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4일 수요일 오후 2시. 평소 같으면 학교 실험실이나 연구실에서 한창 바빴을 시간이다. 이날 지은씨는 서울 구로구 집 앞 공원에 산책을 나왔다. 요즘 밤마다 1시간씩 공원을 걸으며 운동할 때의 차림 그대로였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상상 못한 일이다.
기본소득을 받은 6개월 동안 지은씨는 ‘마음의 여유’를 되찾았지만 ‘몸의 여유’는 없었다. 대학교 실험실에서 근무하느라 일주일 가운데 평일 닷새가 쳇바퀴 돌듯이 바쁘게 돌아갔다. 특히 서울 구로구 집에서 경기도 수원 학교까지 통학하느라, 아침 6시에 일어나 밤 11시 무렵 집에 돌아올 때까지 지은씨의 하루는 참 길었다. 그런데 이제 주 5일 중 이틀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 5월 말부터 실험을 그만뒀기 때문이다. 이틀은 학교에 나가지 않는다. 나머지 사흘도 근무 대신 석사 논문을 위한 실험을 하러 학교에 가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이 한결 자유로워졌다.
“삶이 여유로워진 게 제일 큰 변화예요.” 지난달에는 30만원을 투자해 난생처음 ‘온라인 PT’를 받았다. 트레이너가 소셜메신저로 운동 방법과 식단을 관리해준다. 새로운 취미도 생겼다. 같이 사는 동생과 프로야구 경기장을 종종 찾는다. 응원하는 팀은 두산. 이번 시즌부터 응원을 시작했지만, 벌써 10여 차례 경기장에서 ‘직관’했다. 친구들을 만나면 가끔 볼링장도 간다. 지난 1~2월 주말마다 가죽공예를 배우러 다닌 이후 몇 가지 새롭게 생긴 취미다.
지은씨의 변화는 6개월치 가계부에서도 잘 나타난다. 위 그림을 보면, 2016년 12월 0원이던 교육비가 가죽공예와 동생 드로잉 수업비를 지불한 2017년 1월엔 60만원으로, 온라인 PT를 받은 5월에는 30만원으로 뛰었다. 4월에는 평일 저녁 조금 일찍 퇴근해 토익스피킹학원도 다녔다. 책을 사거나 공연, 스포츠 경기장 등을 다니는 데 쓴 돈의 액수도 6개월간 서서히 늘어났다.
기본소득을 받은 뒤 일어난 가장 큰 변화, 가장 잘한 선택을 묻자 지은씨는 이렇게 답했다. “여유를 즐길 수 있게 되었어요. 예전에는 돈이 없어 못하겠다고 생각한 취미생활도 해봤고, 그러면서 ‘이건 앞으로 돈 없어도 할 수 있겠구나’ 깨달았어요.”
임지은씨는 기본소득을 받은 뒤 가장 큰 변화로 ‘여유’를 꼽는다. 지난 6월 동생과 다녀온 일본 여행(왼쪽)과 지난 1~2월 배운 가죽공예(오른쪽)가 바로 그런 여유였다. 임지은 제공
주말에 친구들을 자주 만나게 된 이유도 그래서다. 지난해만 해도 지은씨는 친구, 특히 직장인 친구를 만나기 주저했다. 평일에는 대학원 실험실 근무로 빡빡해 따로 아르바이트할 시간이 없었던 지은씨는 부모님이 보내주시는 용돈 20만원으로 한 달을 버텼다. 친구들을 만날 때면 밥 먹고 커피 마시는 비용이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기본소득을 받고 통장 잔고가 여유로워지면서 친구 만나는 횟수가 증가했다. 2016년 12월 0원이던 교제비도 2017년 1~5월 적게는 월 8만원에서 많게는 월 20만원까지 액수가 달라졌다. “이제 돈이 없어도 친구를 꾸준히 만날 것 같아요. 밥 먹고 차 마시는 대신 같이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이처럼 ‘마음의 온도’가 올라갔다는 것은 지은씨가 기본소득을 받기 직전인 2016년 12월과 기본소득을 모두 받고 난 뒤 2017년 6월에 작성한 설문조사 결과의 변화에서도 감지된다(27쪽 그림 참조). “현재 자신의 상태에 얼마나 만족하십니까?”라는 질문 가운데 ‘여가생활’ 항목에 지은씨는 2016년 12월 ‘매우 불만족’을 선택했다. 6개월 뒤 지은씨의 대답은 ‘매우 만족’으로 달라졌다. ‘사회적 친분 관계’ 만족도는 ‘그저 그렇다’에서 ‘대체로 만족’으로 한 단계 올라갔다. 이에 힘입어 ‘전반적인 생활 만족도’는 ‘대체로 불만족’에서 ‘대체로 만족’으로 두 단계 상승했다.
