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수의 동서횡단 49 / 덕쟁의 한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덕쟁의 원리… 실체 모호해 사회구성의 원리로는 한계 노출
지나친 도식화의 위험이 따르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고대 그리스 철학 전통의 핵심을 ‘논쟁’으로, 고대 중국 철학 전통의 핵심을 ‘덕쟁’으로 정리했다. 그리스사람들은 논쟁만 했고, 중국사람들은 덕쟁만 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스사람들도 ‘덕’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고, 중국사람들도 논쟁을 할 줄 몰랐던 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사람들은 ‘덕’조차 지식을 통해 기를 수 있다고 생각했고, 중국사람들은 궁극적으로 논쟁을 통해서는 문제가 결판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사람들은 논쟁을 판가름하기 위한 심판관(표준)으로 형식논리학을 만들어냈고, 중국사람들은 덕쟁에 관한 숱한 일화를 기록에 남겼다.
그리스사람들은 논쟁을 통해 무엇이 바른 논리이고 무엇이 그른 논리인지를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논리로도 논박당하지 않는 논리가 바른 논리다. 그리고 그것은 보편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논쟁은 덕쟁보다 더 우위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논리는 덕보다 ‘보편’임을 주장하기가 훨씬 쉽다. 논리는 언어(기호)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덕은 언어로 표현해낼 수 없다. 그것은 행동과 실천, 결국은 삶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다.
서구의 논쟁과 중국의 덕쟁이 맞붙으면…
우문을 하나 던져보자(우문을 통해 사태가 좀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없지 않다). 논쟁과 덕쟁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아니면 이렇게 묻자. 논리와 덕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그도 아니면 이렇게 물어도 좋을 것이다. 빼어난 논변가와 마음그릇 넓은 덕의 달인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답은 이렇다. 논리와 덕이 ‘논쟁’을 벌이면 논리가 이긴다. 그러나 논리와 덕이 ‘덕쟁’을 벌이면 덕이 이긴다. 이건 답이 아니다. 사실은, 논리가 논쟁을 걸어오고 이에 대해 덕이 덕쟁으로 응수할 때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말해야 한다. 논리와 덕의 싸움이 공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지난 400년 동안 실제로 논리가 세운 이성의 문명이 덕의 문화를 짓밟은 과정을 지켜보았다. 근대 유럽에서 구성한 과학의 원리에 맞지 않는 모든 전통은 다 미신과 몽매와 신화라는 판정을 받았고, 유럽 바깥의 사람들은 공장에서 만든 빵과 대량생산된 옷감을 얻는 대신, 자연과 어울려 평안하게 깊은 잠에 빠져드는 방법과 어떤 틀에도 매이지 않는 상상력을 역사의 쓰레기통에 내던져버렸다(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전통시대의 중국이 ‘덕의 문화’를 일구는 데 성공적이었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중국사에서도 부패와 모략과 암투와 더티플레이가 판을 쳤다. 그게 인간의 역사다. 그러나 유럽에서 발전한 근대 문명이 그들과 다른 생활양식을 가차없이 획일화하고 파괴하고 말살하는 과정에서, 가령 ‘덕쟁’과 같은 삶의 방식 또한 망각 속으로 묻히게 했음은 분명하다). 논리가 덕보다 더 보편적으로 보이는 까닭은 그것이 언어(기호)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란 본디 추상적이다.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세계를 추상해 파악한다는 뜻이다. 가령 ‘나무’란 낱말조차도 추상화 과정을 배경에 숨기고 있는 것이고, ‘소나무’란 낱말 또한 그러하다. 인도의 논리철학에서는 “고유명사조차 추상적 낱말이다”라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다. 가령 ‘소크라테스’란 고유명사는 매우 구체적인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낱말인 것 같지만, 사실은 아기 소크라테스가 청년이 되고 늙은이가 되기까지 끊임없이 변해가는 어떤 인간을 추상해 묶은 것이다. 언어현상과 기호현상 자체가 ‘추상’의 과정을 안에 포함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생각한 ‘보편’이란 이렇게 언어에 의존하는 논리의 추론과정에서 드러나는 결론을 말한다. 그것은 언어에 의존하는 보편성이다. 화이트헤드는 ‘잘못된 추상화의 오류’에 대해 논한 바 있다. 그러나 사실은 ‘제대로 된 추상화’조차도 이미 현실의 구체성을 바닥에 내려놓고 있는 것이다. 추상적 사유는 늘 그 대가로 생생한 현실의 구체성을 놓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 내면의 투쟁 거치지 않은 자연스런 행동 고대 중국사람들이 ‘덕쟁’이란 다툼의 방식을 얻은 건, 아마도 언어의 한계에 대한 깨달음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덕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논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기에, 그 추론과정을 망각하지 않거나 문자로 옮겨놓는 작업을 통해 쉽게 지킬 수 있다. 