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주의에 바탕한 배타적 종교사상… 의심·회의 통해야 진정한 보편으로 거듭나
한 가지 신조를 굳게 지키는 대신 회의에 빠지기 일쑤인 사람을 세상 사람들은 ‘우유부단하다’고 폄하한다. 반면에 평생 자기 신념을 굳게 지키며 산 사람은 ‘지조있다’는 칭찬을 듣는다. 세상 사람들은 ‘의심’보다 ‘믿음’이, ‘회의’보다 ‘신념’이 더 값진 가치라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지금 믿음보다 의심이, 신념보다 회의가 좀더 필요한 듯하다.
요즘도 드물지 않게 지하철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 따위의 글귀가 쓰인 어깨띠를 두르고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은 지옥불에 떨어져 이를 갈며 슬피 울 날이 올 것”이란 살벌한 저주의 말을 불특정다수에게 외치는 이들을 만난다. 그들의 ‘포교의 자유’는 존중해야겠지만, 그런 행위가 정당하지 않다는 점 또한 분명히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그건 온당한 포교행위라기보다 포교 대상에게 불쾌감을 주는 일종의 ‘협박’이기 때문이다.
유년기에 경험한 부당한 강박들
나는 개인적으로 어릴 때부터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나 종교적으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심약한 사람인 까닭에 ‘지옥’에 떨어진다는 강박에서 자유로워진 건 대학에 들어가서도 한참 지나서였다. “종교는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기독교의 ‘지옥’에 대한 강박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 지금도 나는 종합적 판단 능력이 결여된 어린 시절에 그런 부당한 강박을 일방적으로 강요당했던 점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 그리고 지금도 숱한 어린 영혼들이 방방곡곡 붉은 네온 십자가 아래서 “영원한 지옥불”에 관한 기괴한 협박을 들으며 영혼에 상처입을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런 점에서 나는 미성년자에게 종교적 선전을 금하고 있는 중국의 정책이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이웃 사랑”에 있지, “예수를 믿으면 죽어서 천당 가고 안 믿으면 죽어서 지옥 간다”는 데 있지는 않는 것 같다. 도대체 모든 피조물을 초월한 존재라는 신이 자기를 믿으면 영원한 천당에 보내고 믿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에 보내는 유아 수준의 게임을 즐긴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는다. 만약 신이 있더라도 그런 전제적인 방식으로 자기 피조물을 학대하는 사디스트는 아닐 것이다. 이런 주장이 신성 모독이나 종교의 자유를 해치는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란다. 종교의 자유란 말에는 종교를 가질 자유는 물론 종교를 가지지 않을 자유도 포함된다. 포교의 자유가 있다면 종교를 비판할 자유도 있어야 마땅하다. 종교의 자유는 종교를 가지지 않을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누리는 게 온당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사실상 종교를 반대할 자유가 없다. 특정 종교의 ‘교리’는커녕 ‘비리’를 비판하더라도 신도들이 몰려와 언론사의 기물을 부수거나 물리적 실력행사로 입을 막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언론사가 가장 조심스럽게 다루는 문제는 바로 종교집단과 관련한 기사다. 종교의 자유와 포교의 자유는 분명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와 똑같이 종교에 반대할 자유와 포교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종교적 협박을 듣지 않을 자유도 존중되어야 한다. 기독교를 예로 든 점이 불만스러울 종교인이 있겠지만, 한국 기독교는 지금부터 논의하려는 ‘보편주의’의 가장 부정적인 사례다. 먼저 ‘보편주의’란 용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겠다. 나는 이 낱말을 부정적인 뜻빛깔로 쓴다. 그것은 ‘권위주의’란 낱말의 어법과 같다. ‘권위’는 인정해야 마땅하지만, ‘권위주의’는 문제가 있다. 인위적이고 억압적이고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보편’적인 논리가 있을 수 있음은 인정해야 마땅하겠지만, ‘보편주의’에는 찬성할 수 없다. 