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을 거부하는 양가론의 허구적 논리… 모순을 넘어서야 세상의 표준 세워
현대 분석철학의 대가인 콰인은 “역사에서 패러독스의 발견은 종종 인간 사유의 주요한 기초를 다시 세우는 기회였다”고 말한다. 패러독스뿐 아니라 궤변조차 인간의 사유를 자극해 새로운 사변의 세계를 여는 데 일조했음을 인정하는 게 온당할 것이다. 모순과 패러독스와 궤변은 이제까지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던 공리, 규범, 표준을 뒤흔든다. 그러면 세상은 새로운 공리, 규범, 표준을 만들어내기 위한 거대한 논쟁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중국에서 춘추전국시기 또한 그런 시기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양가론’을 편 등석은 바로 이런 거대한 논쟁의 시기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인물이었다. 불행히도 오늘날까지 전하는 그에 관한 자료들은 대부분 신뢰도가 크게 떨어진다. 가령 <한서·예문지>에는 “<등석자> 두편이 전한다”고 하고 있는데, 현존하는 <등석자>에 실린 ‘전사’(轉辭)와 ‘무후’(無厚) 등 두편은 공자와 거의 동시대 인물인 등석의 저작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한대 이후의 위작이라는 게 통설이다. 그 내용도 명가와 법가의 주장이 뒤섞인 잡박한 것이다.
변하는 세태에 객관적 규범이 있는가
그의 논리는 흔히 ‘양가론’(兩可論)이라 불린다. <열자>(列子)는 그가 “양가의 설을 다루었고 이루 다할 수 없는 논리를 펼쳐놓았다”(操兩可之說, 設無窮之辭.)고 평하고 있다. 지난번에 예로 들은 부자의 주검에 관한 이야기처럼, 서로 모순하는 양쪽의 논리가 모두 성립함을 보여주는 것을 자신의 업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양가론은 등석이 살았던 당대에나 오늘날에나 궤변이라는 평을 받지만, 무덤 속의 등석도 할말은 있을 것이다. 그는 전통적으로 내려온 규범이 무너지고 어제의 충신이 오늘의 역적으로 변하는 세태 속에서 살았다. 이런 시절에 그는 양가론을 통해 “대체 인간에게 객관적인 규범이란 게 있을 수 있느냐”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가 살았던 춘추시기는 사상적으로만 혼란을 겪은 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큰 혼란을 겪던 시절이었다. 그와 거의 동시대 인물인 사묵(史墨)이란 사람의 논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서기 전 510년의 일이다. 진(晉)나라의 재상 조간자(趙簡子)가 신하인 사묵에게, “(노나라의) 계씨가 임금을 내쫓았음에도 인민이 계씨를 따르고 그를 단죄할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왜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사묵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 어떤 종묘사직도 영원히 섬김을 받는 법은 없으며, 임금과 신하의 지위 또한 영원 불변한 것이 아님은 예로부터의 진실입니다. 그래서 <시경>(詩經)에서는 ‘높은 언덕도 골짜기가 되고, 깊은 골짜기도 구릉이 된다’(高岸爲谷, 深谷爲陵.)고 했습니다. 저 삼후(우·하·상 세 왕조)의 자손들이 지금은 평민이라는 사실은 주군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좌전> 소공 32년) 노나라 소공을 몰아낸 계씨가 왜 단죄당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 사묵은 대범하게 “세상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표준이 어디 있느냐”고 답한다. 양가론은 이런 정치상황이 사상계에 반영된 논리라 할 수 있다. 어느 한쪽의 주장을 하기는 오히려 쉽고 흔한 일이다. 양가론은 어찌보면 대립면에 대해 양수겹장을 두었다는 데 철학적인 의미가 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일종의 상황논리이지만, 이를 더 일반화하여 어떤 상황이든 가(可)와 불가(不可), 시(是)와 비(非) 양쪽의 논리가 다 구성 가능함을 보여준 것이다. 양가론은 혼란을 야기한 주범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혼란상을 부각시킨 점을 공로로 인정해야 할지 모른다. 