그러나 덕은 그 사람의 삶에 의해 계속 길러지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다. 논리는 소유할 수 있지만 덕은 소유할 수 없다. 덕은 삶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그냥 거기 있는 것일 뿐, 누구도 그걸 소유하거나 조작할 순 없다. 덕은 언어로 가둘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과 부닥치며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와 싸울 때 얻어지는 역동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 중국의 철인들은 덕을 설명하기 위해 논리를 동원하는 대신 옛사람이 보여준 살아가는 모습을 제시했다. 가령 제환공의 뒤를 이어 춘추시기 두 번째 패자가 된 진문공 중이는 청장년 시절 왕실암투를 피해 19년 동안 각국을 돌아다니며 온갖 수모를 겪는다. 한번은 조나라에 갔을 때 농부가 먹을 것 대신 흙을 한 사발 떠서 주었다. 중이가 울컥하자 그를 수행하던 다섯 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호돌은 “흙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니 절을 하고 받으십시오”라고 말한다. 중이는 그의 말을 따른다. 이런 일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제왕이 될 자격이 있으려면 자기 내면의 충동을 이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태에 부닥쳤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걸 ‘말’로 하기는 쉽다. 그러나 실제 그런 상황에 부닥쳤을 때, 그렇게 행동하기란 쉽지 않다. 자기의 내면과 격렬한 투쟁을 거치지 않고도 자연스레 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덕이다. 고대 중국의 철인들은 작은 다툼에 집착하지 말 것을 말했다. 공자는 송사를 잘 처리하는 것보다 송사가 생기는 근원을 막을 줄 아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고, 노자는 물이 바위를 만나면 다투지 않고 부드럽게 흘러가듯 다투지 않을 것을 강조했다. 또한 손무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선이라 말했다. 이들이 다같이 다투지 말 것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무력 대신 자기 내면의 덕을 가지고 다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덕쟁은 다툼이면서 다툼이 아니다. 그것은 덕으로써 세상과 겨루는 것이자, 자기 내면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다툼이다. 덕쟁의 원리는 그대로 천하사상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미 손무의 군사사상조차 천하사상으로 이어짐을 보았다. 천하사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자료는, 강태공이 지었다는 <육도>(六韜)라는 병법서다. <육도>는 말한다.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며 천하의 천하이다. 천하와 이로움을 함께하는 자는 천하를 얻고 천하의 이로움을 독차지하려는 자는 천하를 잃는다.” “천하를 이롭게 하는 자는 천하가 그를 위해 길을 열어주고 천하를 해롭게 하는 자는 천하가 그 길을 막는다.” “천하를 살리는 자를 천하는 덕으로 대하고, 천하를 죽이는 자를 천하는 해친다. 천하를 통하도록 하는 자를 천하는 열어주고, 천하를 궁하게 하는 자를 천하는 원수로 여긴다. 천하를 편안하게 하는 자를 천하는 의지하며, 천하를 위태롭게 하는 자를 천하는 저주한다.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며, 오직 길을 터득한 사람만이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덕은 이제 천하를 차지할 수 있는 표준의 자리에 놓인다. 그러나 덕은 객관적으로 드러내기가 어렵다. 누가 더 덕 있는 사람인지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민심”을 기준으로 내세웠다. 민심을 얻은 사람이 덕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눈으로 보자면 민심 또한 객관화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전체주의의 군중 동원이라는 초유의 현상을 겪은 현대 세계에서 ‘민심’ 같은 모호한 기준에 의지해 사회구성의 원리를 정할 순 없다. 이 점이 덕쟁의 한계다. 고대 중국인들이 사유했던 덕쟁의 원리는 이제 현대적으로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여전히 구체적 삶의 방식으로 의미있어 덕쟁이 사회구성의 원리가 되기엔 어려움이 따르지만, 삶을 지배하는 원리로 삼는 건 나쁘지 않다. 덕을 기르는 일을 어떤 신비주의적인 행위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세상에 가짜 도사들이 너무 많아서 ‘도’나 ‘덕’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도맷금으로 허황한 주장으로 치부당하기 십상이지만, 고대 중국의 철인들이 제시한 ‘덕’에 관한 사유는 매우 구체적인 삶의 방식일 뿐이다. 논쟁과 덕쟁은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삶의 도구이다. 어느 하나를 택하기 위해 다른 걸 포기할 필요는 없다. 논쟁의 문화도 덕쟁의 문화도 만들어낸 일이 없는 조선 같은 주변부의 오랑캐 겨레는 오히려 즐거운 마음으로 다양한 문화를 고루 누릴 수 있다. 거기에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이 있다. xuande@hanmail.net

일러스트레이션/ 김성희.