그것은 똑같이 인위적이고 억압적이고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야만적 폭력이 보편성의 모습인가 기독교는 ‘보편주의’의 폐단을 보여주는 본보기다. <구약성서>를 읽어보면 야웨가 유대라는 겨레의 종족신이었음을 누구라도 알 수 있다. 그는 단군신화에 나오는 ‘환인’(桓因)이나 고대 중국의 ‘상제’(上帝)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특정 겨레의 특정한 신앙 대상이었다. 예수라는 이가 벌인 운동 또한 유대교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민족적 종교개혁 운동의 하나였다. 그는 유대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고 오로지 유대인들을 청중으로 삼아 자신의 비전을 폈다. 그의 가르침을 모든 인류에 적용되는 것으로 확대 해석한 이는 잘 알려진 바대로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이다. 유감스럽지만, 기독교의 뿌리인 유대교는 결코 보편적인 종교사상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편협한 종족신앙이다. 그것도 “유일신인 야웨가 유대민족만을 선택했다”는 ‘선민사상’ 시오니즘)을 뼈대로 삼고 있는 최악의 자민족 중심적인 신앙이다. 더욱 유감스러운 일은 인류 보편종교임을 내세우는 기독교가 유대교의 뿌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유대교에서는 경전이라기보다 ‘역사책’으로 다뤄지는 모세오경 등 구약을 ‘경전’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가장 유감스런 일은, 기독교 안에 남아 있는 유대교의 흔적인 유일신 신앙으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가장 배타적인 종교가 되었다는 점이다. 인간의 역사에 등장했던 보편주의는 사실은 지역주의적인 신념체계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지역주의에 뿌리를 둔 논리가 보편성을 주장할 때, 그것은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무서운 폭력으로 돌변한다. 십자군전쟁, 종교전쟁, 마녀재판 따위는 모두 자기 신앙만이 보편적이라는 신념이 역사에 남긴 핏자국이다. 만약 그때 진격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자리에 있던 이들이 자기 신앙에 대해 한번이라도 회의를 해보았다면, 그 시대에 가장 합리적인 지성들을 산채로 불에 태워 죽이는 끔찍한 잔혹극까지 연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는 신념과 맹신보다는 의심과 회의에 흔들리는 영혼이 차라리 위험하지 않음을 가르쳐준다. 자기의 정당성을 추호도 믿어 의심치 않는 강철같은 정신에서는 관용의 미덕이 나오기 어렵다. 자신의 신념조차도 의심과 회의의 대상으로 삼을 때, 독단의 헛된 꿈에서 벗어나 자신이 이해하기 어렵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신념조차 존중의 대상으로 삼는 너그러움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신앙체계도 사실은 지역주의에서 출발해 보편성을 주장해 갔다는 점에서는 같다. 가령 불교도 그렇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가르침은 보편성을 띠는 내용도 있지만, 고대 인도인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윤회’라는 관념이 대표적이다. 인도인에게 ‘윤회’란 관념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황불 지옥’만큼이나 위협적인 저주였지만, 중국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할 만큼 지극히 현세적인 중국인들에게는 윤회를 되풀이한다는 말이 저주로 들리는 대신 축복으로 들렸을 것이다. 불교가 그토록 쉽게 중국 전역으로 퍼져갈 수 있었던 원인을 짓궂게도 이런 문화적 오독(誤讀)에서 찾는 연구자도 있다. 지금까지 등장한 인류의 모든 사유는 지역주의의 뿌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예수나 싯다르타, 공자의 가르침 가운데 어떤 것도 예외는 아니다. 모든 ‘보편주의’ 논리는 지역주의의 배경을 뒤에 숨기고 있다. 너그럽거나 둔감한 우리 인간이 그것을 눈감아주었을 뿐이다. 보편주의의 폐단이 숨겨져 있다 요즘 유행하는 ‘지구화’ 논의나 ‘영어공용어화론’에 찬성하지 않는 까닭도 이런 데 있다. 두 논리는 모두 ‘보편주의’의 폐단을 그대로 안고 있기 때문이다. 보편은 자기 논리가 보편적이라는 신념보다는, 과연 이런 논리와 판단이 보편적이겠느냐는 의심과 회의를 통해서 더디게 자기 모습을 드러내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류의 지성이 아무리 발달을 거듭한다 해도 자기 모습을 온전히 다 드러내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달을 직접 그리는 대신 구름을 칠해 달을 드러내는 ‘홍운탁월’(烘雲托月)의 붓놀림처럼, 이런 종교도 저런 사상도 유일하게 배타적인 보편 논리가 아니라고 부정해가는 과정에서 그 윤곽을 더듬어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고대 중국의 노자(老子) 할아버지가 “길을 길이라 하면 늘 그러한 길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leess@hani.co.kr

