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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싸움을 피해 천하를 얻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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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8-2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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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반전사상을 빼닮은 손무의 덕쟁… 천하를 온전히 보전하는 게 최선의 전략

일러스트레이션/ 김성희
사람들은 흔히 ‘백전백승’이면 그보다 더 좋을 게 어디 있겠느냐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손무는 백전백승이 최선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백번 싸워 백번 이기는 것은 최선이 아니요, 싸우지 않고 적을 굽히는 것이 좋은 것 가운데 좋은 것이다.”(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謀攻>) 어떻게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가능한가.

“전쟁을 이끄는 최상의 전략은 적의 전략을 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적의 외교를 치는 것이며, 그 다음은 적의 군사를 치는 것이요, 그 아래는 적의 성을 치는 것이다. 적의 성을 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하는 일이다.”(故上兵伐謀, 其次伐交, 其次伐兵, 其下攻城. 攻城之法爲不得已. <謀攻>)

사람이 다치고 천하를 얻어 무엇하리오


적의 전략과 의도를 무너뜨려 어떤 군사행동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게 최선이고, 외교수단을 박탈해 고립무원에 빠지도록 하는 게 차선이다. 군사행동은 낮은 수준의 작전이며, 굳게 닫힌 적의 성채를 치는 일은 그야말로 두개골 안이 텅 비어 아무런 계책도 꾸며낼 수 없는 골빈당 무뢰배들이나 하는 최악의 선택이다. 왜 그런가. 사람이 다치고 천하가 다치기 때문이다. “성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소거(巢車, 큰 방패로 가린 망루)와 분온(분온, 소가죽으로 위를 가린 바퀴 넷 달린 수레로, 흙을 성 아래에 옮겨 성 위로 오를 수 있도록 하는 장비)이라는 군장비를 만들고 성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석달이나 걸린다. 성을 공격하기 위한 보루를 구축하는 데 또한 석달은 걸린다. (이렇게 철저한 준비를 한 뒤 성을 쳐야 함에도) 장수가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해 자기 군사들로 하여금 당장 성벽을 개미처럼 기어오르라고 명령한다면 자기 군사의 삼분의 일을 잃고도 성을 함락시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을 치는 재앙이다.”(<謀攻>) 이 대목을 잘 읽어보면 손무가 얼마나 인간미 넘치는 덕장(德將)인지 알 수 있다. 성을 치는 작전은 하지하(下之下)의 방책이지만, 어쩔 수 없어 성을 치더라도 철저한 준비를 거쳐 군사들을 다치지 않도록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소거와 분온은 둘 다 성 위에서 날아오는 적군의 돌과 화살로부터 병사를 보호하기 위한 장비다. 성을 공격할 때는 이처럼 자기 휘하의 병사들을 보호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는 데 최선을 다한 뒤에 칠 일이다. 부하를 아낄 줄 모르는 이는 장수 자격이 없다.

여담 : 부하를 아끼는 일에 관해서는, 손무와 더불어 병서로 쌍벽을 이루는 전국시기 군사지도자 오기(吳起)가 남긴 유명한 일화가 있다. 총사령관인 오기는 출병하기 전에 등에 종창이 난 병사의 상처를 입으로 빨아 치료해주었다. 이 모습을 본 그 병사의 어미는 땅에 주저앉더니 대성통곡을 했다. 장수가 병사의 종기를 빨아줄 정도의 인물이라면 병사를 잘 돌봐주는 덕장일 터인데 정반대의 반응을 보인 걸 이상하게 여긴 이웃 사람이 까닭을 물어보았다. 어미의 입에선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지난번 전쟁 때 저 아이의 아비가 오 장군의 휘하에 있었는데, 그때도 장군이 상처를 입으로 빨아 치료해주었소. 아이의 아비는 그 일에 감동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선봉에서 싸우다 전사했소. 이제 저 아이의 등창을 또 오 장군이 입으로 빨아 치료해주었으니, 자식마저 아비의 길을 가지 않겠습니까.”

다시 본론 : 손무는 전쟁의 참화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아무리 병사가 많다 하더라도 함부로 무모한 공격을 감행하지 않았다. 그는 피바다 한가운데서 승리의 깃발을 흔드는 일이란 아무 가치가 없음을 깨달은 성숙한 사람이었다. 그의 사상은 노자의 반전사상과도 통한다. 노자는 “무기란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상서롭지 못한 것”(夫佳兵者, 不祥之器. 30장)이므로 “어쩔 수 없어서 그것을 쓸 뿐”(不得已而用之. 31장)이지, “군사력으로 천하를 강하게 해서는 안 된다”(不以兵强天下. 30장)고 말한다. 노자는 더 나아가 출병할 때는 상례(喪禮)로써 임해야 한다(以喪禮處之.)고 말한다. “사람의 무리를 크게 해쳤으므로 비통해하는 마음으로 슬퍼할 것이며,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상례로써 거기 임할 것이다.”(殺人之衆, 以哀悲泣之, 戰勝. 以喪禮處之. 30장) 군사전략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한 손무의 군사사상이 노자의 반전평화사상과 통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두 사람 모두 전쟁이란 “어쩔 수 없을 때에만 취하는” 제한적인 수단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손무는 전쟁터의 노자다.