역물십조의 명제를 곱씹어봐야 중국 고대에서 사회 혼란의 징표처럼 등장한 이 양가론이 어떻게 전개되어갔는지를 먼저 살펴보자. 정설이라 주장할 의도는 전혀 없지만, 논리의 내용을 볼 때, 등석의 양가론을 계승한 이는 전국시기의 혜시(惠施, 서기 전 350?∼전 260?)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등석은 인멸당한 철학자다. 그에 관한 일화는 기록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앞서 말했듯, 오늘날 전하는 그의 저작은 후대의 위작이다. 양가론이라는 위험한 주장 자체가 일반인의 상식과는 정면으로 부닥치므로 일반적으로 환영받기는 어렵고 학파를 형성하기도 어려웠다. 사회의 혼란이 수습되는 시기에 이르면 반드시 인멸당할 운명에 있는 논리다. 혜시도 등석과 마찬가지로 인멸당한 철학자다. 등석은 위작이나마 그의 이름이 들어간 서물(書物)이 남아 있지만, 혜시는 남의 둥지에 낳은 뻐꾸기알처럼 제자(諸子)의 저작 이곳저곳에 그의 주장이 조각조각 흩어져 전해온다. <순자>나 <묵자>에 남아 있는 편린들은 혜시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므로 그의 논리를 충분히 재구성하기 어렵다. 혜시의 논리는 <장자·천하>편에 남아 있는 자료가 주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다른 제자서(諸子書)와 마찬가지로 <장자>란 책은 장자학파의 논문집과도 같은 책이다. ‘내편’은 대체로 장주(莊周) 자신의 작품이라 인정받고 있지만, ‘외편’과 ‘잡편’은 장주의 제자들이 쓴 내용이라는 게 통설이다. <장자·천하>편은 ‘잡편’에 나오는 글로, 당시 각 학파의 논리를 정리하고 있다. 여기에 ‘역물십조’(역物十條)라 불리는 혜시의 유명한 명제 열 가지가 나온다. 혜시가 등석보다 진일보한 점은 그가 원칙을 가진 양가론자였다는 점이다. 그가 주장한 모든 양가론에 숨어 있는 공식은 ‘역물십조’의 첫째 명제와 다섯 번째 명제이다. (1) “지극히 큰 것은 밖이 없으니, 이를 일러 ‘큰 하나’(大一)라 한다. 지극히 작은 것은 안이 없으니, 이를 일러 ‘작은 하나’(小一)라 한다.”(至大無外, 謂之大一; 至小無內, 謂之小一.) (5) “크게 보아 같으면서도 작게 보아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것을 일러 ‘작게 같고 다름’(小同異)이라 한다. 만물은 완전히 같으며 또한 완전히 서로 다르니, 이를 일러 ‘크게 같고 다름’(大同異)이라 한다.”(大同而與小同異, 此之謂小同異, 萬物畢同畢異, 此之謂大同異.) “지극히 큰 것은 밖이 없다.” 참으로 위대한 명제다. 어떤 사고이든 테두리를 긋는 순간 그 사고는 그 테두리의 바깥을 포용할 수 없는 운명에 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큰 것에 대해 말할 때는 “이것이다”라는 긍정의 내용을 제시할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이 명제는 노자가 말한 “길을 길이라 하면 늘 그러한 길이 아니다”라는 명제와 통하는 점이 있다. 이렇게 절대적으로 큰 것과 절대적으로 작은 것에 대해 사고한 뒤 혜시는 ‘작게 같고 다름’과 ‘크게 같고 다름’을 제시한다. 우리가 상식의 세계에서 흔히 따지고 견주는 일들은 ‘작게 같고 다름’의 세계에 속한다. 그러나 크게 보면 우주만물은 하나다. 작게 보면 뜰 앞의 잔디조차 제각기 같지 않다. 혜시는 이처럼 크고 작음과 같고 다름의 구별이 상대적인 것임을 원칙적으로 천명했다. 이런 원리를 가지고 있다면 어떤 논리와 대결하든 말이 궁할 리 없다. 역물십조 가운데 “하늘과 땅, 산과 못은 평평하다”라든가, “오늘 월나라에 갔다가 어제 돌아왔다”는 따위의 나머지 일곱 명제는 이 원리를 시간과 공간에 응용한 것이다. 마지막 열 번째 명제는 그의 결론에 해당한다: “만물을 두루 사랑하라. 하늘과 땅은 한몸이다.”(氾愛萬物, 天地一體也.) 세상의 표준을 세우기 위한 투쟁들 등석과 혜시의 양가론은 한계가 있게 마련인 인간의 사고에서 모순을 발견하고, 과연 어떤 논리가 만고불변의 표준일 수 있겠느냐는 문제를 제기했지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양가론을 상식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장자·천하>편에서 혜시와 같은 변자들이 “사람의 입은 이길 수 있었으나 사람의 마음은 이길 수 없었다”고 지적한 것은 온당하다. 이제 세상에는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논리가 나왔다. 