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스노야르스크는 횡단철도 노선을 지나며 방문한 도시 중에 가장 아름다운 도시다. 64번 버스를 타고 도시의 관광안내지도에 1번으로 소개된 장소를 찾았다.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카라울니 언덕에는 성 파라스케바 피아트니차 정교회 성당이 서 있다. 1855년 코사크 기병대가 세운 경계탑이었던 목재 건물은 신에게서 영원한 사랑을 축복받는 신혼부부들의 성지가 되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신랑을 친구들이 환한 웃음으로 둘러싸고 멋진 도시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예니세이강이 도시를 휘돌아 흐르는 모습이 보였고 처음으로 찾았던 철교도 멀리 보였다. 이 언덕에 서면 어째서 10루블짜리 지폐의 도안에 피아트니차 성당과 크라스노야르스크 시내의 그림이 쓰였는지 알게 된다. 언덕을 걸어 내려와 제2차 세계대전 추모공원의 영원의 불꽃과 인사를 나누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시내 어디로든 가고 싶으면 일단 역으로 가는 게 가장 편리한 방법임을 알았다. 역 앞 버스 정류장에서는 시내 곳곳으로 가는 버스의 행선표와 번호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역으로 돌아와 81번 버스를 타고 성 니콜라스 배 박물관이 있는 시내 서쪽의 강변으로 향했다.
성 니콜라스 배 박물관은 실제 운행됐던 증기선을 박물관으로 꾸며 강둑 위에 전시해놓은 것이다. 1891년, 미래에 니콜라스 2세 황제로 등극하는 황태자가 이 배를 타고 베레좁스카야로부터 크라스노야르스크에 도착했다. 황제를 태웠던 배는 또 다른 러시아의 지도자도 승선시켰다. 1897년 레닌은 이 배로 예니세이강을 거슬러 유배지로 이송됐다.
레닌의 아내 크룹스카야는 다음해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갔다. “우리가 크라스노야르스크에 도착한 것은 1898년 5월1일이었는데, 거기서부터 예니세이까지는 배를 타고 올라가야 했다. 우리가 블라디미르 일리치가 살고 있던 슈센스코예 마을에 도착한 것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블리디미르 일리치는 사냥을 나가 있었다.” 크룹스카야의 회상기에서 알 수 있듯이 크라스노야르스크 역시 혁명가들을 귀양 보내는 시베리아의 유배지였다.
크룹스카야의 회고에 비추어보면 레닌은 유배지에서 무엇을 잡을 것인가를 주로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깨달은 것은 직업적 사냥꾼이 되어야 큰 곰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니었을까? 레닌이 유배지에서 나오자마자 발표한 ‘무엇을 할 것인가’는 혁명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의 지침서가 되었다.
크라스노야르스크에 유배됐던 레닌의 동상이 중앙광장에 세워져 있다.
거대한 추진용 물레방아가 배 양옆에 장착돼 있는 증기선에 올라 입장료 200루블을 내고 선실로 들어갔다. 배의 과거를 보여주는 흑백 사진과 황태자가 휴식을 취했을 화려한 방, 레닌이 유배지로 가는 동안 누웠던 2층 나무침대와 작은 탁자가 있는 선실이 잘 보존돼 있었다. 러시아의 변혁기에 두 지도자를 품었던 증기선 엔진에 연결된 커다란 강철 크랭크축의 윤활유는 말라 있었다. 시간의 무상함을 새기며 발길을 돌렸다.
저녁을 먹기 위해 버스를 타고 시내 한복판의 광장으로 갔다. 그동안 돈 쓸 일이 없었던지라 고급 레스토랑의 문을 열었다. 나비넥타이를 맨 웨이터가 메뉴판을 들고 나타났다.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약간 주눅이 들었지만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나가기는 싫었다. 다행히 훌륭한 음식에 비해 값이 비싸지 않았다. 미국의 경제제재가 루블화 환율을 떨어뜨린 덕이었다. 남의 불행으로 인해 여행자의 가벼운 주머니가 부담을 덜었다.
저녁을 먹는 동안 옆자리의 노부부가 계속 말을 걸었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길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묻다가 우리 일행의 국적이 한국이라는 것을 알고는 갑자기 표정이 굳어졌다. “잠깐, 당신들 언제 한국을 출발했는데?” 여자가 의심의 눈초리로 물었다. 이어 여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남자에게 한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메르스’라는 단어는 똑똑히 들었다. 한국에서 창궐한 메르스가 국제 뉴스의 메인 이슈였던 때라 나는 당황했다. 남자가 의심의 눈초리로 메르스에 대해 물었다. “우리의 초췌한 몰골을 봐라. 얼마나 객지 생활을 오래 했으면 이 모양이겠느냐?”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우리는 메르스가 발병하기 전부터 여행을 했기에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병과는 상관이 없다고 둘러댔다. 그제야 노부부는 태도를 누그러트리고 화제를 돌렸다.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중앙공원을 산책했다. 공원 중앙의 레닌 동상이 석양 속에 옷깃을 여민 채 예니세이 강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레닌의 시선을 따라 강가로 갔다. 강변에는 저녁 산책을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강변의 노천 음식점에서는 러시아의 전통 바비큐 요리 ‘샤실릭’을 굽는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테이블 곳곳에서는 청춘 남녀들이 자리를 잡고 한가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강변의 잔디밭과 산책로에서는 유모차를 끄는 젊은 부부, 손을 맞잡은 노부부들이 여유롭게 걸었다. 중고생 정도로 보이는 청소년들은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다.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저녁 풍경이었다. 살벌한 경쟁 대국 한국에서는 진즉에 사라진 낯선 장면들이었다.
