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바로잡겠다는 공자의 발언에 담긴 정치적 함의
공자(孔子)는 “이름과 실질이 서로 원망하는” 세태에 맞서 “이름을 바로잡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이에 관해서는 그의 제자인 자로(子路)와 나눈 문답이 유명하다.
공자가 위나라에 머물고 있을 때 자로가 물었다.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께 정치를 맡기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공자가 답했다.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 이 말을 들은 자로가 스승을 비웃었다. “하여튼 이렇다니까요! 선생님은 어째 그리 뜬구름 잡는 말씀만 하십니까? 그걸 어떻게 바로잡겠습니까?”(有是哉, 子之迂也! 奚其正?)
공자의 첫 번째 정치 강령
자로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가장 다혈질인 사람이다. <논어>나 <사기·공자세가>에서 스승에게 벌떡벌떡 대드는 노릇은 단연 자로라는 캐릭터의 몫이다. <공자세가>에 따르면 공자는 위나라를 비교적 자주 드나들었다. 위령공 앞에서 더러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밝히기도 했으나, 위령공은 ‘공자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날아가는 기러기만 바라보았다”. 위령공이 죽자 위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위령공의 아들 괴외는 국외 망명중이었고 왕위는 손자인 첩(위출공)에게 돌아갔다. <공자세가>에 따르면 앞에서 인용한 자로와 공자의 문답은 이 즈음의 일이다. 위출공은 망명중인 아버지 괴외에게 왕위를 물려줘야 한다는 압력을 제후들로부터 받고 있었다. 이런 위기 상황을 넘기기 위해 공자 같은 현자를 등용할지도 모른다. 제자들은 그런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직선적인 성격의 자로는 곧바로 스승의 생각을 떠보았다. 그랬더니 스승의 입에서 흘러나온 얘기란 게 왕권을 공고히 할 묘안이 아니라 “이름을 바로잡겠다!”는 엄청난 철학적 포부였던 것이다. 아들과 아비가 왕위를 두고 대치하고 있는 준내전상태의 국가에 재상으로 등용되면 가장 먼저 하겠다는 일이 “이름을 바로잡는” 거라고? 터프가이 자로의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올 리 없다. 공자 또한 제자로부터 이런 막말을 듣고 가만히 넘길 위인이 아니다. “말이 너무 거칠구나, 자로여!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냥 빈칸으로 남겨두는 법이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이치에 맞지 않고, 말이 이치에 맞지 않으면 일이 이뤄지지 않고, 일이 이뤄지지 않으면 예악제도가 일어나지 못하고, 예악제도가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알맞지 않고, 형벌이 알맞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어진다.”(<논어·자로> 3) 위의 대화에서 우리는 우리의 주제와 관련해 두 가지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우선, 공자 당대에 “이름을 바로잡는다”는 일은 그의 가까운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자로조차 대뜸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느냐”는 반응을 보일 정도로 이미 대단한 난제였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공자 스스로 이름을 바로잡는 일이 왜 중요한지 밝히고 있는 부분이다. 공자는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요점은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형법제도(사법체계)가 흔들린다”는 얘기다. 공자가 이름 바로잡는 일을 자기 정치 프로그램의 첫 번째 강령으로 삼은 까닭은, (동시대 인물인) 등석이나 (공자보다 150년쯤 뒤에 활동을 개시하는) 혜시 같은 변론가들의 양가론이 발호할 경우 국헌질서와 국가기강이 흔들린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국헌질서를 지키기 위한 정명론 “이름을 바로잡겠다”는 공자의 발언은 정치적 발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공자 당대에 이미 출현해 활동하던 변론가들을 향한 사상투쟁 선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말재주 있는 사람, 변론가들을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자주 “말재주는 어디다 쓰겠는가?”(焉用녕? <公冶長> 4) 한다든가, “교묘한 말은 덕을 어지럽힌다”(巧言亂德. <衛靈公> 26)는 발언을 남겼다. 