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둘로 나뉜다. 공포에 휩싸여서 ‘일을 그만두면 진짜 굶어죽겠다’ 싶은 사람은 스스로 위축된다. 반면 희망에 찬 주체는 ‘자기보존이 곧 자기확장’이 된다. 불안정하더라도 욕구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내 일을 설계하겠다는 자기확장이다. 그런 희망에 찬 주체가 많아져야 한다. 이들에겐 두 가지가 필요하다. ‘굶어죽지는 않아’라는 믿음을 주는 기본소득과 딴짓을 하든지 새로운 일을 모색하든지 고민할 수 있는 시간.
공포에 찬 주체를 누가 왜 만들었을까? 오로지 성장만 해야 한다는 압축적 근대화의 강박 때문이다. 허리띠 졸라매어 경제가 성장했고, 그런 생각이 머리에 박혀서 “너 일류대 아니면 죽어”라고 아이들을 세뇌시킨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돈 없이 다르게 사는 삶을 상상조차 못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오래 일해도, 열심히 하지는 않는다. 생산성이 전혀 안 난다. 이대로라면 ‘선망국’(제일 먼저 망하는 나라)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도 누구는 희망에 찬 사람으로 전환하고, 누구는 계속 공포 안에 서 있다. 끔찍한 상황에서 나 자신이라도 보존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이민을 가는 청년들도 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면서 사회적·관계적 자아로 자신을 확장해나가는 ‘우동사’ 같은 친구들에게서 나는 희망을 본다. 굶어죽지 않는다는 확신만 주면 창의적인 청년들이 세상으로 많이 뛰쳐나올 것이다.
예외적인 개인들의 사례가 보편적 해결책이라고 말하긴 힘들 것 같다. <노오력의 배신>에도 나오는 말인데, 경제적으로 안정된 사람만 대안을 추구할 수 있다는 말에도 일면 진실이 있다. 이미 시장 욕구 아래 성장한 사람들한테 무조건 욕구를 버리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뭘 줘야 한다. 그게 기본소득이라고 생각한다.
조한혜정 교수는 ‘헬조선’에서 서로 ‘믿을 구석’으로서 사회적 관계를 회복하려면 기본소득 같은 ‘선물’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일의 문제는 일이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독식한다는 데만 있지 않다. 문제는 일이 사회적, 정치적 상상을 장악하고 있다는 데까지 미친다. 임금노동 바깥의 다양한 시간과 공간을 우리는 어떻게 이름 붙일 수 있을까? 그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길 소망할 수 있을까?”
케이시 윅스가 ‘탈노동의 상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까닭이다. 그는 임금노동을 선택하지 않을 자유를 주기 위해서라도 기본소득이 “충분한 금액으로 무조건적이고 지속적으로 지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반대로 기본소득에 대한 ‘공포’도 존재한다. 기본소득이 ‘일 안 하는 베짱이’나 무임승차자를 양산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우파의 것이라면, 기존 복지제도의 엉성한 그물망을 촘촘하게 짜는 게 “기본소득보다 먼저”라는 비판은 좌파의 것이다. 능력중심주의, 소비중심주의가 지배하는 사회가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본소득만 주어진다고 삶이, 사회가 바뀔까 하는 물음도 나온다.
제현주 기본소득이 시민의 ‘권리’라고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공포 때문이다. 빈곤층에 조건 없는 복지를 적용해야 한다는 데에는 다들 동의한다. 그렇다면 빈곤층의 기준을 어디까지로 해야 하나? 모든 시민에게 가야 한다는 게 기본소득의 논리다.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납득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러면 일하지 않을까봐 두려운 거다.
재밌는 건, 다른 사람들은 일하지 않을까봐 걱정하면서 ‘넌 월 70만원 받으면 일 안 할 거야?’ 물으면 거의 다 일하겠다고 한다. 성과주의나 능력주의라는 비틀린 공정성의 개념도 기본소득을 막는 데 등장한다. ‘낙하산’, 지연과 학연 등 하도 불공정하게 움직이는 사회니까 ‘그럼 능력주의라도 해보자’라는 마음이 있는 거다.
조한혜정 지금 우리는 자본은 너무 많지만 사회가 없어서 망했다. 사회적 관계에서 적대감이 하늘을 찌른다. 가장 큰 위기는 사회적 자본이 없어지는 거다. 그런 사회는 발전이 없다. 이제는 사회를 망치는 사람한테 돈을 걷고, 사회를 새롭게 만드는 사람한테는 돈을 줘야 한다.
청년들이 기본소득 받아서 학원비로 다 쓴다? 얼마 동안 그렇게 하다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르게 더 잘 사는 친구들을 보면 바뀔 거다. 시행착오도 있겠지만 겪어야 한다. 최소한의 합리성을 만드는 사회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많아져야 한다.
제현주 빈곤 문제는 기존 복지 시스템으로 해소할 수 있다. 제대로 못하니까 문제인 거다. 취약계층에 복지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게 다 된 다음부터 기본소득을 이야기하자고 하면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논의가 나오기 힘들다. “아마도 더 큰 위험은 우리가 너무 많이 원한다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의 마지막 문장이 적확하다.
