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지식의 힘으로 우주를 읽는다?

328
등록 : 2000-10-04 00:00 수정 :

크게 작게

앎의 세계 넓어져도 미지의 영역은 온존… 완전한 깨달음을 둘러싼 세계관의 차이

영국의 민담 가운데 “성탄절 자정이 되면 마구간의 동물들이 모두 경건하게 무릎을 꿇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말일까? 성탄절 자정에 마구간에 가보면 곧바로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러나 이 민담은 믿음이 옅은 인간들의 성소 침범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장치도 포함하고 있다. “이 민담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마구간에 가는 자는 누구든지 그 날 해가 저물기 전에 죽는다.”

“알면 다친다”는 식의 보호장치는 신화와 민담의 주인공들이 즐겨 빌려쓰는 구조이다. 그것은 멀리는 에덴동산에 “먹으면 죽는” 선악과를 심어놓은 야웨 하느님에서부터, 가까이는 “마음 나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옷을 임금님에게 지어준 안데르센의 간 큰 재단사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익히 보아온 “깨지기 위한 터부”이다.

궁극의 답을 얻었다는 ‘과학의 종말’


어떤 경우엔 “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이 “하라”는 강제보다 더 효과적으로 인간을 부추기는 법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선물한 데 대한 보복으로 제우스가 최초의 ‘여자 인간’(그때까지 인간은 모두 남자였다) 판도라를 프로메테우스 형제에게 내려보낼 때, 그는 판도라가 그 문제의 상자를 반드시 열어보리라고 확신하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이야 ‘호기심 천국’ 따위에서 어떤 호기심이든 마음껏 해결할 수 있는 개명천지이지만, 시절을 만나지 못한 이브는 장딴지 가려움증보다도 참을 수 없는 호기심 때문에 낙원에서 영영 추방당하는 절체절명의 봉변을 당했고 판도라는 세세토록 요부(妖婦)의 상징으로 불리는 오명을 얻었다.

서양 문화의 두 자양분인 그리스 신화와 히브리 신화에 한편으론 인간의 지식욕을 억누르면서 한편으론 그것을 부추기는 모티브가 똑같이 나온다는 점은 흥미롭다. 금기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 불온한 호기심에 추동되어 발전해온 오늘날의 자연과학은 이제 “과학의 종말”을 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때의 종말은 ‘파국’이란 뜻이 아니라, ‘완성’이라는 의미다. 가령 영국의 물리학자 로저 펜로즈 같은 이는 머잖아 과학이 어떤 “궁극의 답”을 찾을 것이라고 말한다.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케임브리지대학 교수 취임 연설에서 “이론 물리학의 목표가 멀지 않은 미래, 다시 말해 금세기(20세기) 말쯤 달성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과학의 종말”이란 이런 의미에서의 종말이다. 다시 말해, 머잖아 인간이 우주에 대해 완벽한 이해에 도달할 것이라는 뜻이다.

아인슈타인은 “신이 우주를 만들어낼 때 얼마나 많은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까?”라고 물은 적이 있다.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신이 우주를 이렇게 돌아가게 만들어놓기 위해서는 별과 별들 사이의 중력, 전기와 원자핵 사이에 작용하는 힘 따위를 고도의 균형상태로 만들어놓아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의 우주보다 질량이 더 컸다면 우주는 진작에 중력 붕괴를 일으켜 떡반죽이 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지금의 우주보다 질량을 작게 만들었다면 물질이 뭉쳐지지 않고 멀리멀리 퍼져나가 별이나 은하계가 만들어지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호킹은 “이론 물리학의 목표에 도달할 때” 인간이 “‘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인간이 우주에 대해 완벽한 이해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플라톤까지 거슬러올라간다. 서양철학 개론서 어디에나 나오듯, 플라톤은 ‘견해’(doxa)와 ‘지식’(episteme)을 구별했다. 견해란 보편적 이데아에 미치지 못하는, 보편적 이데아의 복사본에 지나지 않는 현상계에 관한 생각으로, ‘억측’이나 ‘신념’이 여기 해당한다. 반면에 유일하게 참된 앎이라고 할 수 있는 ‘지식’은 반드시 보편적 이데아와 연관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가 이해하는 우주는 기하학적으로 파악이 가능한 우주이다. “과학의 종말”을 말하는 로저 펜로즈는 자타가 공인하는 플라톤주의자이다.