그는 또 제자가 그럴듯한 논리로 말대꾸를 하면, 일쑤 “그래서 말재주 있는 자들을 미워하는 거다! (이놈아)”(是故惡夫녕者! <先進> 24)라고 면박을 주었다. 그는 또 “교묘한 말을 잘하거나 낯빛을 잘 꾸미는 인간치고 어진 인간 못 봤다”(巧言令色, 鮮矣仁. <學而> 3)고 못박았으며, 장차 정치를 맡게 되면 “달변가들을 멀리해야 한다”(遠녕人. <위령공> 10)고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공자는 왜 이렇게 말 잘하는 사람을 미워했을까. 그가 말을 불신하는 철학자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치적으로 “말 잘하는 입이 나라를 전복시키는 것을 미워하기 때문”(惡利口之覆邦家者. <陽貨> 18)이기도 했다. 오늘날, 전두환 아저씨조차 좋아한다는, “말을 교묘하게 잘하는 인간치고 어진 인간 못 봤다”는 이 구절은 그저 지혜의 금언으로 읽히지만, 공자 당대에는 하나의 정치노선이자 사상투쟁의 방향을 표현한 발언이었다. <논어>에서 말재주는 “영”(녕), “교언”(巧言), “이구”(利口) 등으로 표현되고, 말 잘하는 사람은 “영인(녕人)”이라 불리고 있다. 공자가 미워해 마지않았던 ‘영’(녕)이란 재주에 대해 현대 중국의 과격한 연구자 자오지빈(趙紀彬)은 이것이 “명변 방법”을 가리킨다는 가설을 내놓은 바 있다. 그의 주장은 과잉해석이라고 봐야겠지만, 공자 당대에 이미 변론가들이 등장한 것은 사실이고, 공자가 이런 변론가들을 곱지 않은 시각으로 본 것 또한 사실이다. 공자는 소정묘를 죽였는가 진위에 관한 논란이 많긴 하지만, 공자가 노나라의 사구(司寇, 법무장관) 직을 맡아 섭정할 때 변론가인 소정묘(少正卯)를 잡아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 사건은 전국시기 중후반의 문헌인 <순자(荀子)·유좌(宥坐)>편에 실려 있다. <순자>의 기록에 따르면 공자는 노나라의 사구 직을 맡은 지 일주일 만에 노나라의 대부 소정묘를 전격 처형했다. 이 사건은 제자들이 보기에도 좀 뜻밖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공자에게 “소정묘는 노나라의 유명인사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정치를 맡자마자 그부터 처형하셨으니, 민심을 잃지 않으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대한 공자의 답변이 흥미롭다. “앉거라. 내가 그 까닭을 설명해주겠다. 사람에게는 다섯 가지의 죄악이 있는데, 절도죄 같은 건 거기 끼지도 않는다. 첫째는 머리가 빨리 돌아가면서 마음이 음험한 것이요, 둘째는 행실이 치우쳤으면서 고집불통인 것이요, 셋째는 거짓을 말하면서 달변인 것이요, 넷째는 추잡한 것만 외우고 다니면서 두루두루 아는 게 많은 것이요, 다섯째는 그릇된 일에 찬동하면서 거기에 분칠을 하는 일이다. 이 다섯 가지 죄악 가운데 한 가지만 있더라도 군자의 주살(誅殺)을 면할 수 없다. 그런데 소정묘는 이 죄악들을 두루 겸했다. 그는 이런 재주로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고, 능통한 언변술로 사악함을 분식해 군중을 속일 수 있었으며, 바른 길에서 벗어났으면서 독자적인 주장의 기치를 세울 수 있었다. 이는 소인배 가운데 걸웅이니 어찌 주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상의 기록을 보면 소정묘는 논변술로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변론가였음에 틀림없다. 한나라 때의 학자 왕충은 <논형·강서>편에서 이 사건에 대해 좀더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에 따르면 “소정묘는 노나라에서 공자와 대등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공자의 문하는 “세번 차고 세번 비었다(三盈三虛).” 수제자인 안회만 남고 문인들이 모두 공자를 떠나 소정묘에게 간 적도 있었다고 한다. <순자>와 <논형>의 기록을 종합하면 소정묘는 공자 당대에 그 버금가는 학파를 형성한 변론가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공자가 그를 잡아죽였을 때 제자들이 “민심을 잃지 않을까” 걱정한 것이다. 공자가 소정묘를 처형한 것은 사실인가 허구인가? 이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 논란이 이어져왔다. 공자는 계강자가 “무도한 자를 죽여 도가 있는 데로 나아가게 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묻자 “정치를 하는 데 어찌 죽임을 쓰겠는가?”라고 답했던 사람이다(<顔淵> 19). 주희 등의 정통 유학자들은 그런 공자가 집권 이레 만에 자신의 경쟁자인 소정묘를 주살했을 리 없다고 본다. 공자에 관한 가장 기초적인 기록인 <논어>에는 그가 소정묘를 주살한 일은 물론 노나라의 사구 직을 맡았다는 사실조차 나오지 않는다. 반면에 현대 중국의 고증학자 가오헝 같은 이는 전국시기 문헌인 <순자>를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본다. 이 문제는 확정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나는 서기 전 496년에 공자가 소정묘란 달변가를 주살한 일이 벌어졌는지는 단정짓기 어려우나, 유가 사상의 발전 맥락을 볼 때 얼마든지 있을 법한 일이라고는 본다. 이는 유가 철학의 성격과도 닿아 있는 문제이다. (공자의 정명론에 대해서는 한번 더 논하겠다.) leess@hani.co.kr

