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때 자식을 잃고 오열하는 주민들. 뒤편에서 있는 사람은 미 임시군사고문단원인 랠프 블리스 소령. 미 임시군사고문단은 여순사건 진압작전을 지휘했다. 한겨레
여수를 장악한 반군 2개 대대는 10월20일 오전 9시30분께 김지회 중위의 지휘 아래 여수역에서 통근열차를 이용해 전남 순천으로 북상했다. 순천역 앞에서 대기하던 홍순석 중위 휘하 순천 파견 2개 중대가 즉시 반군에 합류했다. 광주에서 급파돼 순천교와 순천역에 배치됐던 제4연대 1개 중대도 반란에 반대하는 일부 사병을 사살한 뒤 반군에 가담했다. 20일 오후 3시께 순천 시내를 완전 점령한 반군은 병력을 3개 부대로 재편성했다. 주력 1천여 명은 구례·곡성·남원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학구 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일부는 광주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벌교·보성·화순 방면으로, 나머지는 경상도 지방 진출을 위해 광양·하동 방향으로 진격했다. 남원·구례·보성 등지에서는 반군이 도착하기 전에 지방 좌익 세력이 지역을 점령해 14연대가 무혈 입성하는 일도 있었다. 그동안 비합법 상태에서 지하활동을 하던 지역 남로당원 등이 사건에 적극 가담했다. 이승만 “아동이라도 불순분자 제거”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정부는 이를 즉각 반란으로 규정해 진압에 나섰다. 육군총사령부는 10월21일 반군토벌전투사령관에 육군총사령관 송호성 준장을 임명해 제2여단과 제5여단을 지휘하게 했다. 또한 제2여단장에 원용덕 대령, 제5여단장에 특별부대사령관 김백일 중령을 임명해 진압작전을 맡겼다. 같은 날 육군 5개 연대, 비행대, 수색대를 뼈대로 한 진압부대가 편성됐다. 반군의 대응이 예상외로 강력해지자, 10월22일에는 부산에 주둔한 제5연대가 추가로 진압작전에 동원됐다. 이와 함께 정부는 10월22일 여수·순천 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군법에 의해 사형 등에 처한다고 밝혔다. 대통령 이승만은 10월23일 ‘남녀아동이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여, 반역적 사상이 만연하지 못하게 하라’는 내용의 경고문을 발표했다. 사건의 원인이 공산주의, 좌익세력에 있다고 본 것이다.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이와 같은 이 대통령의 경고문이 진압작전 지휘관으로 하여금 민간인을 상대로 무리한 작전을 펼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의 승인대로 군경은 진압 과정에서 반군과 민간인을 구별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민간인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총살했다. 미군 관계자가 “정부군은 공산주의 봉기에 협력했다는 의심이 조금이라도 드는 사람은 사살하고 다녔다”고 본국에 보고할 정도였다. 봉기는 진압군이 23일 순천을 점령한 데 이어 27일 여수를 탈환하면서 종결됐다. 곧바로 피의 보복이 이어졌다. 이적행위자 색출은 손가락으로 지목하는 1단계와 심문·재판의 2단계로 진행됐다. 경찰·청년단원·학련생·우익인사 등이 머리가 짧거나 군용팬티를 입은 자, 손바닥에 총을 든 흔적이 있는 자 등을 가려냈지만 개인적인 원한 관계로 억울하게 지목당해 목숨을 잃은 이도 많았다. 말 그대로 ‘손가락 총’이었다. 반군의 즉결처분에 가담하거나 반군 점령 기간에 인민재판에 앞장섰다고 지목된 자는 그 자리에서 곤봉·개머리판·체인 등으로 맞아 죽거나 총살당했다. 2단계 심사를 거친 이들은 즉석에서 총살되거나 군경에 넘겨졌다. 이 과정이 수개월간 계속됐다. 1949년 11월 전남도는 여순사건의 인명 피해를 1만1131명으로 집계했다. 봉기가 실패로 끝나자 반군과 지방 좌익들은 산에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에 토벌대는 빨치산의 보급로가 된다는 이유로 지리산과 조계산, 덕유산 인근의 마을을 초토화했다. 살기 위해 빨치산에게 식량과 편의를 제공한 주민들은 부역자로 몰려 즉결처형됐다. 피아 식별이 어려운 게릴라전의 특성에 일본 전체주의의 유산, ‘빨갱이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유사인종주의가 더해져 극도로 무자비한 방식의 학살이 자행됐다. 한반도 방방곡곡 피로 물들여 반군의 여수·순천 지역 점령 기간에 이뤄진 경찰과 그 가족, 공무원들에 대한 처형과 진압 이후 이른바 부역자 색출 과정에서 벌어진 대규모 보복 학살은 지역사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이 비극은 비단 여수·순천만의 일이 아니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 종전까지 공권력이 벌인 잔인한 보복은 한반도 방방곡곡을 피로 물들였다. 대한민국은 무덤 위에 세워진 나라였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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