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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법이 논쟁을 잉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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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0-2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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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사회 법률 공포 둘러싼 설전… 가두려는 자와 벗어나려는 자의 영원한 말싸움

사회가 크게 변화할 때, 가장 큰 혼란을 겪는 것 가운데 하나가 ‘말’이다. 사회적 격동기에는 예로부터 써오던 낱말들의 뜻이 달라지는가 하면 새로운 낱말이 마구 등장한다. 심지어는 새로운 어법과 문법까지 등장한다. 소피스트들이 논쟁을 벌였던 고대 그리스나, 제자백가들이 쟁명을 벌였던 춘추전국시대의 고대 중국은 이름과 실제가 큰 혼란을 겪던 시기였다. 흔히 소피스트들이나 변자들이 궤변을 통해 말과 논리를 혼란시켰다고 비판하지만, 그 반대 설명도 가능하다. 이미 기존의 규범이 흔들리고 가치판단 기준이 혼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소피스트나 변자가 등장했다고 보는 쪽이 더 실제상황에 가까울 것이다.

법률을 만들면 백성이 다툴 것이다

고대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고대 중국에서도 논쟁의 출발은 ‘법’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춘추좌씨전>에 따르면 가장 먼저 법률을 인민에게 공포한 제후국은 정(鄭)나라였다. 서기 전 536년, 공자보다 30년쯤 앞서 활동했던 정나라의 대부 자산(子産)은 제후국 가운데 가장 먼저 “형서(刑書)를 주조했다”. 당시는 종이가 발명되기 훨씬 전이므로 법을 공포할 때 책으로 인쇄한 게 아니라 청동솥에 새겨넣었다. 국가에서 인민에게 공포할 사항을 거대한 청동솥에 새겨넣어 주조하는 것은 당시의 관행이었다. 이어 서기 전 513년에는 진(晉)나라에서 ‘형정’(刑鼎)을 주조했다. 형정이란 자산이 주조한 것과 같은, 형법을 새겨넣은 거대한 청동솥을 말한다. 이후 전국시대에 접어들면서 각 제후국들은 부국강병을 위해 법을 바꾸고 정비하는 이른바 ‘변법’(變法)을 경쟁적으로 시행했다. 사회주의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이런 변법을 통해 고대 노예제 사회가 봉건제 사회로 넘어갔다고 보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당대에는 이런 법률의 공포를 둘러싸고 격렬한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먼저 정나라가 형서를 주조해 법률을 공포하자 진나라의 숙향(叔向)은 자산에게 편지를 보내 이를 비판했다. “난 당신에게 희망을 걸고 있었는데, 이제는 접어야겠습니다. 과거의 선왕들은 일의 경중을 헤아려 상황에 따라 판단을 내렸지 형법을 만들진 않았습니다. 법률을 만듦으로 인해 백성이 서로 다투는 마음을 가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형법이 있다는 것을 알면 윗사람을 공경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다수 백성들은 모두 다투는 마음을 품어 형법을 끌어대어 근거로 삼아 요행이 성공하길 바랄 것이며, 그렇게 되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左傳> 昭公 6年)

진나라에서 형정을 주조한 일에 대해 공자(孔子) 또한 반대 태도를 분명히 했다. <좌전>에 따르면 이 일에 대해 공자는 이렇게 평했다.

“진나라가 망할 모양이다! 옛 법도를 버리다니.… 백성들이 솥 위에 새겨진 법률 조문을 살펴보고 형벌의 경중을 알 수 있을 것이니 어찌 귀족을 존중하겠는가.… 귀천의 구별과 서열이 없어졌으니 나라는 또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左傳> 昭公 29年)

숙향과 공자가 법률의 제정과 공포에 반대한 논리는 같다. 백성들이 형법의 내용을 알고 나면 경중을 따져 법망을 피해갈 것이며, 따라서 지배계급을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란 얘기다.

공포와 함께 등장한 변자의 조롱

일반적으로 유가는 법치(法治)에 반대하고 예치(禮治)를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가가 숭상하는 전설 속의 위대한 임금인 요임금과 순임금도 법률을 만들었고, 그 내용은 (후대의 위작이 섞여 있긴 하지만) <서경>(書經)에 전해지고 있다. <서경>에서 ‘서’(書)란 글자 자체가 오늘날 말하는 ‘책’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정부 발행 공문서’라는 뜻이다. 따라서 ‘서경’이란 흔히 개설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선왕의 훌륭한 말씀을 담은 ‘글’”이 아니라, 요임금에서부터 비롯하는 우·하·상·주 사대의 역대 제왕들이 반포한 행정문서를 중심으로 그들의 치적을 기록한 문서더미이다. 이처럼 춘추전국시대 이전에도 규범을 제정하는 일은 이미 있어왔다. 정나라와 진나라가 청동솥에 형법을 새긴 일은 형법을 처음 ‘제정’한 사건이라기보다는 형법을 인민에게 처음 ‘공포’한 사건이라고 보는 게 온당하다. 숙향이나 공자의 글도 법률 제정을 문제삼았다기보다는 백성들에게 이를 공포한 일을 문제삼고 있다.

