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7월9일 경북 봉화군 ‘청옥산 명품 숲길’을 걷고 있는 서재철 녹색연합 생태조사팀 전문위원. 김선식 기자
코로나19 이후 자연 보전과 향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자연을 보전함으로써 누리고, 자연을 누림으로써 보전할 동기와 역량을 얻는 생태여행지에 다녀왔다. ‘생태여행’(생태관광)은 1990년 이후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개념으로, 국제생태관광협회(TIES)는 ‘자연으로 떠나는 책임 있는 여행’ ‘환경을 보전하고 지역주민 삶의 질을 보장하며 해설과 교육을 수반하는 여행’으로 정의한다.경북 울진군 금강송면, 북면 일대 산림보호구역에 있는 ‘금강소나무 숲길’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생태여행지다. 지역공동체는 자연을 보전하려고 가이드 동반 예약 탐방제를 도입했고, 여행자는 잘 보전된 자연을 누리고 알아가며, 주민들은 숲길 탐방 운영과 안내에 핵심 역할을 한다. 국내에서 이런 특징을 두루 갖춘 여행지를 찾기는 쉽지 않다. 당장 여행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조용히 걷고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뿐. 지난 십수 년간 우후죽순 늘어난 걷기여행 길의 현실을 짚으며, 자연과 문화·역사 속에 파묻히기 좋은 길 10곳도 함께 소개한다._편집자주
걷기 붐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코로나19로 야외 활동의 욕구와 수요가 넘치면서 걷기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전국의 둘레길과 올레길 등에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2020년 봄부터 이런 흐름이 뚜렷하다. 등산이 수직적 활동이라면 걷기는 수평적 활동이다. 걷기 문화는 지리산 둘레길과 제주 올레길이 선도했다. 지리산 둘레길은 2004년 산림청과 지역주민, 민간단체, 불교계 등이 함께 준비해 2008년 열렸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걷는 길 조성·운영 등 관련 정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제주 올레길은 2007년 시작됐다. 제주의 문화역사와 생태환경이 접목된 길로 언론인 서명숙씨와 지역주민들의 노력으로 출발했다. 제주 올레길은 대중적 걷기 문화에 기폭제 구실을 했다. 공무원조차 어디 있는지 모르는 길
두 길의 성공을 발판으로 2010년 전후부터 수평적 걷기 열풍이 일었다. 이에 호응해 행정안전부·국토해양부·환경부·문화체육관광부·산림청 등 중앙정부와 광역지방자치단체, 기초지방자치단체 등 지방정부가 걷는 길 사업에 뛰어들었다. 돈 많은 부처들이 경쟁적으로 나섰지만, 2013년을 전후해 행안부와 국토부 등은 길 사업을 중단했다. 2021년 5월 현재 걷는 길 사업을 진행하는 중앙부처는 문체부와 산림청 정도다. 환경부는 생태탐방로 사업이란 이름으로 지방정부에 공모사업 형태의 지원만 한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 구석구석에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예산으로 조성된 걷는 길은 3천~5천㎞로 추정한다. 다만 현황은 아무도 모른다. 한국의 걷는 길에 대한 정부의 관리 수준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길이란 시설을 조성하는 것에만 주목한 부처들이 몇 년 만에 손을 털었기 때문이다. 예산만 낭비한 길은 조성한 기관의 공무원들조차 어디 있는지 제대로 모르는 게 허다하다. 많은 길이 이용도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 문체부에도 걷는 여행 전담조직이 없어