우문을 하나 던져보자(우문을 통해 사태가 좀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없지 않다). 논쟁과 덕쟁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아니면 이렇게 묻자. 논리와 덕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그도 아니면 이렇게 물어도 좋을 것이다. 빼어난 논변가와 마음그릇 넓은 덕의 달인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답은 이렇다. 논리와 덕이 ‘논쟁’을 벌이면 논리가 이긴다. 그러나 논리와 덕이 ‘덕쟁’을 벌이면 덕이 이긴다. 이건 답이 아니다. 사실은, 논리가 논쟁을 걸어오고 이에 대해 덕이 덕쟁으로 응수할 때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말해야 한다. 논리와 덕의 싸움이 공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지난 400년 동안 실제로 논리가 세운 이성의 문명이 덕의 문화를 짓밟은 과정을 지켜보았다. 근대 유럽에서 구성한 과학의 원리에 맞지 않는 모든 전통은 다 미신과 몽매와 신화라는 판정을 받았고, 유럽 바깥의 사람들은 공장에서 만든 빵과 대량생산된 옷감을 얻는 대신, 자연과 어울려 평안하게 깊은 잠에 빠져드는 방법과 어떤 틀에도 매이지 않는 상상력을 역사의 쓰레기통에 내던져버렸다(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전통시대의 중국이 ‘덕의 문화’를 일구는 데 성공적이었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중국사에서도 부패와 모략과 암투와 더티플레이가 판을 쳤다. 그게 인간의 역사다. 그러나 유럽에서 발전한 근대 문명이 그들과 다른 생활양식을 가차없이 획일화하고 파괴하고 말살하는 과정에서, 가령 ‘덕쟁’과 같은 삶의 방식 또한 망각 속으로 묻히게 했음은 분명하다). 논리가 덕보다 더 보편적으로 보이는 까닭은 그것이 언어(기호)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란 본디 추상적이다.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세계를 추상해 파악한다는 뜻이다. 가령 ‘나무’란 낱말조차도 추상화 과정을 배경에 숨기고 있는 것이고, ‘소나무’란 낱말 또한 그러하다. 인도의 논리철학에서는 “고유명사조차 추상적 낱말이다”라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다. 가령 ‘소크라테스’란 고유명사는 매우 구체적인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낱말인 것 같지만, 사실은 아기 소크라테스가 청년이 되고 늙은이가 되기까지 끊임없이 변해가는 어떤 인간을 추상해 묶은 것이다. 언어현상과 기호현상 자체가 ‘추상’의 과정을 안에 포함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생각한 ‘보편’이란 이렇게 언어에 의존하는 논리의 추론과정에서 드러나는 결론을 말한다. 그것은 언어에 의존하는 보편성이다. 화이트헤드는 ‘잘못된 추상화의 오류’에 대해 논한 바 있다. 그러나 사실은 ‘제대로 된 추상화’조차도 이미 현실의 구체성을 바닥에 내려놓고 있는 것이다. 추상적 사유는 늘 그 대가로 생생한 현실의 구체성을 놓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 내면의 투쟁 거치지 않은 자연스런 행동 고대 중국사람들이 ‘덕쟁’이란 다툼의 방식을 얻은 건, 아마도 언어의 한계에 대한 깨달음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덕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논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기에, 그 추론과정을 망각하지 않거나 문자로 옮겨놓는 작업을 통해 쉽게 지킬 수 있다. 그러나 덕은 그 사람의 삶에 의해 계속 길러지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다. 논리는 소유할 수 있지만 덕은 소유할 수 없다. 덕은 삶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그냥 거기 있는 것일 뿐, 누구도 그걸 소유하거나 조작할 순 없다. 덕은 언어로 가둘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과 부닥치며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와 싸울 때 얻어지는 역동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 중국의 철인들은 덕을 설명하기 위해 논리를 동원하는 대신 옛사람이 보여준 살아가는 모습을 제시했다. 가령 제환공의 뒤를 이어 춘추시기 두 번째 패자가 된 진문공 중이는 청장년 시절 왕실암투를 피해 19년 동안 각국을 돌아다니며 온갖 수모를 겪는다. 한번은 조나라에 갔을 때 농부가 먹을 것 대신 흙을 한 사발 떠서 주었다. 