공자가 법치에 반대한 또다른 이유는 <논어>에 나온다. “백성들을 법으로 이끌고 형벌로 다스린다면 백성들은 형을 면하기만 하면 부끄러워할 줄을 모를 것이다. 백성들을 덕으로 이끌고 예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부끄러워할 줄도 알고 스스로 잘못을 바로잡을 것이다.”(<爲政> 2-3) 이 말은 ‘법치’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백성들의 행동 반경을 법으로 정해둔다면, 그 법이 규정한 내용 이외의 행동에 대해서는 제지 수단이 없다. 숙향과 공자는 이런 사태를 두려워한 것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인민의 덕성을 함양하여 자발적으로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도록 하는 편이 낫다는 주장이다.

오늘날처럼 법률이 사회 생활의 시시콜콜한 영역까지 규정하고 있는 시대의 독자는 공자와 숙향의 논리를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공자와 숙향의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법률을 간행하는 수단이 청동기의 겉면에 법률을 주조하거나 죽간에 써서 내거는 정도밖에 없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거대한 청동솥이라고는 하지만 그 표면에 적을 수 있는 글자 수는 몇백자나 몇천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정도의 문장 안에 백성의 온갖 행위를 규제할 수 있는 내용을 다 적어넣기란 불가능하다. 그런 까닭에 숙향과 공자는 법률을 공포하는 일에 공포를 느낀 것이다.

숙향의 불안은 당대에 현실로 드러났다. 정나라의 재상 자산이 법률을 공포하자, (지난호에 부자의 주검을 두고 순환논리를 만들어낸 인물로 등장했던) 변자의 시조인 등석이 나서서 이를 마음껏 조롱했다. <여씨춘추·이위>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정나라에는 법조문을 멋대로 내거는 사람이 많았다. 자산이 법조문을 내거는 행위를 금지하자 등석은 법조문을 치밀하게 연구 분석했다. 자산이 다시 법조문을 연구 분석하는 행위를 금하자 등석은 법조문을 곡해했다. 자산의 명령이 무궁할수록 등석의 대응도 무궁했다. 이렇게 해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름과 실질이 서로 원망하는…

이 구절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해석이 명쾌하지 않지만, 등석이 자산의 포고령 글귀를 축자해석하여 그것을 교묘히 피해간 일을 말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결국 등석은 자산이 만든 법률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자산은 정나라를 다스리는 데 온힘을 다 쏟았지만, 등석은 정나라를 어지럽히는 데 온힘을 다 쏟았다. 그는 자산의 형법에 걸려든 백성들에게 큰 죄라면 예복을 한벌 받고, 가벼운 죄의 경우는 바지나 저고리를 한벌 받고 대신 처리해 주었다. 그리하여 백성들 가운데 예복이나 바지저고리를 바치고 송사를 배우려는 사람들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등석은 그른 것을 옳은 것으로, 옳은 것을 그른 것으로 바꾸어 마침내 시비의 기준을 없애버렸으니, 가능한 일과 가능하지 않은 일이 날마다 뒤바뀌었다. 그는 소송에서 이기고자 하면 이겼고 죄를 주고자 하면 죄를 주었다. 정나라는 크게 어지러워져 백성들의 의론이 들끓었다. 자산은 이런 상황을 근심하다 마침내 등석을 사형에 처하여 저잣거리에 내걸었다.”(<呂氏春秋·離謂>)

자산은 중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법을 공포하여 인민을 다스리려 한 인물이고, 등석은 그의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든 변자의 효시이다. <여씨춘추>는 자산이 등석을 잡아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보다 좀더 앞선 문헌인 <좌전>의 경우는 정나라의 사천(駟천)이란 인물이 등석의 죽형(竹刑: 죽간에 쓴 형법)을 채용한 뒤 그를 처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향과 공자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제후국들이 법률을 정비하여 인민에게 공포하는 일은 더욱 잦아졌다. 그에 따라 등석처럼 법망의 허점을 공략하는 무리들도 뒤따라 일어났다. 바야흐로 백가쟁명이 시작된 것이다. 전국시대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관자·주합>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이름과 실질이 서로 원망한 지 오래여서 둘의 관계가 끊어져 사귐이 없다. 지혜로운 사람은 둘 다 지킬 수 없음을 알아서 이 가운데 하나만을 취한다.” 이름과 실질이 ‘서로 원망하는’ 전국시대에는 크게 세 가지 논리체계가 등장한다. 양가론(兩可論), 정명론(正名論), 무명론(無名論)이 그것이다.

lee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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