과연 그런가? 모름지기 중원을 평정하겠다는 야망을 가진 사람치고 이런 양가론을 참고 견디기는 힘든 법이다. 그래서 공구(孔丘)는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必也正名乎!)고 선언하고 나섰다. 바야흐로 세상의 표준을 세우기 위한 투쟁은 이제 점입가경으로 치닫는다. 어떻게 해야 “이름과 실질이 서로 원망하는” 세태를 고쳐 “이름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공자, 묵자, 공손룡, 순자, 한비자가 각기 다른 ‘정명’의 원리를 제시했다. 이제는 유가, 묵가, 명가, 법가의 정명론을 살펴볼 순서다. leess@hani.co.kr

그의 논리는 흔히 ‘양가론’(兩可論)이라 불린다. <열자>(列子)는 그가 “양가의 설을 다루었고 이루 다할 수 없는 논리를 펼쳐놓았다”(操兩可之說, 設無窮之辭.)고 평하고 있다. 지난번에 예로 들은 부자의 주검에 관한 이야기처럼, 서로 모순하는 양쪽의 논리가 모두 성립함을 보여주는 것을 자신의 업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양가론은 등석이 살았던 당대에나 오늘날에나 궤변이라는 평을 받지만, 무덤 속의 등석도 할말은 있을 것이다. 그는 전통적으로 내려온 규범이 무너지고 어제의 충신이 오늘의 역적으로 변하는 세태 속에서 살았다. 이런 시절에 그는 양가론을 통해 “대체 인간에게 객관적인 규범이란 게 있을 수 있느냐”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가 살았던 춘추시기는 사상적으로만 혼란을 겪은 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큰 혼란을 겪던 시절이었다. 그와 거의 동시대 인물인 사묵(史墨)이란 사람의 논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서기 전 510년의 일이다. 진(晉)나라의 재상 조간자(趙簡子)가 신하인 사묵에게, “(노나라의) 계씨가 임금을 내쫓았음에도 인민이 계씨를 따르고 그를 단죄할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왜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사묵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 어떤 종묘사직도 영원히 섬김을 받는 법은 없으며, 임금과 신하의 지위 또한 영원 불변한 것이 아님은 예로부터의 진실입니다. 그래서 <시경>(詩經)에서는 ‘높은 언덕도 골짜기가 되고, 깊은 골짜기도 구릉이 된다’(高岸爲谷, 深谷爲陵.)고 했습니다. 저 삼후(우·하·상 세 왕조)의 자손들이 지금은 평민이라는 사실은 주군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좌전> 소공 32년) 노나라 소공을 몰아낸 계씨가 왜 단죄당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 사묵은 대범하게 “세상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표준이 어디 있느냐”고 답한다. 양가론은 이런 정치상황이 사상계에 반영된 논리라 할 수 있다. 어느 한쪽의 주장을 하기는 오히려 쉽고 흔한 일이다. 양가론은 어찌보면 대립면에 대해 양수겹장을 두었다는 데 철학적인 의미가 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일종의 상황논리이지만, 이를 더 일반화하여 어떤 상황이든 가(可)와 불가(不可), 시(是)와 비(非) 양쪽의 논리가 다 구성 가능함을 보여준 것이다. 양가론은 혼란을 야기한 주범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혼란상을 부각시킨 점을 공로로 인정해야 할지 모른다. 역물십조의 명제를 곱씹어봐야 중국 고대에서 사회 혼란의 징표처럼 등장한 이 양가론이 어떻게 전개되어갔는지를 먼저 살펴보자. 정설이라 주장할 의도는 전혀 없지만, 논리의 내용을 볼 때, 등석의 양가론을 계승한 이는 전국시기의 혜시(惠施, 서기 전 350?∼전 260?)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등석은 인멸당한 철학자다. 그에 관한 일화는 기록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앞서 말했듯, 오늘날 전하는 그의 저작은 후대의 위작이다. 양가론이라는 위험한 주장 자체가 일반인의 상식과는 정면으로 부닥치므로 일반적으로 환영받기는 어렵고 학파를 형성하기도 어려웠다. 