중이가 울컥하자 그를 수행하던 다섯 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호돌은 “흙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니 절을 하고 받으십시오”라고 말한다. 중이는 그의 말을 따른다. 이런 일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제왕이 될 자격이 있으려면 자기 내면의 충동을 이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태에 부닥쳤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걸 ‘말’로 하기는 쉽다. 그러나 실제 그런 상황에 부닥쳤을 때, 그렇게 행동하기란 쉽지 않다. 자기의 내면과 격렬한 투쟁을 거치지 않고도 자연스레 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덕이다. 고대 중국의 철인들은 작은 다툼에 집착하지 말 것을 말했다. 공자는 송사를 잘 처리하는 것보다 송사가 생기는 근원을 막을 줄 아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고, 노자는 물이 바위를 만나면 다투지 않고 부드럽게 흘러가듯 다투지 않을 것을 강조했다. 또한 손무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선이라 말했다. 이들이 다같이 다투지 말 것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무력 대신 자기 내면의 덕을 가지고 다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덕쟁은 다툼이면서 다툼이 아니다. 그것은 덕으로써 세상과 겨루는 것이자, 자기 내면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다툼이다. 덕쟁의 원리는 그대로 천하사상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미 손무의 군사사상조차 천하사상으로 이어짐을 보았다. 천하사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자료는, 강태공이 지었다는 <육도>(六韜)라는 병법서다. <육도>는 말한다.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며 천하의 천하이다. 천하와 이로움을 함께하는 자는 천하를 얻고 천하의 이로움을 독차지하려는 자는 천하를 잃는다.” “천하를 이롭게 하는 자는 천하가 그를 위해 길을 열어주고 천하를 해롭게 하는 자는 천하가 그 길을 막는다.” “천하를 살리는 자를 천하는 덕으로 대하고, 천하를 죽이는 자를 천하는 해친다. 천하를 통하도록 하는 자를 천하는 열어주고, 천하를 궁하게 하는 자를 천하는 원수로 여긴다. 천하를 편안하게 하는 자를 천하는 의지하며, 천하를 위태롭게 하는 자를 천하는 저주한다.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며, 오직 길을 터득한 사람만이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덕은 이제 천하를 차지할 수 있는 표준의 자리에 놓인다. 그러나 덕은 객관적으로 드러내기가 어렵다. 누가 더 덕 있는 사람인지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민심”을 기준으로 내세웠다. 민심을 얻은 사람이 덕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눈으로 보자면 민심 또한 객관화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전체주의의 군중 동원이라는 초유의 현상을 겪은 현대 세계에서 ‘민심’ 같은 모호한 기준에 의지해 사회구성의 원리를 정할 순 없다. 이 점이 덕쟁의 한계다. 고대 중국인들이 사유했던 덕쟁의 원리는 이제 현대적으로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여전히 구체적 삶의 방식으로 의미있어 덕쟁이 사회구성의 원리가 되기엔 어려움이 따르지만, 삶을 지배하는 원리로 삼는 건 나쁘지 않다. 덕을 기르는 일을 어떤 신비주의적인 행위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세상에 가짜 도사들이 너무 많아서 ‘도’나 ‘덕’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도맷금으로 허황한 주장으로 치부당하기 십상이지만, 고대 중국의 철인들이 제시한 ‘덕’에 관한 사유는 매우 구체적인 삶의 방식일 뿐이다. 논쟁과 덕쟁은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삶의 도구이다. 어느 하나를 택하기 위해 다른 걸 포기할 필요는 없다. 논쟁의 문화도 덕쟁의 문화도 만들어낸 일이 없는 조선 같은 주변부의 오랑캐 겨레는 오히려 즐거운 마음으로 다양한 문화를 고루 누릴 수 있다. 거기에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이 있다. xuande@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