전쟁은 제한적인 수단… 천하를 지켜라

그는 자기 휘하의 병사들만 아낀 게 아니라, 나아가 천하를 아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군사사상가인 손무가 최선으로 친 전쟁은 총과 칼이 서로 부딪치는 전쟁이 아니라 머리와 지략으로써 싸우는 전쟁이었다. 그가 “적의 전략을 치는 것”(伐謀)을 최선으로 꼽은 까닭은, 천하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게 하지 않고도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가 적의 군대를 치고 적의 성벽을 기어오르는 일을 가장 낮은 수준의 작전이라고 본 까닭은, 군사행동이 적군과 아군의 소중한 생명을 해치고 나아가 나라와 천하를 어지럽히고 황폐화시키기 때문이었다. 그는 말한다 : “군사를 잘 쓰는 사람은 적의 군사를 굽히되 맞서 싸우지 않고, 적의 성을 빼앗되 치지 않으며, 적의 나라를 깨뜨리되 오래 끌지 않고, 반드시 온전함으로써 천하를 다툰다.”(善用兵者, 屈人之兵而非戰也, 拔人之城而非攻也, 破人之國而非久也, 必以全爭於天下. <謀攻>) 아마도 이 구절이 <손자>에서 가장 빛나는 구절일 것이다. “온전함으로써 천하를 다투라!”

<장자>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상자를 열고 주머니를 뒤지고 궤짝을 따가는 좀도둑을 막기 위해 사람들은 상자와 주머니와 꿰짝을 끈으로 단단히 묶고 자물쇠로 튼튼하게 채운다. 이것이 세속에서 말하는 지혜다. 그러나 큰 도적은 상자를 열고 궤짝을 뒤지는 따위의 일을 하지 않고 궤짝이든 상자든 통째로 둘러메고 달아나면서 오히려 상자와 궤짝을 묶은 끈이나 자물쇠가 단단하지 않아 열릴까 걱정한다.”(<거협>)

장자의 이야기는 그대로 손무의 사상과 통한다. 성을 깨부수고 적군을 궤멸시켜 승리를 거두겠다는 장수는 궤짝을 따고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좀도둑 패거리나 마찬가지다. 궤짝을 통째로 둘러메고 뛰는 큰 도적이야말로 손무의 요구에 부응하는 큰 그릇이랄 수 있다.

“온전함으로써 천하를 다투라”는 손무의 요구를 단순히 천하를 다 먹겠다는 ‘야심’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의 강조점은 천하를 통째로 차지할 야망을 키우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전쟁 수단에 호소해서는 사람과 천하가 다 다치므로 천하를 온전히 보존하는 전략으로써 천하를 해치는 이들과 맞서라는 데 있다. 이를테면 솔로몬의 재판에서 아이를 다투는 두 어미 가운데 진짜 어미는 차마 아이를 칼로 잘라서 절반이라도 차지하겠다는 끔찍한 망발을 부릴 수 없듯, 참된 장수라면 천하를 피비린내와 화약내로 진동하게 만드는 책략을 쓰지 않는다는 게 전쟁으로 날이 지고 새는 걸 지겹도록 바라본 장수 손무의 내면에서 우러나온 진정이었을 것이다. 거꾸로 얘기하자면 이런 사람이라야 비로소 천하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솔로몬 재판의 진짜 어미가 아이를 ‘차지’하는 것보다 ‘온전’하게 지키는 걸 택하듯, 천하를 경영할 수 있는 주인은 천하를 온전하게 지키기 위해 애쓰는 평화주의자다. 위대한 사유에서 ‘소유’는 늘 아무것도 아니다.

전쟁에도 덕의 원리가 통해야 한다

손무의 군사사상은 어느덧 ‘천하’사상으로 이어진다. 먼저, 천하에 관한 노자의 생각을 들어보자. “장차 천하를 손아귀에 넣으려고 작위하는 자에게서 나는 그가 뜻을 이루지 못함을 본다. 천하는 거룩한 그릇이다. 그건 거기에 어떤 작위를 가할 수가 없는 성질의 것이다. 작위하는 자는 실패하고, 그걸 잡으려는 자는 놓칠 것이다.”(將欲取天下而爲之, 吾見其不得已. 天下神器, 不可爲也. 爲者敗之, 執者失之. 29장) “온전함으로써 천하를 다투라”는 손무의 생각은 노자의 생각에 매우 가까이 다가서 있다. 손무의 사상은 또한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고대 중국인이 천하의 주인을 결정하는 방식인 ‘덕쟁’의 논리와 일치한다. 전장에서 사유한 손무의 생각조차 덕쟁의 논리로 회귀하고 있는 걸 보면, 이 시기에 이미 고대 중국인들이 ‘덕쟁’이라는 방식으로 천하를 다투는 데 합의에 이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손무가 다른 사상가들과 다른 점은, ‘덕’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제시하는 대신 전투행위까지 포함하는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유를 거쳐 전쟁 이외의 수단으로 천하를 다퉈야 함을 말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전국시기의 쟁패는 무력에 의해 통일을 이뤘지만, 이후 한 고조 유방이 초 장왕 항우와 천하의 패권을 다툰 일에서부터 마오쩌둥이 장제스와 대결을 벌인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중국의 역사를 읽으며 현실적 투쟁 안에서조차 ‘덕쟁’의 원리가 숨어서 작동해왔음을 볼 수 있다.

xuand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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