두 발 쭉 펼 수 있는 2등칸의 감동
어둠이 깔린 뒤 크라스노야르스크역에 도착한 우리는 역의 매표 창구로 갔다. 3등칸 열차표를 바꾸기 위해서였다. 다음 행선지인 노보시비르스크까지는 2등칸이었지만 우리가 예약한 표 중 가장 짧은 구간이었다. 우리는 나머지 표들을 모두 2등칸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3등칸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매표 창구는 2개가 열려 있었다. 그나마 짧은 줄 뒤에 섰는데 표를 사는 사람이 매표원과 심야토론을 하는지 좀처럼 줄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태평스러웠다. 참을 인(忍)자를 여러 개 새기며 서 있던 끝에 앞에 두 사람 정도 남았을 때 갑자기 “잠시 자리를 비웁니다”란 팻말을 세우고 창구 직원이 사라졌다. 평정을 유지하던 맨 앞의 사람도 험한 말을 뱉으며 창구의 유리벽을 가볍게 쳤다. 나는 옆 창구의 줄 맨 뒤로 가서 참을 인자를 다시 가슴에 새겨야 했다.
도저히 올 것 같지 않았던 차례가 왔다. “3등칸으로 예약한 이 표들을 모두 2등칸으로 바꿔주세요.” 나는 러시아어 번역기로 돌린 내용을 매표 창구 역무원에게 보여줬다. 역무원은 손짓까지 해가며 말을 늘어놓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플리즈 위 원트 체인지 디스 티켓.” 급하게 영어까지 동원됐다. 역무원은 답답한 표정으로 눈을 치켜뜬 채 우리가 창구에 들이민 표들을 다시 돌려주었다. “티켓 체인지”를 몇 번 더 외치다가 간만에 고급스럽게 먹은 저녁이 쉬 소화될까봐 표 교환을 포기하고 승강장으로 나갔다.
밤 11시, 노보시비르스크로 가는 7열차 2등칸에 오른 우리는 처음 접한 상급 객실의 모습을 보고 서로를 껴안으며 말했다. “우리는 표를 바꿨어야만 했어!” 출입문이 있는 4인실 침대칸의 장점은 무엇보다 두 발을 쭉 펼 수 있다는 것이었다. 6인실의 통로를 걷다보면 2층 침대에서 통로 쪽으로 삐져나온 발들에 어깨를 부딪히게 된다. 살아 있는 누군가의 생체를 지속적으로 건드리는 것은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니다. 부딪히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 모두에게 인간은 원래 야생동물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무릎을 살짝 굽혀 누웠던 6인실 자세를 당당히 버렸다. 베개와 시트의 재질도 달랐다. 6인실에서 헝겊 조각 모양으로 건네받은 수건과 비교하면 4인실의 수건은 일상에서 실제로 쓰는 것이었다. 11시30분, 열차는 서쪽을 향해 바퀴를 굴렸다. 2등칸의 문을 닫고 에어컨 바람의 시원한 기운을 느끼며 보드카를 땄다. 행복한 잠자리에 대한 기대로 술이 달았다.
그동안 아침잠을 깨웠던 것은 뜨거운 객실의 온도였다. 그러나 2등칸에서 맞은 아침은 상쾌했다. 목이며 팔에 달라붙은 땀을 씻어내기 위해 물휴지를 꺼낼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개운한 마음으로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부피를 줄이기 위해 용기를 버리고 라면과 수프만을 비닐포장 해온 컵라면을 개인 코펠 용기에 담고 마른 누룽지를 부었다. 여기에 기호에 따라 집에서 가져온 볶음고추장이나 튜브식 고추장을 짜 넣은 뒤 객차마다 설치된 온수기 사모바르에서 받아온 뜨거운 물을 붓는다. 이렇게 하면 김치 없이 먹을 수 있는 훌륭한 한 끼 식사가 된다. 컵라면과 마른 누룽지는 여행경비 절약의 일등 공신 중 하나였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짐을 쌌다. 10시간의 짧은 여정 끝에 도착한 곳은 노보시비르스크다. 노보시비르스크는 시베리아횡단철도가 만든 도시다. ‘노보’는 영어의 ‘New’란 의미로 노보시비르스크는 ‘새로운 시베리아’란 말이다. 허허벌판 시골 마을이었던 곳에 열차 노선이 생겨 도시가 번성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노보시비르스크는 러시아가 시베리아횡단철도를 놓으면서 계획적으로 조성한 신도시였다.
카레이스키들의 얼굴이 떠오르다
노보시비르스크에 사람들이 모이고 도시가 번성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이곳이 바로 중앙아시아로 연결되는 철도의 분기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카자흐스탄을 비롯해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같은 중앙아시아 국가들로 향하는 열차는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남쪽 선로를 타야 한다. 노보시비르스크는 극동의 소비에트연방공화국 영토에 살았던 한인, 즉 카레이스키의 대부분이 거쳐야 했던 역이다. 1937년 시작된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서쪽으로 가는 횡단열차 안으로 내몰린 카레이스키들은 죽음을 친구로 둔 여정 끝에 겨우 살아남아 이곳 노보시비르스크에 발을 디뎠다.
나는 추위와 굶주림, 병에 찌든 얼굴로 노보시비르스크역 광장에서 보따리를 부여잡고 쪼그려 앉아 중앙아시아행 열차편을 기다렸을 사람들을 생각하며 증기기관차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는 역사를 빠져나왔다.
박흥수 기관사·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정책 객원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