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노프왕조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가 살았던 겨울궁전 앞에서 시민들이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고 있다.
10월혁명 당시 겨울궁전을 향한 노동자와 시민들의 진격로였던 궁전다리를 뒤로하고 지하철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지하철 1호선 플로시치 레니나역에 내렸다. 출구로 나오면 러시아와 페테르부르크의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던 현장인 핀란드역이 보인다. 핀란드역 앞 대로 건너편에 조성된 공원에는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내민 모양의 레닌 동상이 서 있다. 1917년 3월27일 스위스를 떠난 레닌이 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역에 내린 것은 4월3일이었다. 2월혁명 소식을 듣고 무조건 러시아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한 망명객 레닌은 러시아 국경을 넘자 자신을 환영하기 위해 도중에 열차에 올라탄 동지들에게 물었다. “우리가 도착하면 체포될 것 같나요?” 열차 안의 동지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핀란드역 승강장 한쪽에는 유리관 안에 증기기관차가 전시되어 있다. 1957년 6월 핀란드가 소비에트연방공화국에 기증한 것으로 레닌이 탄 열차를 끌었던 293호 증기기관차다. 승강장에 내린 레닌을 대위 계급장을 단 장교가 거수경례로 맞았다. 얼떨결에 같은 행동으로 답례를 마친 레닌은 역 앞 광장에 나가자마자 떨리는 가슴을 억누를 수 없었다. 크론슈타트 수병 의장대의 환영 연주와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소속 노동자들,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의 함성에 새로운 역사가 열리고 있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레닌은 환영객들에 인도되어 핀란드역 광장 앞에 서 있던 장갑차에 올라 소리쳤다. “사회주의 세계혁명 만세!” 100여 년 전 인파로 가득 찼던 역 앞 광장은 한가했고 무엇보다 배가 고팠다. 모스크바로 향하는 야간열차를 타기 위해 다시 역으로 가야 하고 그 전에 배를 채워야 했다. 파김치를 넘어 거의 절인 김치가 된 몸으로 페테르부르크역 앞 식당가를 어슬렁거렸다. 다음날 아침 6시40분, 모스크바 레닌그라드역으로 돌아왔다. 오후 4시30분 베를린으로 떠나는 열차를 타기 전까지 딱 10시간이 주어졌다. 톨스토이가 산책한 오솔길을 걷다 아르바트 거리에서 기념품을 사기로 한 일행과 출발역에서 만나기로 하고 오전 내내 홀로 모스크바의 지하철역들을 둘러봤다. 다니다보니 역사와 환승 통로 곳곳의 벽화와 조각들에 등장하는 인물을 숨은그림찾기처럼 찾고 있었다. 스탈린은 여기저기에서 교묘하게 결연하거나 온화한 표정으로 전사들이나 인민들 속에 서 있었다. 모스크바에서의 마지막 방문지는 톨스토이가 살았던 집이었다. 톨스토이 생가는 열차로 3시간 거리의 모스크바 남쪽 야스나야폴랴나로 알려져 있지만 모스크바에도 그가 살았던 집이 있다. 지하철 5호선 파르크쿨투리역에서 10여 분 정도 걷다보면 한적한 주택가에 황토색으로 나무 담장과 건물 벽을 두른 톨스토이 박물관이 나온다. 입장료 200루블을 내고 짐을 로커에 보관한 뒤 1868년에 지어진 오두막집 현관에 발을 디뎠다. 톨스토이는 1882년부터 1901년까지 가족과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노작가는 1910년 생을 마감했으니 말년기 일부를 이 저택에서 지냈다. <부활>을 이곳에서 집필했다고 한다. 카펫이 깔려 있는 나무계단을 오르내리며 위대한 작가의 손길이 닿았던 방들을 둘러보았다. <부활>은 19세기 말 러시아 사회의 혼란함을 그대로 직시하고 있다. 매춘부 카추샤를 석방시키기 위해 노력하던 귀족 청년 네플류도프는 감옥 안에 수감된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무고하며, 가난하기 때문에 법률적 도움을 못 받는 현실을 깨닫는다. 검사와 판사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실현하는 동맹자들이었다. 자본가와 지주들이 백성들을 착취하는 현실에 눈뜬 네플류도프는 유형지 시베리아로 떠나는 카추샤를 뒤따랐다. 톨스토이의 친필 문서가 나무책상 위 유리판 아래에 보였다. 작가는 검정색 잉크병에 펜을 담갔다가 끓어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헬러시아’의 현실을 그려나갔을 것이다. 오두막집은 숲이 우거진 작은 정원으로 연결되어 있다. 뜨거운 한여름 태양을 초록의 나뭇잎들이 막아주었다. 