이는 단순히 만족, 불만족의 차원을 넘어선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사회적 네트워크로부터 도움받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라는 질문에 지은씨는 2016년 12월 “아니다”라고 답했다. 2017년 6월 지은씨의 선택은 “그렇다”로 바뀌었다. 친구들과의 만남이 잦아졌다는 것은 지은씨가 사회적 관계를 믿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울증 정도나 자존감을 판단하는 설문 항목에서도 지은씨의 마음 상태가 한결 따듯해졌다는 게 확인되었다. 잠을 설치거나 도무지 뭘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 막막함을 느끼는 일은 줄었다.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자존감, 나 자신에 대한 긍정적 태도는 강해진 반면, 쓸모없는 존재라는 느낌 등 부정적 감정은 최소화되었다.
6개월간 지은씨 마음을 단단하게 지탱해주던 기본소득이 지난 5월로 끊겼다. 실험실 근무까지 그만두면서 지은씨 수입은 반토막, 아니 3분의 1로 쪼그라들었다. 아직 통장 잔고가 남았다고 해도 불안하지 않을까? “아직 괜찮아요. 기본소득을 받은 뒤 외식비나 교제비, 교양·오락비 등이 많이 늘었지만 소비 습관이 달라졌거든요.” 지은씨는 최근 신용카드보다 체크카드를 쓴다. 신용카드 할부금이 대부분을 차지하던 부채도 130만원 안팎에서 최근 40만원대까지 줄어들었다.
먹는 것도 크게 달라진 소비 습관 중 하나다. “편의점 음식 먹는 일이 거의 없어졌어요. 한 끼를 먹어도 대충 때우는 게 아니라 되도록 잘 차려진 음식을 먹자는 생각에 외식비도 늘고, 과일이나 고기도 자주 사게 됐거든요.” 기본소득을 받지 못하더라도 이제 편의점 음식과 작별할 수 있을 듯하다.
기본소득 필요성 “매우 공감”
지은씨는 5월 말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토·일요일 오후 12시부터 5시까지 집 근처 커피숍에서 일한다. “첫날 5시간 동안 서서 일했는데 너무 피곤해서 집에 오자마자 뻗어버렸어요. 알고 보니 제가 근무하는 매장이 ○○ 브랜드의 전국 매출 3위 매장이더라고요. 하하.” 시급 7500원 아르바이트로 한 달 버는 돈은 20만원 남짓. 동생과 같이 사는 오피스텔 관리비와 교통비 등을 감당하기에는 부족해서, 기본소득을 받는 동안 마다했던 용돈도 다음달부터 부모님께 다시 받기로 했다. 가을부터 취업 준비에 집중할 생각이다.
지은씨는 의식 못할지라도 지난 6개월간 자신감이 크게 늘었다. 위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지은씨는 “우리 사회는 한번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열심히 일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계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지은씨는 ‘정반대’로 생각했다. 스스로 생각하는 경제적 지위도 10단계 중 4에서 7로 껑충 올라갔다(가장 낮은 계층이 1, 가장 높은 계층이 10). 이는 사회에 대한 믿음으로까지 이어졌다.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살 만한 나라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비교적 살기 어렵다”에서 “비교적 살기 좋다”로 답이 바뀌었다.
특히 기본소득에 대해서는 더 큰 확신을 갖게 됐다. 기본소득을 모든 국민에게 적용하는 것에 대해 6개월 전 “어느 정도 공감”했던 지은씨가 지금은 “매우 공감”한다. 지난 3월 대선 전에 만난 지은씨는 “대선 후보들이 기본소득을 저소득층이나 불우이웃에게 줘야 하는 돈으로만 생각하는 듯하다”고 염려했다. 중산층이 사라지고 양극화가 심해지는 사회에서 기본소득이 모든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을 텐데, 대선 후보들의 생각은 달라 보인다는 걱정이었다. “예전엔 내가 세금 안 내고 꼭 필요한 사람들한테만 복지 혜택이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어요. 유럽 복지국가들처럼 세금을 많이 내더라도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기본소득 제도가 도입돼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저도 세금을 더 부담해도 괜찮아요.”
여유가 나와 너를 이어주길
지난 6개월 동안 지은씨를 만나면서 기자가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는 “여유”였다. ‘띄어쓰기’(대전), ‘쉼표’(전북) 등 다른 기본소득 실험의 이름에 담긴 프로젝트 기획자, 후원자들의 마음도 비슷해 보인다. 기본소득이 빈곤에 허덕이는 너의 삶과, 정신적·심리적 빈곤에 메말라 있는 나의 삶을 잇고, 개인의 삶과 더 나은 사회를 단단하게 이어주길 기대하는 마음 말이다.
6월30일 현재 ‘기본소득 월 135만원 받으실래요?’ 카카오 스토리펀딩의 모금액은 1627만6467원이다. 1120명의 후원자가 마음을 보태주었다. 그러나 ‘기본소득 2호 대상자’를 뽑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스토리펀딩 모금 기한(7월25일)까지 2천만원이 모이지 않으면 <한겨레21>은 기본소득 실험을 여기에서 마무리지으려 한다. <한겨레21>은 프로젝트에 후원금을 보태며 ‘내가 기본소득을 받는 상상’을 했던 지원자들의 절실한 마음을 기억한다. 기본소득 지급 실험은 끝나더라도 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또 다른 마당’을 마련하겠다는 약속을 드린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기본소득 월 135만원 받으실래요?’ 카카오 스토리펀딩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