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다보니 어느 순간 웃음이 터져나왔다. 마흔이 ‘불혹’이라고 이야기했던 <논어>의 주장에 별로 공감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예전 같았으면 내 생각에 그런 확신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기꺼이 피스메이커의 역할을 자임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그렇게 하다가는 다음 세대에도, 그다음 세대에도, ‘노처녀’라는 사악한 구시대의 단어가 남아 있을 테니까. 어쩌면 나에게 필요한 ‘불혹’이란 이렇듯 굳이 더 권위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고도, 내 의견을 그저 내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당당하게 그러쥘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마흔을 넘어서며 내게 쏟아진 축복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었다. 내 생각을 말하기 위해 그 어떤 권위의 힘도 빌리지 않기. 칭찬받지 않아도 좋으니, 그냥 내 의견을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만족하기. 더 멋진 대단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타인의 말을 인용하지 않기. 그렇게 할 수 있는 용기를 준 것이 내 나이 마흔의 힘이었다. 그 용기가 아직 부족해 부끄럽긴 하지만, 이제부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려 한다. ‘그들과 나의 다름’을 생각하라 얼마 전 제주 4·3평화공원에 갔을 때도 나는 그렇게 ‘내 안에서 피어오르는 마흔의 힘’을 느꼈다. 4·3평화공원 전시실에서 나는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이라는 여행 패턴이 제주 여행의 또 다른 테마가 되고 있다는 분위기를 감지했다. 다크투어리즘을 여행상품으로 만든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그토록 참혹한, 여전히 완전히 이해받지 못한 4·3을 상품으로 만드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물론 4·3평화공원에 더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그로 인해 4·3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확산되는 것은 너무나 반갑고 소중한 일이다. 하지만 다크투어리즘이라는 여행 트렌드에 4·3을 편승시키는 것은 동의할 수 없었다. 나는 ‘다크투어리즘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름답고 화사하고 ‘인증샷 찍고 싶은’ 분위기가 따로 있고, 심각하고 진지하며 우울하고 슬픈 역사적 현장이 따로 있는가.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그 수많은 오름들, 우리가 아무런 생각 없이 천진난만하게 인증샷을 찍었던 그 모든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 학살의 현장이 숨어 있었다. 다크투어리즘의 장소는 결코 전형적인 관광명소들과 전혀 다른 곳이 아니며, ‘어두운 역사적 상처’는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두부 자르듯 확연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어느새 제주 4·3평화공원을 다크투어리즘의 관광상품으로 만드는 것에 반대하는 글을 열정적으로 쓰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그런 생각을 정리하는 데도 오래 걸리고, 온갖 자료를 뒤졌을 것이고, 그러고도 확신이 생기지 않아 권위자의 조언을 구했을 것이다. 이제는 ‘이게 과연 맞는 생각일까’ 고민하며 온갖 조언을 구하지 않는다. 이것이 공자가 말하는 불혹과 일맥상통한다면, 나는 이런 ‘미혹되지 않음’이 참으로 좋다. 내 의견을 만들기 위해 온갖 참고 문헌을 끌어들이고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는 피곤한 감정노동을 이제는 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예전보다 더 많이 책을 읽기는 하지만, 그 책들의 이야기에 ‘혹하기’보다는 ‘그들과 나의 다름’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어떤 위대한 작가에게 일방적으로 설득당하기보다, 그와 대등하게 대화하고 싶어졌다. 얼마 전 켄트 M. 키스의 시 ‘역설적인 계명들’을 읽다가 ‘그래도’라는 접속사가 얼마나 아름다운 울림을 자아내는지를 깨달았다. “사람은 종종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그들을 용서하라./ 친절을 베풀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뭔가 이기적인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래도 베풀라./ 성공하면, 가짜 친구 몇 명과 진짜 적 몇 명이 생길 것이다. 그래도 성공하라./ 오늘 하는 좋은 일이 내일이면 잊혀질 것이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라./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기 쉽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 도움이 절실한 이들을 돕고 나서 오히려 공격당할 수도 있다. 그래도 도우라./ 세상에 당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내줘도 면박만 당할 것이다. 그래도 최고의 것을 내줘라.” 이 시를 읽다보니, 내 마음속에 숨어 있던 수많은 ‘그래도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들’의 목록이 일제히 휴화산처럼 깨어나, 그동안 남의 눈치를 보고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꼭꼭 숨겨오기만 했던 열정의 마그마가 폭발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가 지닌 치유의 힘 키스의 시를 읽으며 나는 ‘그래도’라는 접속사가 지닌 치유적 힘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았다. ‘그래도’라는 말이 마음속에서 저절로 튀어나오는 순간, 아무리 주변 사람들이 눈치를 줘도 ‘그래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의 목록이 흔들리지 않는 순간, 우리는 ‘불혹’이 되는 것이 아닐까. 세상이 당신의 의견을 비웃으며 ‘혹시 네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닐까’라고 의심하는 눈빛을 보내도, 그래도 거침없이 말하라. 당신이 떠올린 바로 그 첫 번째 생각을. 당신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길어올린 가장 당신다운 생각을. 온 세상이 당신의 꿈을 가로막아도,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라. 이제는 더 아름답고 더 대단한 것들에 혹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이제는 흔들리지 않고,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내가 스스로 진정한 나 자신이 될 수 있으니까.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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