톨스토이가 산책했을 숲 속 오솔길을 걸었다. 마음속으로 시공간을 뛰어넘어 대화할 수 있는 작품을 남겨준 작가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전했다. 우리 일행은 모스크바 벨라루스카야역에서 다시 만나 감회에 젖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작된 러시아 기행이 비로소 끝나고 있었다. 국경 쇼핑을 즐기는 철도 노동자 모스크바를 떠나며 무엇인가 비장한 각오라도 남겨야 하는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인쇄된 예약권을 승차권으로 바꿔야 하는데 국제선 창구는 닫혔고 국내선 창구 매표원은 비어 있는 국제선 창구만 손으로 가리켰다. 열차 출발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우리 일행은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정식 승차권을 얻은 우리는 땀을 날리며 승강장으로 달려야 했다. 16시30분, 모스크바발 파리행 023 국제열차의 657호차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차는 출발했다. 칸마다 근무하는 차장의 안내를 받아 지정 객실로 들어간 우리는 감격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이제까지 만났던 것 중 최고 시설을 갖춘 객실이었다. 출입은 최신 호텔처럼 사람 수에 따라 나눠준 카드키를 이용했다. 침대와 매트도 직접 설치하는 게 아니라 이미 세팅되어 있었다. 침대보와 이불은 금방 세탁을 마친 것처럼 뽀송뽀송했고 냄새도 상쾌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6인실의 수용소 같은 침구세트와는 차원이 달랐다. 우리를 더 감격하게 했던 것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실내 온도였다. 벽에 장착된 온도 조절 버튼을 누를 때마다 파란색 LED 표시창에 온도가 표시됐다. 더 이상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 때문에 고생하지 않아도 됐다. 크롬 몰딩으로 매끈하게 마감된 손잡이와 침대 틀, 원목 재질의 옷걸이, 고급스런 자주색 직물 등받이를 일일이 어루만졌다. 이런 객차라면 얼마든지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객실 통로 끝 화장실 역시 고급 호텔에 들어온 느낌을 주었다. 화장실 안쪽 샤워부스를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서둘러 옷을 훌러덩 벗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샤워기에서 물이 나오지 않았다. 다시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나왔지만 파리행 국제열차의 럭셔리함에 빠져버린 나는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차량은 독일 지멘스에서 제작된 것으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철도차량 제작사의 아우라가 우러나는 멋진 객차였다. 모스크바를 떠난 지 2시간30분이 지나 열차가 도착한 곳은 뱌지마라는 시골 역이었다. 러시아 국경을 넘기 전 마지막 장시간 정차역으로 20분간 정차한다. 모스크바를 떠날 때 시간에 쫓겨 경황이 없었던 탓에 보급품을 사야 했다. 승강장엔 작은 소쿠리에 맥주캔과 간식거리를 담은 상인들이 나타났다. 이때 열차에서 내린 거구의 남성이 반바지와 슬리퍼 차림으로 역 밖으로 나갔다. 나는 얼른 뒤를 따랐다. 그는 사복을 입고 있었지만 우리 칸을 담당하는 차장이었음을 한눈에 알아봤다. 시골 동네 길을 7~8분 정도 걸어 도착한 곳은 마을의 슈퍼였다. 작은 슈퍼 안은 서부영화에서나 나올 듯한 외딴곳의 잡화점과 분위기가 비슷했다. AK47 소총을 빼고 자동차 와이퍼부터 훈제 고기까지 여행자에게 필요한 물품은 없는 게 없었다. 차장은 담배 네 보루와 보드카 서너 병, 그리고 몇 가지 음식을 샀다. 나중에 차장이 독일철도공사 소속임을 알게 된 뒤 이 국제열차 승무원의 주요 미션이 국경에서의 쇼핑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독일과 비교가 안 되는 가격으로 술·담배를 살 수 있는 혜택은 국경을 자주 넘는 사람들의 특권 같은 것이었다. 나는 차장 뒤에 섰다가 보드카 1병과 맥주 6캔, 그리고 러시아에서 통하는 유일한 한국말 “도시락”을 외치며 용기라면을 샀다. 지불한 돈은 모두 492루블, 1만700원이 안 되는 금액이었다. 삶은 땀과 노동 위에 있다
벨라루스 국경을 넘기 전 브레스트역 차량 기지에서 열차의 바퀴 장치를 바꾸고 있다.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광궤, 폴란드는 표준궤를 사용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