사회의 혼란이 수습되는 시기에 이르면 반드시 인멸당할 운명에 있는 논리다. 혜시도 등석과 마찬가지로 인멸당한 철학자다. 등석은 위작이나마 그의 이름이 들어간 서물(書物)이 남아 있지만, 혜시는 남의 둥지에 낳은 뻐꾸기알처럼 제자(諸子)의 저작 이곳저곳에 그의 주장이 조각조각 흩어져 전해온다. <순자>나 <묵자>에 남아 있는 편린들은 혜시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므로 그의 논리를 충분히 재구성하기 어렵다. 혜시의 논리는 <장자·천하>편에 남아 있는 자료가 주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다른 제자서(諸子書)와 마찬가지로 <장자>란 책은 장자학파의 논문집과도 같은 책이다. ‘내편’은 대체로 장주(莊周) 자신의 작품이라 인정받고 있지만, ‘외편’과 ‘잡편’은 장주의 제자들이 쓴 내용이라는 게 통설이다. <장자·천하>편은 ‘잡편’에 나오는 글로, 당시 각 학파의 논리를 정리하고 있다. 여기에 ‘역물십조’(역物十條)라 불리는 혜시의 유명한 명제 열 가지가 나온다. 혜시가 등석보다 진일보한 점은 그가 원칙을 가진 양가론자였다는 점이다. 그가 주장한 모든 양가론에 숨어 있는 공식은 ‘역물십조’의 첫째 명제와 다섯 번째 명제이다. (1) “지극히 큰 것은 밖이 없으니, 이를 일러 ‘큰 하나’(大一)라 한다. 지극히 작은 것은 안이 없으니, 이를 일러 ‘작은 하나’(小一)라 한다.”(至大無外, 謂之大一; 至小無內, 謂之小一.) (5) “크게 보아 같으면서도 작게 보아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것을 일러 ‘작게 같고 다름’(小同異)이라 한다. 만물은 완전히 같으며 또한 완전히 서로 다르니, 이를 일러 ‘크게 같고 다름’(大同異)이라 한다.”(大同而與小同異, 此之謂小同異, 萬物畢同畢異, 此之謂大同異.) “지극히 큰 것은 밖이 없다.” 참으로 위대한 명제다. 어떤 사고이든 테두리를 긋는 순간 그 사고는 그 테두리의 바깥을 포용할 수 없는 운명에 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큰 것에 대해 말할 때는 “이것이다”라는 긍정의 내용을 제시할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이 명제는 노자가 말한 “길을 길이라 하면 늘 그러한 길이 아니다”라는 명제와 통하는 점이 있다. 이렇게 절대적으로 큰 것과 절대적으로 작은 것에 대해 사고한 뒤 혜시는 ‘작게 같고 다름’과 ‘크게 같고 다름’을 제시한다. 우리가 상식의 세계에서 흔히 따지고 견주는 일들은 ‘작게 같고 다름’의 세계에 속한다. 그러나 크게 보면 우주만물은 하나다. 작게 보면 뜰 앞의 잔디조차 제각기 같지 않다. 혜시는 이처럼 크고 작음과 같고 다름의 구별이 상대적인 것임을 원칙적으로 천명했다. 이런 원리를 가지고 있다면 어떤 논리와 대결하든 말이 궁할 리 없다. 역물십조 가운데 “하늘과 땅, 산과 못은 평평하다”라든가, “오늘 월나라에 갔다가 어제 돌아왔다”는 따위의 나머지 일곱 명제는 이 원리를 시간과 공간에 응용한 것이다. 마지막 열 번째 명제는 그의 결론에 해당한다: “만물을 두루 사랑하라. 하늘과 땅은 한몸이다.”(氾愛萬物, 天地一體也.) 세상의 표준을 세우기 위한 투쟁들 등석과 혜시의 양가론은 한계가 있게 마련인 인간의 사고에서 모순을 발견하고, 과연 어떤 논리가 만고불변의 표준일 수 있겠느냐는 문제를 제기했지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양가론을 상식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장자·천하>편에서 혜시와 같은 변자들이 “사람의 입은 이길 수 있었으나 사람의 마음은 이길 수 없었다”고 지적한 것은 온당하다. 이제 세상에는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논리가 나왔다. 과연 그런가? 모름지기 중원을 평정하겠다는 야망을 가진 사람치고 이런 양가론을 참고 견디기는 힘든 법이다. 그래서 공구(孔丘)는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必也正名乎!)고 선언하고 나섰다. 바야흐로 세상의 표준을 세우기 위한 투쟁은 이제 점입가경으로 치닫는다. 어떻게 해야 “이름과 실질이 서로 원망하는” 세태를 고쳐 “이름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공자, 묵자, 공손룡, 순자, 한비자가 각기 다른 ‘정명’의 원리를 제시했다. 이제는 유가, 묵가, 명가, 법가의 정명론을 살펴볼 순서다. leess@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