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주정치 무너지면서 설복의 위력 증대… 부당한 논변 제압하며 사유체계 형성
논쟁이 그리스만의 현상이고 덕쟁이 중국만의 현상이었던 것은 아니다. 최초의 철학자들이 등장하는 서기 전 6세기∼서기 전 5세기 즈음의 그리스나 중국은 똑같이 논쟁으로 들끓고 있었다. 그 즈음에는 두 세계에 모두 전문적으로 논변만을 일삼는 집단이 등장했다. 그리스에서 이들은 ‘소피스트’(Sophist, 지식을 가진 자)라 불렸고, 중국에서는 ‘변자’(辯者, 논변에 뛰어난 자)라 불렸다. 이들은 각각 자신들이 속한 사회에서 논리적 사고의 심화를 촉진시켰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이들은 또 점차 당대 사람들에게 배척당할 운명에 놓여 있었다는 점도 일치한다. 먼저, 그리스와 중국에서 소피스트와 변자에 대한 일반의 시각을 보여주는 두 가지 일화를 읽어보자.
사람을 설득하는 기술의 빛과 그림자
고대 그리스의 변론가 티시아스는 당대의 유명한 변론가인 코락스에게 “사람을 설득시키는 기술”인 논변술을 배웠다. 티시아스는 스승 코락스에게 더이상 배울 게 없어지자 약속한 수업료를 떼어먹기로 작정했다. 결국 이 문제는 소송으로 비화했다. 재판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티시아스는 도리어 코락스에게 이렇게 추궁했다.
“코락스, 당신은 내게 무엇을 가르쳐주겠다고 약속했지요?” “사람을 설득시키는 기술이었지.” “그래요? 만약 당신이 내게 그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면, 내가 당신에게 수업료를 받지 말라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만약 설득이 안 된다면(당신은 그 기술을 내게 제대로 가르쳐준 게 아니니까) 수업료를 지불할 필요가 없겠죠?” 딜레마에 빠진 코락스는 이렇게 반격했다. “수업료를 내지 않겠다는 자네 말에 내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자네는 내게 수업료를 내야겠지? 그러나 만약 내가 한푼도 받지 말라는 자네의 말에 설득당한다면, 자네는 설득에 성공했으니까 내가 변론술을 제대로 가르친 것이고, 따라서 수업료를 내야 하네. 그렇지?” 재판관들은 아무런 판단도 내릴 수 없었다. 고대 그리스에만 이런 변론가들이 있었던 건 아니다. 고대 중국에는 등석(鄧析)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는 공자보다 대략 30년 정도 앞선, 서기 전 6세기경의 인물로, 정(鄭)나라의 대부였다. 그에 관해서는 <여씨춘추·이위(離謂)>편에 나오는 다음의 일화가 유명하다. 정나라에서 부자 한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 어떤 사람이 그의 주검을 건졌다. 그 부자의 유족들이 주검을 사겠다고 나섰는데, 주검을 건진 사람이 너무 많은 돈을 요구했다. 유족들은 등석을 찾아가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등석은 이렇게 말했다. “안심하세요. 그 사람이 그 주검을 대체 누구한테 팔 수 있겠습니까?” 시간이 지나자 주검을 건진 사람이 걱정이 되어 그 또한 등석을 찾아왔다. 등석은 다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안심하세요. 그 사람들이 대체 이 주검을 누구한테서 살 수 있겠습니까?” 이상 그리스와 중국 변론가들에 관한 이야기들은 사실이라기보다는 설화지만, 거기엔 논변술에 관한 당대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그리스의 티시아스와 코락스는 키케로가 논변술의 비조(鼻祖)로 꼽은 인물들이다. 코락스는 서기 전 460년경 <논변술>이라는 교과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논변술이 유행하게 된 것은 참주정치가 무너지면서부터다. 시칠리아섬의 전제군주 겔론과 시라쿠사의 전제군주 히에론이라는 두 참주는 집권기간 동안 몇몇 인민의 재산을 몰수했다. 참주정이 무너진 뒤 이 두 독재자는 전두환 노태우 양씨처럼 법정에 섰다. 당시에는 변호사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땅과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은 판관들을 설복시키기 위해 스스로 논리를 구성해야 했다. 이후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논변술은 오늘날의 구구단만큼이나 중요한 생존의 수단으로 변해갔다. 법정에서의 강변은 치명적 결과 낳기도 아고라 민회의 직접민주주의는 ‘시코판타이’라 불리는 ‘전문 소송꾼’들을 부산물로 만들어냈다. 이들은 좋게 말하자면 좀도둑이나 문제가 있는 공직자를 고발하는 신고정신이 투철한 시민들이었지만, 그 중에는 소 취하나 침묵의 대가로 돈을 뜯어내는 파렴치범도 섞여 있게 마련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논변술을 호신술처럼 몸에 붙이고 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재판을 상기하면 당시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서기 전 399년, “젊은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고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테네 법정에 기소당했다. 그는 500명의 재판관(배심원)과 방청 시민들을 두고 연설함으로써 자신을 변호해야 했다. 표결 결과 그는 근소한 표차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형량을 결정할 때는 소크라테스의 강경한 태도가 시민들의 반감을 사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원고의 주장이 많은 표차로 가결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논변술은 이처럼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하나의 생존수단이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몸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말로써 자기를 지킬 수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이는 불합리하다. 말을 사용하는 것이 몸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고유한 인간의 특성이기 때문이다”(<수사학>)라고 말한다. 