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인 전 대통령이 전태일 열사 42주기를 맞은 2012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버들다리 전태일 열사 동상에 꽃을 바치고 있다. 한겨레 자료
미국에서 복지(welfare)라는 용어는 ‘복지에 의존한다’(on welfare)라는 뜻이었다. 즉, 가난하고 무직이며 사회의 짐이 된다는 의미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핀란드어에서 ‘복지국가’에 가장 가까운 용어는 hyvinvointivaltio(위빈보인티발티오)이다. 문자 그대로 풀자면 이 용어는 ‘웰빙(well-being) 국가’를 뜻한다. ―아누 파르타넨, <우리는 미래에 조금 먼저 도착했습니다〉,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지 물어라’
임기 5년 동안, 문재인 전 대통령이 연설문에 가장 빈번하게 담은 문구는 ‘함께 잘사는 나라’다. 이 문구는 포용국가를 설명하거나 시정연설에서 국회의원을 설득할 때 사용됐고, 아세안 10개 나라를 방문할 때 협력을 강조하거나 한반도 평화와 경제통일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로도 작용했다. 임기 후반 팬데믹(코로나19 대유행)과 탄소중립 연설에서는 지구적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론으로 ‘함께’에 더 큰 방점을 찍었다.이 문구는 지극히 평범해서 별로 가슴을 울리지 못한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말 같아서 듣고도 훅 지나가버린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잘사는 나라’를 넘어 ‘함께 잘사는 나라’를 향해가고 있습니다”(2019년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와 같이 ‘잘사는 나라’와 만나 대비를 이뤘을 때는 느낌이 달라진다. 대한민국 성장과 복지의 서사에 불을 지피고, 불현듯 생기를 얻는다. ‘함께 잘사는 나라’는 이어달리기의 한 주자로서 앞선 지도자들의 노력을 계승한 대통령 문재인의 결과물이다. 포용국가 비전에 그 정신이 잘 담겨 있다.‘생산적 복지’ 가슴에 품은 김대중 대통령
포용국가는 국가가 국민에게 또는 잘사는 사람이 그보다 못한 사람에게 시혜를 베푸는 나라가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면서 국민 한 사람과 국가 전체가 더 많이 이루고 더 많이 누리게 되는 나라입니다. ‘국가가 국민의 일상을 지켜줘야 한다’는 개념이 정책에 반영되고 그 정책이 국민에게 체감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김대중 정부에서 처음으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도입했습니다. 빈곤층 국민께서 최소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년 전의 일입니다. 20년 사이에 국민 인식은 더욱 높아졌고 국가는 발전했습니다. 최소한의 삶을 보장하는 것만으로는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대한민국의 국력과 재정도 더 많은 국민께서 더 높은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데 충분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우리 정부가 추진하는 포용국가의 목표는 바로 이 지점, 기초생활을 넘어서 국민의 기본생활을 보장해야 한다는 점에서 시작합니다. ―문재인, ‘포용국가 사회정책 대국민 보고’, 2019년 2월19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일찍부터 ‘생산적 복지’라는 말을 가슴에 품었다. 복지가 자선이 아니라 인권이라는 확고한 철학이 있었다.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철저한 시장경제 원칙을 강조하며 ‘신자유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한편에서는 시장경제의 부작용을 시정하고 보완하기 위해 과감한 복지정책을 준비했다. 과다한 복지가 가져온 유럽의 실패를 공부했고 국가경제에도 국민 스스로에게도 도움이 되는 우리만의 ‘생산적 복지’를 구상했다.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불확실성의 시대>가 깊은 영향을 주었으리라. 김 전 대통령이 가족에게도 꼭 읽어보라고 추천한 책이다. 우리는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알고 있지만, 무기력과 금전상의 이해와 감정 또는 무지 때문에 그것을 말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문제는 현재의 부 또는 적어도 잠재적인 부의 재분배 외에는 해결 방법이 없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이 해결책을 공약으로 내거는 결단력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을 뿐이다. (…) 부유한 나라에서도 빈곤의 문제에 대처하는 데에는 마찬가지 어려움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득을 주는 이상으로 효과적인 해결책은 없는 것이다. 식량, 주택, 의료 서비스, 교육 또는 현금, 어떠한 형태를 취하든 간에 소득은 빈곤에 대한 최선의 구제책이다. 그러나 이처럼 명백한 진리이면서도 이만큼 교묘한 핑계를 낳게 한 예는 없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불확실성의 시대>, ‘민주주의·지도력·결단’
기초생활보장제도가 마침내 시작되다
복지정책을 성장전략 삼은 노무현 대통령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만석 이상 넘으면 사회에 환원하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경주 최 부잣집에 내려오는 400년 전통의 가훈이다. (…) 최 부잣집은 만석 이상 불가의 원칙에 따라 그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했다. 환원 방식은 소작료를 낮추는 것이었다. 소작료는 수확량의 7~8할 정도를 받는 것이 관례였는데, 최 부잣집은 5할이나 아니면 그 이하로도 받았다. 그러니 주변 소작인들이 앞을 다투어 최 부잣집의 논이 늘어나기를 원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 저 집이 죽어야 내 집이 사는 것이 아니라, 저 집이 살아야 내 집이 산다는 상생의 방정식을 생각해보라. 이 어찌 아름답고도 통쾌한 풍경이 아니겠는가! ―조용헌,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경주 최 부잣집’
노무현 전 대통령은 복지정책을 성장전략의 하나로 삼았다. ‘한국적 복지국가의 길’이 더 많은 개인의 성장과 참여를 통한 성장동력의 확충, 이를 위한 사회복지의 선진화에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소설 같은 전망’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2020년에 복지재정을 2001년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으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020년 3만6천달러, 2030년 4만9천달러에 이른다는 목표를 세웠다. 복지는 사회투자로서 우리가 놓칠 수 없는 국가발전 전략이었다. 장기적 계획이었다. 어느 정도는 이뤘고, 이룰 수 있는 능력도 있다.아누 파르타넨에 따르면 노르딕(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등 북유럽) 나라들에서는 상향 사회이동이 생생한 현실이라고 한다. 당연히 아주 잘사는 사람들은 조금 더 세금을 내라는 요청을 받고 대신에 좋은 의료체계와 좋은 학교를 갖춘다. 시민들 역시 그런 사회환경을 지지한다. 명백히 공평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전장에 바친 목숨과 논밭을 일군 주름진 손, 공장의 잔업과 철야가 쌓여 우리는 이만큼 잘살게 되었습니다. 누구 한 사람 예외 없이 존경받아야 할 것입니다”(전태일 열사 추모 메시지)라고 말했다. 우리가 일군 성장의 크기만큼 차별과 격차를 줄이지 못해 아쉬워하며 ‘함께 잘사는 나라’를 밀고 나갔다. 대한민국의 역동성에 기본생활이 받쳐준다면 공평한 상생도약이 불가능하지 않다.잘못된 진단은 차별과 격차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