자로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가장 다혈질인 사람이다. <논어>나 <사기·공자세가>에서 스승에게 벌떡벌떡 대드는 노릇은 단연 자로라는 캐릭터의 몫이다. <공자세가>에 따르면 공자는 위나라를 비교적 자주 드나들었다. 위령공 앞에서 더러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밝히기도 했으나, 위령공은 ‘공자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날아가는 기러기만 바라보았다”. 위령공이 죽자 위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위령공의 아들 괴외는 국외 망명중이었고 왕위는 손자인 첩(위출공)에게 돌아갔다. <공자세가>에 따르면 앞에서 인용한 자로와 공자의 문답은 이 즈음의 일이다. 위출공은 망명중인 아버지 괴외에게 왕위를 물려줘야 한다는 압력을 제후들로부터 받고 있었다. 이런 위기 상황을 넘기기 위해 공자 같은 현자를 등용할지도 모른다. 제자들은 그런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직선적인 성격의 자로는 곧바로 스승의 생각을 떠보았다. 그랬더니 스승의 입에서 흘러나온 얘기란 게 왕권을 공고히 할 묘안이 아니라 “이름을 바로잡겠다!”는 엄청난 철학적 포부였던 것이다. 아들과 아비가 왕위를 두고 대치하고 있는 준내전상태의 국가에 재상으로 등용되면 가장 먼저 하겠다는 일이 “이름을 바로잡는” 거라고? 터프가이 자로의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올 리 없다. 공자 또한 제자로부터 이런 막말을 듣고 가만히 넘길 위인이 아니다. “말이 너무 거칠구나, 자로여!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냥 빈칸으로 남겨두는 법이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이치에 맞지 않고, 말이 이치에 맞지 않으면 일이 이뤄지지 않고, 일이 이뤄지지 않으면 예악제도가 일어나지 못하고, 예악제도가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알맞지 않고, 형벌이 알맞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어진다.”(<논어·자로> 3) 위의 대화에서 우리는 우리의 주제와 관련해 두 가지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우선, 공자 당대에 “이름을 바로잡는다”는 일은 그의 가까운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자로조차 대뜸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느냐”는 반응을 보일 정도로 이미 대단한 난제였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공자 스스로 이름을 바로잡는 일이 왜 중요한지 밝히고 있는 부분이다. 공자는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요점은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형법제도(사법체계)가 흔들린다”는 얘기다. 공자가 이름 바로잡는 일을 자기 정치 프로그램의 첫 번째 강령으로 삼은 까닭은, (동시대 인물인) 등석이나 (공자보다 150년쯤 뒤에 활동을 개시하는) 혜시 같은 변론가들의 양가론이 발호할 경우 국헌질서와 국가기강이 흔들린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국헌질서를 지키기 위한 정명론 “이름을 바로잡겠다”는 공자의 발언은 정치적 발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공자 당대에 이미 출현해 활동하던 변론가들을 향한 사상투쟁 선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말재주 있는 사람, 변론가들을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자주 “말재주는 어디다 쓰겠는가?”(焉用녕? <公冶長> 4) 한다든가, “교묘한 말은 덕을 어지럽힌다”(巧言亂德. <衛靈公> 26)는 발언을 남겼다. 그는 또 제자가 그럴듯한 논리로 말대꾸를 하면, 일쑤 “그래서 말재주 있는 자들을 미워하는 거다! (이놈아)”(是故惡夫녕者! <先進> 24)라고 면박을 주었다. 그는 또 “교묘한 말을 잘하거나 낯빛을 잘 꾸미는 인간치고 어진 인간 못 봤다”(巧言令色, 鮮矣仁. <學而> 3)고 못박았으며, 장차 정치를 맡게 되면 “달변가들을 멀리해야 한다”(遠녕人. <위령공> 10)고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공자는 왜 이렇게 말 잘하는 사람을 미워했을까. 