이렇게 된 핵심 이유는 정부가 걷는 길을 통합 관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자동차가 다니는 모든 도로는 도로법에 따라 현황이 파악된다. 그러나 사람이 걷는 길은 어떤 정부 부처도 파악하지 않는다. 걷는 길도 분명 공적 공간인데 체계적인 관리와 운영은 그것에 한참 못 미친다. 지리산 둘레길 이상윤 상임이사는 “걷는 길은 관리와 소통이 핵심이다. 만드는 것보다 관리가, 관리보다 이용자인 시민들과 소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렇게 하려면 조직과 인력, 지속적인 예산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걷는 길을 단순히 물리적인 선으로 이어진 길로 이해하는 것은 근시안적 사고이자 행정이다. 걷는 길은 면적인 것으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도시와 농촌이 만나고 지역과 문화가 교류하는 길이 된다.” 걷는 길의 조성과 운영 관리에서 가장 대표적인 기관으로 평가받는 산림청도 길을 안내하는 통합정보망과 인스타그램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소통망은 갖추지 못하고 있다. 2020년부터 국가숲길을 준비했지만 조성부터 관리 운영까지 체계적인 대책은 마련하지 못했다. 예산과 조직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문체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운영하는 걷는 여행 안내 누리집인 ‘두루누비’도 들여다보면 지속적인 관리는 없고 용역업체가 기존 정보를 퍼담아 올리는 수준이다. 2020년 7월 청와대가 나서서 그린뉴딜을 추진하면서 탐방로 조성과 활성화도 검토하는 듯했다. 하지만 정작 필요한 걷는 길 사업으로는 연결하지 못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아무리 많이 걷는 길을 조성해도 이용할 수 있는 정보가 공유되지 않으면 소용없다. 이정표만 세워진 채 쓸쓸한 길로 전락한다. 일을 제대로 하려면 조직(기관)이 필요하다. 현재 운영이 잘되는 몇몇 걷는 길이 대부분 현장에서 관리하고 이용자와 직접 소통하는 관리운영 조직을 둔 곳이라는 점이 이를 보여준다. 지리산 둘레길, 제주 올레길, 금강소나무숲길, 내포문화숲길, 강릉바우길, 진안고원길, 남해바래길, 외씨버선길, 영덕블루로드, 낙동세평하늘길, 소백산자락길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중앙정부를 보면 문체부에도 걷는 여행 전담조직이 없다. 산림청은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라는 기관을 만들었지만 숲길과 트레일(걷는 길)의 정보화와 홍보 소통 부분에선 아직 걸음마 단계다. 걷기 여행에 대한 시민의 관심은 다양하게 넓혀지는 추세인데 정부는 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기획재정부와 문체부는 ‘3대 유교 문화권’처럼 토건형 관광개발사업에는 해마다 수천억원씩http://h21.hani.co.kr/arti/SERIES/2337/ 투자한다. 예산 낭비 지적이 끊이지 않지만 계속 지원한다. 그런데 정작 많은 시민이 이용하는 걷는 길의 유지와 관리에는 인색하다. 기재부의 걷는 길 사업에 대한 몰이해와 토건 중심 예산 편성 탓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길 만들 때부터 참여와 소통 지원해야
걷는 여행자 수는 선진국으로 접어들었지만 한국에는 대표적 국가 트레일이 없다. 문체부가 만든 해파랑길이나 조성 중인 코리아둘레길은 장거리 걷기 여행길이지만 내용은 빈약하다. 기획부터 계획, 조성, 운영 관리, 소통, 홍보 등을 종합적으로 접근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미국의 내셔널트레일은 정부 지원과 민간 협력으로 촘촘하게 관리 운영된다. 길을 만들 때부터 여행자의 참여와 소통을 끌어내고 다양한 자원봉사 활동을 정부가 지원했기에 가능했다. 도보여행 전문가인 김명수씨는 “해파랑길은 국내에서 대표적인 장거리 트레일이다. 그러나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꼭 걸어봤으면 하는 명소는 아니다. 구석구석을 걷다보면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 옆을 걷는 경우도 많고, 구간구간마다 적절한 숙박시설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진정한 장거리 트레일이 있었으면 한다. 제대로 만들면 많은 국민이 이용할 것이다.” 서재철 녹색연합 생태조사팀 전문위원*1362호 표지이야기 모아보기http://h21.hani.co.kr/arti/SERIES/2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