나는 개인적으로 어릴 때부터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나 종교적으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심약한 사람인 까닭에 ‘지옥’에 떨어진다는 강박에서 자유로워진 건 대학에 들어가서도 한참 지나서였다. “종교는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기독교의 ‘지옥’에 대한 강박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 지금도 나는 종합적 판단 능력이 결여된 어린 시절에 그런 부당한 강박을 일방적으로 강요당했던 점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 그리고 지금도 숱한 어린 영혼들이 방방곡곡 붉은 네온 십자가 아래서 “영원한 지옥불”에 관한 기괴한 협박을 들으며 영혼에 상처입을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런 점에서 나는 미성년자에게 종교적 선전을 금하고 있는 중국의 정책이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이웃 사랑”에 있지, “예수를 믿으면 죽어서 천당 가고 안 믿으면 죽어서 지옥 간다”는 데 있지는 않는 것 같다. 도대체 모든 피조물을 초월한 존재라는 신이 자기를 믿으면 영원한 천당에 보내고 믿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에 보내는 유아 수준의 게임을 즐긴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는다. 만약 신이 있더라도 그런 전제적인 방식으로 자기 피조물을 학대하는 사디스트는 아닐 것이다. 이런 주장이 신성 모독이나 종교의 자유를 해치는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란다. 종교의 자유란 말에는 종교를 가질 자유는 물론 종교를 가지지 않을 자유도 포함된다. 포교의 자유가 있다면 종교를 비판할 자유도 있어야 마땅하다. 종교의 자유는 종교를 가지지 않을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누리는 게 온당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사실상 종교를 반대할 자유가 없다. 특정 종교의 ‘교리’는커녕 ‘비리’를 비판하더라도 신도들이 몰려와 언론사의 기물을 부수거나 물리적 실력행사로 입을 막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언론사가 가장 조심스럽게 다루는 문제는 바로 종교집단과 관련한 기사다. 종교의 자유와 포교의 자유는 분명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와 똑같이 종교에 반대할 자유와 포교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종교적 협박을 듣지 않을 자유도 존중되어야 한다. 기독교를 예로 든 점이 불만스러울 종교인이 있겠지만, 한국 기독교는 지금부터 논의하려는 ‘보편주의’의 가장 부정적인 사례다. 먼저 ‘보편주의’란 용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겠다. 나는 이 낱말을 부정적인 뜻빛깔로 쓴다. 그것은 ‘권위주의’란 낱말의 어법과 같다. ‘권위’는 인정해야 마땅하지만, ‘권위주의’는 문제가 있다. 인위적이고 억압적이고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보편’적인 논리가 있을 수 있음은 인정해야 마땅하겠지만, ‘보편주의’에는 찬성할 수 없다. 그것은 똑같이 인위적이고 억압적이고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야만적 폭력이 보편성의 모습인가 기독교는 ‘보편주의’의 폐단을 보여주는 본보기다. <구약성서>를 읽어보면 야웨가 유대라는 겨레의 종족신이었음을 누구라도 알 수 있다. 그는 단군신화에 나오는 ‘환인’(桓因)이나 고대 중국의 ‘상제’(上帝)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특정 겨레의 특정한 신앙 대상이었다. 예수라는 이가 벌인 운동 또한 유대교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민족적 종교개혁 운동의 하나였다. 