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덕을 오르면 고사리밭 넘어 남해와 삼천포대교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코로나19 이후 자연 보전과 향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자연을 보전함으로써 누리고, 자연을 누림으로써 보전할 동기와 역량을 얻는 생태여행지에 다녀왔다. ‘생태여행’(생태관광)은 1990년 이후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개념으로, 국제생태관광협회(TIES)는 ‘자연으로 떠나는 책임 있는 여행’ ‘환경을 보전하고 지역주민 삶의 질을 보장하며 해설과 교육을 수반하는 여행’으로 정의한다.경북 울진군 금강송면, 북면 일대 산림보호구역에 있는 ‘금강소나무 숲길’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생태여행지다. 지역공동체는 자연을 보전하려고 가이드 동반 예약 탐방제를 도입했고, 여행자는 잘 보전된 자연을 누리고 알아가며, 주민들은 숲길 탐방 운영과 안내에 핵심 역할을 한다. 국내에서 이런 특징을 두루 갖춘 여행지를 찾기는 쉽지 않다. 당장 여행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조용히 걷고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뿐. 지난 십수 년간 우후죽순 늘어난 걷기여행 길의 현실을 짚으며, 자연과 문화·역사 속에 파묻히기 좋은 길 10곳도 함께 소개한다._편집자주
“직접 걸어보신 분들은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을 닮았다고 해요.”(윤문기 남해관광문화재단 바래길 팀장) 남파랑길 37코스(남해바래길 4코스)를 걸어봐야겠다고 결심하게 한 건 남해바래길을 담당하는 윤문기 팀장의 한마디였다. 남해 여봉산을 끼고 고사리밭이 광활하게 펼쳐진데다 남해도 함께 만날 수 있어 ‘강력 추천’한다고 했다. 산과 바다를 동시에 볼 수 있다고? 귀가 솔깃했다. 걷기 여행을 안내하는 ‘두루누비’ 누리집에 들어가 코스를 살펴보니 15㎞로 제법 길었다. 게다가 난이도는 ‘어려움’. 처음인데 무리하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이 얼핏 스쳤지만, 꿈틀대는 호기심과 약간의 배짱이 우려를 살포시 눌렀다. 
갈색의 고사리밭은 6월 말이 되면 모두 초록색으로 뒤덮인다. 남해관광문화재단 제공
3월23일~6월 말 사전예약제
‘고사리밭길’로도 불리는 남파랑길 37코스는 경남 남해군 창선면 동대만간이역에서 출발해 고사리 최대 산지인 구릉지대를 지나 적량마을에 이르는 코스로, 숲길과 해안마을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고사리밭이 펼쳐진 일부 구간(노전~식포~여봉산~가인리~세심사)은 고사리 채취 기간인 3월23일부터 6월 말까지 사전예약제로 운영된다. ‘남해바래길 2.0 공식카페(바래길탐방안내센터)’에서 탐방 신청을 하면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주 4회(화·목·토·일)에 한해 걸을 수 있다. 부랴부랴 신청서를 냈다. 다행히 4월25일 일요일에 자리가 남아 있었다. 오전 10시 출발지에 모여야 하기에 전날 내려가 1박을 했다. 기왕 떠나는 것, 여행 기분을 한껏 내보자 싶어 삼천포대교 인근에 숙소를 잡기로 했다. 방문한 경험이 없는 경남 사천시를 남해군과 함께 보자는 심산이었다. 서울에서 출발한 시외버스를 타고 4시간여 달렸다. 삼천포터미널 인근에서 간단히 저녁 식사를 해결하고 숙소에 짐을 풀었다. 삼천포항 방파제 너머로 탁 트인 바다가 반겼다. 불운이 찾아온 건 날이 어둑해질 무렵이다. 어쩐지 속이 파도치는 듯 울렁댔다. 부랴부랴 소화제를 사와 입안에 털어 넣었지만 니글니글함이 영 가시질 않았다. 아무래도 저녁이 얹혀도 제대로 얹힌 모양이었다. 한 발짝 뗄 때마다 낚싯배 위에 선 듯 멀미하는 기분이었다. 식은땀이 흘렀고, 온몸에 열이 오르는 듯했다. 임시방편으로 수건에 찬물을 묻혀 이마에 댄 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하필 걷기 전날 이게 뭐람. 해가 떠도 영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자 다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가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체온은 정상이었지만 메스꺼움은 남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란 아쉬움을 못내 떨치지 못했다. 만약을 대비해 구토를 받아낼 비닐봉지까지 챙겨 반신반의하며 출발지로 걸음을 옮겼다. 고사리밭과 바다를 한번에