그러나 논변술은 도시국가의 정규교육에서는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시민들은 변론가들에게 사숙해서 논변술을 배워야 했다. 변론가들은 오늘날의 고액 과외선생들만큼이나 고소득을 올렸다.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전해오는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히피아스, 프로디코스 등은 고대 그리스의 저명한 논변술 과외선생들이었다. 플라톤의 대화편 <히피아스>에 따르면, 갑부 소피스트인 히피아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자신이 얼마나 많은 돈을 긁어모았는지 자랑한다. “내가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는지 안다면 놀랄 거요.… 난 순식간에 시칠리아에서 150미나를 벌었고, 더구나 그 중 20미나는 달동네인 이니코스에서 벌었소.” 부자동네고 달동네고 할 것 없이 모든 그리스인들이 논변술에 목숨걸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소피스트’라 불린 이 과외선생들은 오늘날 흔히 ‘궤변론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이 궤변만을 일삼은 건 아니었다. 이들은 오늘날의 고액 과외선생들 이상으로 열심히 자료를 찾고 논리와 수사학과 웅변술을 연구했다. 이들은 즉흥적으로 어떤 질문이든 받아넘기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쳤다. 고르기아스는 “몇년 전부터 내 입을 막을 만한 질문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그리스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궤변만 일삼는 이들에게 고액 과외비를 떠안겼을 리는 없다. 의사와 변론가, 누가 진정한 의사인가 그리스 시민들은 과외선생들의 지도에 따라 거울 앞에 서서 발음 교정을 하기도 하고, 연설 도중 과도한 몸짓으로 품위가 손상되지 않도록 연습하기도 했다. 그러나 논변술이란 하나의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논쟁에서 언제나 정의가 승리하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옳은 주장을 펴도 상대의 논변술에 휘말려 소송에서 패배하는 일도 없지 않았다. 플라톤의 대화편 <고르기아스>에서 고르기아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의사들과 함께 약을 안 먹으려는 환자들을 찾아간 적이 몇번 있었다. 그들은 의사가 아무리 간청을 해도 약을 먹지 않았지만, 내 웅변을 듣고는 약을 먹었다.… 의사와 변론가를 군중 앞에 두고 누가 의사인지 찾아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변론가를 의사라고 꼽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부당한 논변을 통해 불의가 승리하는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논리학을 발달시켰다. 그 막중한 일을 완성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인이었다. 그는 추론의 기본적인 형식, 삼단논법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분석해낸 사람이자, 논리학을 독립된 분과 학문으로 성립시킨 사람이다. 그리스의 논쟁에서 최종 승자는 형식논리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형식논리학은 이후 이름을 달리하는 숱한 학파와 사상을 뛰어넘어 서양의 사유를 규정하는 기본틀로 작용했다. 그렇다면 고대 중국에서 벌어졌던 논쟁은 어떻게 귀결되었는가. leess@hani.co.kr

“코락스, 당신은 내게 무엇을 가르쳐주겠다고 약속했지요?” “사람을 설득시키는 기술이었지.” “그래요? 만약 당신이 내게 그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면, 내가 당신에게 수업료를 받지 말라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만약 설득이 안 된다면(당신은 그 기술을 내게 제대로 가르쳐준 게 아니니까) 수업료를 지불할 필요가 없겠죠?” 딜레마에 빠진 코락스는 이렇게 반격했다. “수업료를 내지 않겠다는 자네 말에 내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자네는 내게 수업료를 내야겠지? 그러나 만약 내가 한푼도 받지 말라는 자네의 말에 설득당한다면, 자네는 설득에 성공했으니까 내가 변론술을 제대로 가르친 것이고, 따라서 수업료를 내야 하네. 그렇지?” 재판관들은 아무런 판단도 내릴 수 없었다. 고대 그리스에만 이런 변론가들이 있었던 건 아니다. 고대 중국에는 등석(鄧析)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는 공자보다 대략 30년 정도 앞선, 서기 전 6세기경의 인물로, 정(鄭)나라의 대부였다. 그에 관해서는 <여씨춘추·이위(離謂)>편에 나오는 다음의 일화가 유명하다. 정나라에서 부자 한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 어떤 사람이 그의 주검을 건졌다. 그 부자의 유족들이 주검을 사겠다고 나섰는데, 주검을 건진 사람이 너무 많은 돈을 요구했다. 유족들은 등석을 찾아가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등석은 이렇게 말했다. “안심하세요. 그 사람이 그 주검을 대체 누구한테 팔 수 있겠습니까?” 시간이 지나자 주검을 건진 사람이 걱정이 되어 그 또한 등석을 찾아왔다. 등석은 다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안심하세요. 그 사람들이 대체 이 주검을 누구한테서 살 수 있겠습니까?” 이상 그리스와 중국 변론가들에 관한 이야기들은 사실이라기보다는 설화지만, 거기엔 논변술에 관한 당대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그리스의 티시아스와 코락스는 키케로가 논변술의 비조(鼻祖)로 꼽은 인물들이다. 코락스는 서기 전 460년경 <논변술>이라는 교과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논변술이 유행하게 된 것은 참주정치가 무너지면서부터다. 시칠리아섬의 전제군주 겔론과 시라쿠사의 전제군주 히에론이라는 두 참주는 집권기간 동안 몇몇 인민의 재산을 몰수했다. 