조한혜정 한국 사회는 그야말로 합병증에 걸린 사회다. 빈곤이나 실업 문제 등을 한꺼번에 풀기 위해서라도 어렵지만 굉장히 쉬운 해법인 기본소득을 해보자는 거다. 한 번도 국민으로 대우받은 적 없는 폐지 줍는 노인에게 “지금까지 수고하셨고, 당신의 노동이 훌륭한 것이었고, 이제 안 하셔도 된다”는 이야기를 해주자는 거다.
물론 “당신이 능력이 없어 이렇게밖에 못 산다”고 끊임없이 주입받은 사람에게 ‘권리’라는 개념이 자리잡긴 쉽지 않을 것이다. 또 지금까지 뼈 빠지게 일했던 사람은 다른 사람이 기본소득 받는 게 억울하고 배 아파서 절대로 용납하지 못할 수 있다. 그걸 설득해내야 한다. <한겨레21>의 스토리펀딩 같은 실험이 군데군데 이뤄지면서 사람들이 죽을 것 같다는 공포에서 슬슬 벗어날 수 있는 언어와 실험 모델들을 깔아줘야 한다.
제현주 현재 진행되는 기본소득 실험들은 6개월, 1년이라는 기간 제한이 있다. 평생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때랑,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할 때랑은 선택이 달라진다. 나라도 청년기본소득 받아서 학원비로 쓰겠다. 기본소득이 끊겼을 때 자본주의 안에서 살길이 있어야 하니까. 불안정한 틈새에 낀 기회나 돈이라고 생각하면, 다시 원래 시스템 안으로 들어왔을 때 내 자리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틈새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일상에 ‘갭 이어’(gap year) 같은 시간이 쭉 깔려 있어야 한다. 나만 해도 회사를 그만두기 직전 한가해서 독서모임도 하고 인문학 강의도 듣고 딴짓을 많이 했다. 하다보니 재밌어서 ‘이렇게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확장이 되려면 ‘시간’이 있어야 한다. 기본소득과 노동시간 단축이 함께 가야 하는 이유다.
‘진짜’ 기본소득 감별법
“욕망과 상상, 의지야말로 정치적 주장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기본소득과 노동시간 단축 요구를 포함한 유토피아적 요구는 단순한 정책 제안 이상의 것이다. 유토피아적 요구는 이 요구를 촉구하는 언어와 실천에 영향을 미친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기본소득은 대통령선거를 앞둔 정치 논쟁으로까지 급속히 확장됐다. 그러나 정치권의 논의는 과잉소비에 가깝다. 현금을 지급하는 모든 정책 공약에 ‘기본소득’이라 이름 붙이는 식으로 소비되는 탓이다.
조한혜정 한국은 모든 걸 정치 소용돌이 안에 확 집어넣어서 선거로 끝내버리는 ‘소용돌이 정치학’이 심한 나라다. 선거식 의회민주주의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사기판이 되었는데도, 이상하게 또 무언가를 소비하고 이슈를 오히려 흐려버리기도 한다. 기본소득 논의도 정치인들이 선심성으로 성급하게 꺼내 소비되는 방식이 되어선 안 된다. 기본소득이 어떤 방식의 체제 전환을 의미하는지 학습의 시공간을 열어 상상력을 펼치고 우리 자체를 바꾸면서 같이 제도화해야 한다.
제현주 지금 얘기되는 기본소득이 진짜 기본소득인지 제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 기본소득이 좋다고 아무리 말해도, 자기 욕구가 변화하는 맥락과 만나지 않으면 실제 삶의 변화로 이어지기 힘들다. 크라우드펀딩 등 실증적 사례나 상황이 자꾸 나오고, 그래도 나쁜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도록 작게라도 계속 실험하고 꾸준히 시간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크라우드펀딩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 안에서 일종의 시민권을 얻는다. 한국 사회는 시민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사회다. 너무 큰 얘기 같지만, 기본소득 실험은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정립하는 과정과 함께 가야 한다.
내가 일하는 협동조합 롤링다이스만 해도, 기본소득과 비슷한 심리적 허들이 있었다. 우리는 각자 따로 일하기 때문에 일한 시간을 스스로 적은 뒤 이익을 배분한다. 처음에는 0시간이 아니라 1시간부터 적어야 한다는 걸 어려워하더라. 그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해줬다. “네가 아무것도 안 했더라도 조합원이라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1이야.”
‘나를 위한 보호 장치’로 감각하게
조한혜정 한국처럼 나를 보호해줄 존재가 오로지 가족밖에 없는 사회에서 ‘시민’을 어떻게 만드냐는 중요하다. 우리는 ‘시민적 공공성’ 또는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드는 ‘사회적 자유’를 경험한 적이 없다. 기본소득을 제도화하는 과정은 그런 감각을 심는 과정이어야 한다. 옛날 우리 사회는 사람이 자기 먹을 건 타고난다며 측은지심을 갖고 다 1로 배분했는데 지금은 ‘너 죽어도 그만’인 사회가 됐다. 상처와 억울함이 가득한 시민들한테 존재 자체로 1이라고, 최소한 존중받을 수 있다고 여겨지는 ‘선물’이 필요하다. 이건 대통령이 주는 선물이 아니라 시민의 권리라는 설명과 함께. 그 선물이 바로 기본소득이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