“이제 더이상 이론 과학자가 할 일이 없어질 것”이란 놀라운 발언을 들으며 우린 “인간 승리”를 기뻐해야 하는가, 아니면 이들의 “천부적인 오만”을 비난해야 하는가. 이는 겸손·불손의 문제라기보다 사실은 세계관의 문제이다.

지구의 공전 시간 측정마저도 불가능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인간의 지식은 온전하지 않다. 어떤 사람도 온전한 지식에 이를 수는 없다. 어떤 분야에서 지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의 입에서 우리는 오히려 인간이 쌓아올린 지식의 불완전함에 대한 고백을 듣는 경우가 종종 있다. 피의 순환 현상을 발견한 17세기 과학자 윌리엄 하비는 자신의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알려지지 않은 모든 것들에 비하면 아직도 무한히 적다.”

우리는 흔히 역사적으로 인간의 지식이 점점 확대되어 미지(未知)의 영역을 점점 줄여왔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지식의 확대는 곧 미지 세계의 축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식의 확대는 늘 새로운 미지 세계를 낳는다. 가령 원자의 발견은 원자보다 작은 세계에 대한 미지를 낳고, 쿼크의 발견은 그 즉시 쿼크의 궤적 이외의 존재 방식에 대한 미지의 영역을 낳는다. 그래서 파스칼은 “지식의 성장은 공간에서 부풀어오르는 공과도 같다”고 했다. 우리는 공(지식)이 부풀어올라 커지는 것만 보고 있지만, 공(지식)이 커지면 커질수록 공의 바깥과 접촉하는 표면적은 기하급수적으로 넓어진다.

인간은 오늘날 우주의 비밀을 낱낱이 알게 되었다고 호언하지만, 사실은 우주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관측조차 확정하기 어렵다. 가령 지구가 한번 공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얼마인지 확정하는 일도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지구가 공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365.2564…일이라고 알려져 있다. 서기 2000년의 경우, 이를 춘분점을 기준으로 잡아 다음해 춘분점까지를 측정하면 365.24219일이 걸리고, 하지와 하지 사이를 측정하면 365.24162일 걸리며, 추분을 기준으로 삼으면 365.24201일, 동지를 기준으로 하면 365.24274일 걸린다. 한해 동안에도 지구의 공전 속도가 일정하지 않고, 그것도 매년 조금씩 편차를 보이기 때문이다.

1초라는 시간의 기본단위조차 확정하기 어렵다. 1972년부터 원자시계를 표준시로 삼아 세슘 원자의 진동수 91억9263만1770을 1초로 하고 있지만, 지구의 공전 속도가 일정하지 않아 매년 몇초씩을 더해야 오차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니, 세슘 원자의 진동수로 계산한 값이 1년인가, 아니면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돈 시간이 1년인가?

우주까지 눈을 돌리기 전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내 몸은 내 몸이기 이전에 우주의 일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 몸은 음식물을 소화시키고 배탈을 일으키고 음식물을 거부하거나 배설한다.

<중용>(中庸)에는 “성실함이란 만물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성실하지 아니하면 어떤 것도 존재하지 못한다”(誠者 物之終始 不誠無物)는 준엄한 구절이 나온다. 나처럼 성실하지 않고 불규칙하게 사는 사람은 그렇다면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내가 아직 숨을 쉬고 있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우주, 내 안에 있는 자연이 성실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안에 우주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우주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누가 우주를 온전히 이해했다 말하는가

우리는 우주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자기 자신조차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주와 인간세상에는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엄청난 양의 지식이 존재한다.

그래서 서기 전 3세기 때 사람인 장주(莊周) 할아버지는 이미 “우리의 삶이란 유한한데, 앎의 세계는 무한하다. 유한한 것으로 무한한 것을 좇으면 위태롭다”(吾生也有涯 而知也无涯 以有涯隨无涯 殆已)고 말했다. 왜 이 사람은 지식을 추구하는 일을 위태롭다고 보았을까.

서양에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The Truth will set you free. <요한복음> 8장 32절)고 말한다. 그러나 장자는 “덕이 장차 너를 아름답게 하리라”(德將爲汝美)라고 말한다. 이 두 마디의 말에서 동양과 서양 사람들이 품어온 생각의 차이가 드러난다.

leess@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