참주정이 무너진 뒤 이 두 독재자는 전두환 노태우 양씨처럼 법정에 섰다. 당시에는 변호사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땅과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은 판관들을 설복시키기 위해 스스로 논리를 구성해야 했다. 이후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논변술은 오늘날의 구구단만큼이나 중요한 생존의 수단으로 변해갔다. 법정에서의 강변은 치명적 결과 낳기도 아고라 민회의 직접민주주의는 ‘시코판타이’라 불리는 ‘전문 소송꾼’들을 부산물로 만들어냈다. 이들은 좋게 말하자면 좀도둑이나 문제가 있는 공직자를 고발하는 신고정신이 투철한 시민들이었지만, 그 중에는 소 취하나 침묵의 대가로 돈을 뜯어내는 파렴치범도 섞여 있게 마련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논변술을 호신술처럼 몸에 붙이고 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재판을 상기하면 당시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서기 전 399년, “젊은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고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테네 법정에 기소당했다. 그는 500명의 재판관(배심원)과 방청 시민들을 두고 연설함으로써 자신을 변호해야 했다. 표결 결과 그는 근소한 표차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형량을 결정할 때는 소크라테스의 강경한 태도가 시민들의 반감을 사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원고의 주장이 많은 표차로 가결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논변술은 이처럼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하나의 생존수단이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몸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말로써 자기를 지킬 수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이는 불합리하다. 말을 사용하는 것이 몸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고유한 인간의 특성이기 때문이다”(<수사학>)라고 말한다. 그러나 논변술은 도시국가의 정규교육에서는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시민들은 변론가들에게 사숙해서 논변술을 배워야 했다. 변론가들은 오늘날의 고액 과외선생들만큼이나 고소득을 올렸다.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전해오는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히피아스, 프로디코스 등은 고대 그리스의 저명한 논변술 과외선생들이었다. 플라톤의 대화편 <히피아스>에 따르면, 갑부 소피스트인 히피아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자신이 얼마나 많은 돈을 긁어모았는지 자랑한다. “내가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는지 안다면 놀랄 거요.… 난 순식간에 시칠리아에서 150미나를 벌었고, 더구나 그 중 20미나는 달동네인 이니코스에서 벌었소.” 부자동네고 달동네고 할 것 없이 모든 그리스인들이 논변술에 목숨걸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소피스트’라 불린 이 과외선생들은 오늘날 흔히 ‘궤변론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이 궤변만을 일삼은 건 아니었다. 이들은 오늘날의 고액 과외선생들 이상으로 열심히 자료를 찾고 논리와 수사학과 웅변술을 연구했다. 이들은 즉흥적으로 어떤 질문이든 받아넘기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쳤다. 고르기아스는 “몇년 전부터 내 입을 막을 만한 질문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그리스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궤변만 일삼는 이들에게 고액 과외비를 떠안겼을 리는 없다. 의사와 변론가, 누가 진정한 의사인가 그리스 시민들은 과외선생들의 지도에 따라 거울 앞에 서서 발음 교정을 하기도 하고, 연설 도중 과도한 몸짓으로 품위가 손상되지 않도록 연습하기도 했다. 그러나 논변술이란 하나의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논쟁에서 언제나 정의가 승리하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옳은 주장을 펴도 상대의 논변술에 휘말려 소송에서 패배하는 일도 없지 않았다. 플라톤의 대화편 <고르기아스>에서 고르기아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의사들과 함께 약을 안 먹으려는 환자들을 찾아간 적이 몇번 있었다. 그들은 의사가 아무리 간청을 해도 약을 먹지 않았지만, 내 웅변을 듣고는 약을 먹었다.… 의사와 변론가를 군중 앞에 두고 누가 의사인지 찾아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변론가를 의사라고 꼽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부당한 논변을 통해 불의가 승리하는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논리학을 발달시켰다. 그 막중한 일을 완성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인이었다. 그는 추론의 기본적인 형식, 삼단논법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분석해낸 사람이자, 논리학을 독립된 분과 학문으로 성립시킨 사람이다. 그리스의 논쟁에서 최종 승자는 형식논리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형식논리학은 이후 이름을 달리하는 숱한 학파와 사상을 뛰어넘어 서양의 사유를 규정하는 기본틀로 작용했다. 그렇다면 고대 중국에서 벌어졌던 논쟁은 어떻게 귀결되었는가. leess@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