그는 유대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고 오로지 유대인들을 청중으로 삼아 자신의 비전을 폈다. 그의 가르침을 모든 인류에 적용되는 것으로 확대 해석한 이는 잘 알려진 바대로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이다. 유감스럽지만, 기독교의 뿌리인 유대교는 결코 보편적인 종교사상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편협한 종족신앙이다. 그것도 “유일신인 야웨가 유대민족만을 선택했다”는 ‘선민사상’ 시오니즘)을 뼈대로 삼고 있는 최악의 자민족 중심적인 신앙이다. 더욱 유감스러운 일은 인류 보편종교임을 내세우는 기독교가 유대교의 뿌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유대교에서는 경전이라기보다 ‘역사책’으로 다뤄지는 모세오경 등 구약을 ‘경전’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가장 유감스런 일은, 기독교 안에 남아 있는 유대교의 흔적인 유일신 신앙으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가장 배타적인 종교가 되었다는 점이다. 인간의 역사에 등장했던 보편주의는 사실은 지역주의적인 신념체계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지역주의에 뿌리를 둔 논리가 보편성을 주장할 때, 그것은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무서운 폭력으로 돌변한다. 십자군전쟁, 종교전쟁, 마녀재판 따위는 모두 자기 신앙만이 보편적이라는 신념이 역사에 남긴 핏자국이다. 만약 그때 진격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자리에 있던 이들이 자기 신앙에 대해 한번이라도 회의를 해보았다면, 그 시대에 가장 합리적인 지성들을 산채로 불에 태워 죽이는 끔찍한 잔혹극까지 연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는 신념과 맹신보다는 의심과 회의에 흔들리는 영혼이 차라리 위험하지 않음을 가르쳐준다. 자기의 정당성을 추호도 믿어 의심치 않는 강철같은 정신에서는 관용의 미덕이 나오기 어렵다. 자신의 신념조차도 의심과 회의의 대상으로 삼을 때, 독단의 헛된 꿈에서 벗어나 자신이 이해하기 어렵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신념조차 존중의 대상으로 삼는 너그러움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신앙체계도 사실은 지역주의에서 출발해 보편성을 주장해 갔다는 점에서는 같다. 가령 불교도 그렇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가르침은 보편성을 띠는 내용도 있지만, 고대 인도인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윤회’라는 관념이 대표적이다. 인도인에게 ‘윤회’란 관념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황불 지옥’만큼이나 위협적인 저주였지만, 중국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할 만큼 지극히 현세적인 중국인들에게는 윤회를 되풀이한다는 말이 저주로 들리는 대신 축복으로 들렸을 것이다. 불교가 그토록 쉽게 중국 전역으로 퍼져갈 수 있었던 원인을 짓궂게도 이런 문화적 오독(誤讀)에서 찾는 연구자도 있다. 지금까지 등장한 인류의 모든 사유는 지역주의의 뿌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예수나 싯다르타, 공자의 가르침 가운데 어떤 것도 예외는 아니다. 모든 ‘보편주의’ 논리는 지역주의의 배경을 뒤에 숨기고 있다. 너그럽거나 둔감한 우리 인간이 그것을 눈감아주었을 뿐이다. 보편주의의 폐단이 숨겨져 있다 요즘 유행하는 ‘지구화’ 논의나 ‘영어공용어화론’에 찬성하지 않는 까닭도 이런 데 있다. 두 논리는 모두 ‘보편주의’의 폐단을 그대로 안고 있기 때문이다. 보편은 자기 논리가 보편적이라는 신념보다는, 과연 이런 논리와 판단이 보편적이겠느냐는 의심과 회의를 통해서 더디게 자기 모습을 드러내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류의 지성이 아무리 발달을 거듭한다 해도 자기 모습을 온전히 다 드러내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달을 직접 그리는 대신 구름을 칠해 달을 드러내는 ‘홍운탁월’(烘雲托月)의 붓놀림처럼, 이런 종교도 저런 사상도 유일하게 배타적인 보편 논리가 아니라고 부정해가는 과정에서 그 윤곽을 더듬어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고대 중국의 노자(老子) 할아버지가 “길을 길이라 하면 늘 그러한 길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leess@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