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시베리아 서울역에서 베를린행 열차 타는 날까지제1101호 어깨에 묵직한 통증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 불시착한 게 분명했다. 인상을 찌푸리며 무엇이 잘못됐을까 생각했다. 동력재생기와 시간세팅 장치를 확인하려는 순간 머신의 해치가 열렸다. 어둠이 내린 거리에 유럽식 건물이 보였다. 머신을 빠져나와 출입문을 살펴보니 착륙 때의 충격으로 고장이 난 듯했다. 머신은 긴 …
지구 3분의 1을 돌았다제1098호 크론슈타트섬에서 발길을 돌려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찾았다. 로마노프왕조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가 살았던 왕궁인 겨울궁전이다.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만든 긴 줄 뒤에 붙어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무료 개장 날이어서 박물관 안은 관람객들로 넘쳐났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
독립군 홍범도, 레닌을 만나다제1096호 7월의 첫째날 아침, 모스크바의 출근길 인파에 섞여 지하철을 탔다. 세계 지하철 경연대회 같은 게 있다면 모스크바 지하철은 아마 대상을 받지 않았을까? 역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예술 작품이다. 지하철이 모스크바의 지하를 거미줄로 연결해나가는 과정에서 크렘린의 지도자들이 고민했던 것은 서방의 공격...
개고생과 유람 사이제1094호 호텔 창에 걸린 커튼을 통과한 햇살이 산란을 일으키며 얼굴을 간질이는 통에 눈을 떴다. 침대 옆 테이블에는 아시아에서의 마지막 밤을 불태우게 했던 빈 맥주병들이 공 맞은 볼링 핀처럼 일부는 서 있고 몇 개는 누워 있었다. 집을 떠나온 지 11일째 아침, 마음속에 불편함이 살짝 깔렸다. 원인은 귀국...
피와 키스제1092호 시베리아횡단열차 안에서의 음주는 금지돼 있다. 열차 내에서 맥주조차 팔지 않는다. 하지만 승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술을 구해다 마셨다. 가끔씩 올라타는 철도 경찰이 차내 승객들의 음주를 단속하고 술병을 빼앗아가기도 했다. 운이 나쁜 초보 여행자들이거나 이미 만취해서 단속반원들에 대한 경계를 느슨히 한 ...
잔혹동화가 시작됐다제1090호 그리하여 레닌과 트로츠키가 이끈 혁명은 성공했대요. 그리고 러시아 민중은 소비에트를 건설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끝. 할머니가 들려준 아름다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지만 현실은 잔혹동화였다. 돼지들의 우두머리 ‘스탈린’이 무엇이든 두 발로 걷는 것은 적이며 어떤 동물도 술을 마셔서는 안 되고 ...
거짓말처럼 다리가 나타났다제1088호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배낭을 챙겨 호스텔 카운터에 가니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호스텔 운영자 알톤의 장모라고 했다. 알톤은 아내, 장모와 함께 3교대로 호스텔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장모는 알톤 부부가 아이들을 챙길 오전 시간에 잠깐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만약 다시 온다면 다른 곳에 묵겠지만...
‘철덕’ 심장 쿵쾅대게 한 100년 전 흔적제1086호 이르쿠츠크를 출발해 안가라강을 따라 내려온 횡단철도를 막아선 것은 바이칼이라는 거인이었다. 둘레만 해도 2100km에 이르는 호수가 극동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열차가 달려야 할 호수 남쪽의 동서 호안(湖岸)은 바이칼의 호위무사라도 되는 듯 인간의 접근을 막았다. 열차 28량 싣고 바이칼 건넌 ...
여운형도 이 길을 달렸겠지제1084호 알람이 울렸다. 다행히 휴대전화가 손에 닿지 않는 거리에 있어서 던져버리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침 6시30분, 다시 누워도 최소한 12시간은 꼼짝 않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일어나야 했다. 술을 줄이고 조금 일찍 잘 것을, 수십 년째 아침마다 하는 후회를 했다. 호스텔의 미녀 ...
‘놈놈놈’ 활개쳤던 디아스포라의 도시제1082호 침대에서 나오기 싫었다. 오후쯤 일어나 슬리퍼를 끌고 동네나 어슬렁거리다 다시 돌아와 차가운 맥주나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어느새 숙소를 뒤로하고 있었다. 전날의 엄청난 헤맴과 달리 역으로 가는 길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숙소에서 5분쯤 걸어나오자 만난 내리막길 끝에 이르쿠츠크시를 가로지르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