구름이 잔뜩 낀 위장의 컨디션이 야속하리만치 날이 맑고 쨍했다. 출발지인 동대만간이역엔 제법 ‘프로 등산러’처럼 보이는 이들이 삼삼오오 모였다. 이날 길 안내를 맡은 조혜연 해설사에게 “체기가 있어 중간에 빠질 수도 있다”며 슬쩍 귀띔한 뒤 불안한 마음을 안고 동대만 둑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 길은 ‘봉황이 깃든다’는 여봉산을 넘어가는 코스예요. 여봉산 너머 식포마을에 사는 분이 고사리 포자를 가져와 심었는데 그게 점차 퍼져 고사리밭이 됐대요.”(조혜연 해설사)코스는 고사리밭을 품은 전반부(동대만간이역∼가인마을)와 바다 전경을 볼 수 있는 후반부(가인마을∼적량마을)로 구성된다. 전반부엔 두 번의 언덕(식포·언포)을, 후반부엔 한 번의 언덕(천포)을 넘어야 한다. 고사리밭 초입인 첫 언덕은 그럭저럭 오를 만했다. 다행히 행운의 신이 나를 완전히 비켜 간 건 아닌 모양인지, 요동치던 위장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이곳은 민둥산처럼 보일 정도로 갈색을 띠는데, 이미 수명을 다한 고사리가 만들어낸 색이다. 그 틈새로 초록빛 새 고사리가 삐죽 솟아 있다. 새 생명이 언덕을 뒤덮는 6월 말쯤엔 온통 초록색으로 물든다고 했다. “우와” 탄성이 이어진다. 갈색과 녹색이 어우러진 언덕은 어느 곳에서도 쉬이 보지 못한 풍경이다. 밭 곳곳에 실제로 고사리를 채취하는 주민들이 있다. 휴대전화를 수시로 꺼내 카메라 버튼을 눌렀다. “토스카나를 떠올린다”는 설명을 실감했다. 고비는 두 번째 언덕에서 찾아왔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가파른 언덕길로, 이 길의 하이라이트다. 참여자 대부분이 ‘등산용 스틱’을 들고 온 이유를 그제야 깨달았다. 패기 있던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가라앉은 줄 알았던 속이 다시 춤을 췄다. 조금씩 뒤로 처졌다. 다시 식은땀이 흘렀다. 영 딱해 보였는지, 가뿐하게 걸음을 옮기던 중년 남성 한 분이 기꺼이 등산스틱을 건넸다. 예의 있게 사양하자는 이성보다 생존 욕구가 앞서 덥석 받았다.
죽은 고사리 위에 새로 돋아난 고사리를 곁에 두고 사람들이 걷고 있다.
함께 가면 멀리 간다
반은 도를 닦는 마음으로, 반은 후회와 고통으로 뒤섞인 발걸음을 옮겨 정상에 서니, 달콤한 보상이 찾아왔다. 광활하게 펼쳐진 갈색 고사리밭이 마음의 미세먼지를 모두 닦아냈다. 비로소 찌든 일상에서 벗어나 있다는 실감이 났다. 외국이 아니라도 이런 정취를 마음에 담을 수 있다니, 옅은 행복감이 스며들었다. 그뿐이랴. 땀 흘리며 열심히 위장운동을 한 덕인지, 체기도 가라앉았다. 내려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고 상쾌했다. 완주에 대한 자신감이 붙었다. 두 번째 언덕을 내려와 가인마을에 도착하면, 문화해설사가 동행하는 전반부가 끝난다. 천포를 넘어 적량마을로 가는 후반부는 각자 걷는 시간이다. 식사하며 인사를 나눈 남해고등학교의 권정우, 정대성, 최성훈 선생님 세 분이 기꺼이 동행이 돼주었다. 코로나19로 야외 활동이 줄어든 학생들에게 걷기 코스를 안내해주고 싶어, 미리 걸어보는 참이라고 했다. 물 한 병만 달랑 들고 온 내게 이들은 당을 보충할 수 있는 초코바와 사탕, ‘생명수’ 같은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아낌없이 나눴다. 등산스틱도 선뜻 빌려줬다. 하늘과 이어진 파란 바다가 시야를 트이게 했다면, 낯선 곳에서 만난 호의는 마음을 열어줬다. 그 덕에 장장 15㎞를 완주했다.내심 ‘혼자 걷기’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무언가와 늘 연결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사색하면,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게다가 ‘의외로’ 낯을 가리는 탓에 여러 명이 함께 걷는 코스에 잘 적응할지 걱정도 됐다. 기우였다. “함께 가면 멀리 간다”는 말의 의미를 몸으로 깨달았다. 조혜연 해설사는 이날 틈틈이 내 컨디션을 확인했다. 함께한 누군가는 선뜻 등산스틱을 건넸고, 또 누군가는 느려진 내 속도에 맞춰 보폭을 조정했다. 소중한 식량을 나누고 대화로 끊임없이 활기를 돋우는 이들도 있었다. 여행의 묘미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에 있음을, 꽤 오랜만에 실감했다. 아름다운 길이 가져다준 또 다른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