그가 말을 불신하는 철학자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치적으로 “말 잘하는 입이 나라를 전복시키는 것을 미워하기 때문”(惡利口之覆邦家者. <陽貨> 18)이기도 했다. 오늘날, 전두환 아저씨조차 좋아한다는, “말을 교묘하게 잘하는 인간치고 어진 인간 못 봤다”는 이 구절은 그저 지혜의 금언으로 읽히지만, 공자 당대에는 하나의 정치노선이자 사상투쟁의 방향을 표현한 발언이었다. <논어>에서 말재주는 “영”(녕), “교언”(巧言), “이구”(利口) 등으로 표현되고, 말 잘하는 사람은 “영인(녕人)”이라 불리고 있다. 공자가 미워해 마지않았던 ‘영’(녕)이란 재주에 대해 현대 중국의 과격한 연구자 자오지빈(趙紀彬)은 이것이 “명변 방법”을 가리킨다는 가설을 내놓은 바 있다. 그의 주장은 과잉해석이라고 봐야겠지만, 공자 당대에 이미 변론가들이 등장한 것은 사실이고, 공자가 이런 변론가들을 곱지 않은 시각으로 본 것 또한 사실이다. 공자는 소정묘를 죽였는가 진위에 관한 논란이 많긴 하지만, 공자가 노나라의 사구(司寇, 법무장관) 직을 맡아 섭정할 때 변론가인 소정묘(少正卯)를 잡아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 사건은 전국시기 중후반의 문헌인 <순자(荀子)·유좌(宥坐)>편에 실려 있다. <순자>의 기록에 따르면 공자는 노나라의 사구 직을 맡은 지 일주일 만에 노나라의 대부 소정묘를 전격 처형했다. 이 사건은 제자들이 보기에도 좀 뜻밖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공자에게 “소정묘는 노나라의 유명인사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정치를 맡자마자 그부터 처형하셨으니, 민심을 잃지 않으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대한 공자의 답변이 흥미롭다. “앉거라. 내가 그 까닭을 설명해주겠다. 사람에게는 다섯 가지의 죄악이 있는데, 절도죄 같은 건 거기 끼지도 않는다. 첫째는 머리가 빨리 돌아가면서 마음이 음험한 것이요, 둘째는 행실이 치우쳤으면서 고집불통인 것이요, 셋째는 거짓을 말하면서 달변인 것이요, 넷째는 추잡한 것만 외우고 다니면서 두루두루 아는 게 많은 것이요, 다섯째는 그릇된 일에 찬동하면서 거기에 분칠을 하는 일이다. 이 다섯 가지 죄악 가운데 한 가지만 있더라도 군자의 주살(誅殺)을 면할 수 없다. 그런데 소정묘는 이 죄악들을 두루 겸했다. 그는 이런 재주로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고, 능통한 언변술로 사악함을 분식해 군중을 속일 수 있었으며, 바른 길에서 벗어났으면서 독자적인 주장의 기치를 세울 수 있었다. 이는 소인배 가운데 걸웅이니 어찌 주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상의 기록을 보면 소정묘는 논변술로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변론가였음에 틀림없다. 한나라 때의 학자 왕충은 <논형·강서>편에서 이 사건에 대해 좀더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에 따르면 “소정묘는 노나라에서 공자와 대등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공자의 문하는 “세번 차고 세번 비었다(三盈三虛).” 수제자인 안회만 남고 문인들이 모두 공자를 떠나 소정묘에게 간 적도 있었다고 한다. <순자>와 <논형>의 기록을 종합하면 소정묘는 공자 당대에 그 버금가는 학파를 형성한 변론가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공자가 그를 잡아죽였을 때 제자들이 “민심을 잃지 않을까” 걱정한 것이다. 공자가 소정묘를 처형한 것은 사실인가 허구인가? 이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 논란이 이어져왔다. 공자는 계강자가 “무도한 자를 죽여 도가 있는 데로 나아가게 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묻자 “정치를 하는 데 어찌 죽임을 쓰겠는가?”라고 답했던 사람이다(<顔淵> 19). 주희 등의 정통 유학자들은 그런 공자가 집권 이레 만에 자신의 경쟁자인 소정묘를 주살했을 리 없다고 본다. 공자에 관한 가장 기초적인 기록인 <논어>에는 그가 소정묘를 주살한 일은 물론 노나라의 사구 직을 맡았다는 사실조차 나오지 않는다. 반면에 현대 중국의 고증학자 가오헝 같은 이는 전국시기 문헌인 <순자>를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본다. 이 문제는 확정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나는 서기 전 496년에 공자가 소정묘란 달변가를 주살한 일이 벌어졌는지는 단정짓기 어려우나, 유가 사상의 발전 맥락을 볼 때 얼마든지 있을 법한 일이라고는 본다. 이는 유가 철학의 성격과도 닿아 있는 문제이다. (공자의 정명론에 대해서는 한번 더 논하겠다.) leess@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