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의 철학카페 37 ㅣ 해프닝 예술
우연성·일회성·관객 참여 등으로 전통 미학의 전제를 해체해버린 해프닝 예술
추상표현주의는 초월에의 이상과 내면적 성찰을 기조로 한다. 뉴먼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추상표현주의는 숭고미를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또 폴록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개인의 내면과 성찰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이 점에서 추상표현주의는 주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예술의 최후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개방된 예술, 시간 속의 예술
이후의 미술이 보여주는 성격의 한 측면을 우리는 객관성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객관성이란 주관적인 요소를 추상해내고 사물 자체의 법칙성을 찾는 과학적 객관성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개인의 내면보다는 한 개인으로서는 통제할 수 없는, 개인의 기회이나 ‘의도’만으로는 성립하지 않는 어떤 과정, 우연이 개입되어 흘러가는 객관적인 과정을 뜻한다. 바우하우스에서의 좋은 강의로 명성이 높았던 모홀리나기는 ‘키네틱 아트’를 선보였다. 오늘날 길거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키네틱 아트는 말 그대로 움직이는 예술이다. 기술적 장치들을 써서 만드는 이 유형의 작품들은 일단 공간적으로 고정되면 불변의 동일성을 가지며 미술관 한구석에 엄숙하게 배치되는 전통 미술품들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들은 바람이 불면 움직이고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에서 시간을 필수요소로 내포한다. 즉 미술품은 자체 완결적이고 내적인 동일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로 개방되어 있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해가는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의 공원 조성에서도 이런 사유의 영향이 나타나는데, 이런 공원들은 20∼3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더 풍부한 형태로 완성되어 간다. 키네틱 아트는 예술사적 의미에서의 객관성과 작품의 현실성을 확보했다. 작품은 저 멀리 떨어져서 관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들어와 흔들리고 영향을 끼치는 현실적 존재가 된 것이다. 그것은 작가 개인의 내면이나 의도에서 시작되긴 하지만 시간 속에서 그 의미를 변형시켜 나간다. 예술에 대한 이런 새로운 개념은 해프닝 예술에서 활짝 꽃피게 된다. 현장에 참여한 모든 이의 작품
존 케이지의 혁명적 사유에서 출발한 해프닝 예술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적 개념들 가운데 하나인 ‘혼성’을 잘 보여준다. 해프닝은 여러 장치들로 구성된다. 그 장치들은 기존의 장르- 미술·음악·연극·문학·무용 등- 의 어느 한 가지에 속하는 것도 아니고, 또 그것들을 모두 합쳐놓은 것도 아니다. 해프닝 장치들은 기존의 범주화에 쉽게 굴복하지 않는 새로운 개념들과 행위들을 창출해낸다. 즉 그것들은 기존의 장르에 포섭되지 않았던 ‘잉여성’의 영역에 주목하는 것이다. 특히 해프닝은 어떤 방식으로든 공연이라는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새로운 형태의 연극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해프닝은 연극이 요구하는 서사구조를 내포하지는 않기에 결코 확대된 연극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할 수도 없다.
해프닝이 가져온 핵심적인 미학적 성과는 예술에 우연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전통 예술은 한 예술가의 미학적 정치성과 신중한 의도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작품은 그 의도의 ‘구현’이며, 관객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그 의도와 작품의 동일성에 해가 되지 않도록 보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프닝은 작품을 우연에 맡김으로써 전통 미학의 전제들을 해체해버렸으며 작가의 인칭성(人稱性)을 파기했다.
물론 해프닝은 의도에서 출발한다. 해프닝 역시 일정한 기획과 미리 예상되는 프로세스, 그리고 일정한 효과를 둔 장치들로 구성된다. 때문에 케이지는 해프닝적인 음악 작품들을 만들면서 그것을 ‘합목적적인 무목적성’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했다. 해프닝은 작가의 합목적성에서 출발하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합목적성은 해체되고 무목적적 프로세스가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데리다의 해체적 글쓰기와 상통한다.
해프닝에서 또 한 가지 핵심적인 것은 참여 개념이다. 관객들은 더 이상 수동적으로 앉아 작품을 감상하기보다는 프로세스로서의 작품 속에 참여하며 작가와 함께 작품을 만들어나간다. 또 많은 경우 해프닝의 현장에 참여하기만 해도 그 자체가 작품 전체의 한 요소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최종적인 작품은 누구의 작품이기보다는 현장에 참석한 모두의 작품이 된다. 팝 아트에서도 강조한 작품의 ‘익명성’이 확보되는 것이다.
해프닝은 일회적이다. 이 점에서 앤디 워홀의 작품들과도 다르다. 앤디 워홀이 대량생산체제에 돌입한 현대 사회의 반복성을 작품화했다면, 해프닝은 오히려 그런 기계성·법칙성·반복성 등에 대립해 단 한번 벌어지는 ‘사건’, 다시는 똑같이 반복될 수 없는 일회성 등을 강조한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예술이다.
20세기의 이중성
20세기 사상사 전체를 일별할 때 느낄 수 있는 것은 20세기 사상들은 기존의 사상들이 어둠 속에 놓아둔 영역들을 계속 새롭게 발견해냈다는 사실이다. 마치 자연수가 모든 것인 줄 알았던 사람들이 그 뒤 자연수가 정수라는 더 넓은 지평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발견했고, 그 뒤 이런 과정이 유리수, 실수 등으로 연장된 것과도 같다.
푸코는 광기, 감옥 등의 역사를 씀으로써 역사와 철학의 테두리를 넓혔다. 현대 문학은 독창적인 기법들을 통해서 전통 문학의 테두리를 부수었다. 또 현대 예술은 기존 예술의 테두리를 끊임없이 파기시키면서 이전에는 예술의 타자로서 머물던 영역들을 줄기차게 개발해왔다. 이런 점에서 20세기는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보다 비극적이고 참혹한 시대였지만, 문화적으로는 인류 역사상 어느 시대보다도 역동적이고 풍요로운 시대였다. 이런 이중성에 아마도 현대의 비극이 놓여 있을 것이다. 각도를 달리해서 보면 현대 예술은 그 자체가 현대의 비극에 저항하는 한 몸짓이었을지도 모른다.
철학아카데미 원장

사진/ 모홀리나기, <전기무대를 위한 가벼운 버팀대>(1922~30).
이후의 미술이 보여주는 성격의 한 측면을 우리는 객관성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객관성이란 주관적인 요소를 추상해내고 사물 자체의 법칙성을 찾는 과학적 객관성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개인의 내면보다는 한 개인으로서는 통제할 수 없는, 개인의 기회이나 ‘의도’만으로는 성립하지 않는 어떤 과정, 우연이 개입되어 흘러가는 객관적인 과정을 뜻한다. 바우하우스에서의 좋은 강의로 명성이 높았던 모홀리나기는 ‘키네틱 아트’를 선보였다. 오늘날 길거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키네틱 아트는 말 그대로 움직이는 예술이다. 기술적 장치들을 써서 만드는 이 유형의 작품들은 일단 공간적으로 고정되면 불변의 동일성을 가지며 미술관 한구석에 엄숙하게 배치되는 전통 미술품들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들은 바람이 불면 움직이고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에서 시간을 필수요소로 내포한다. 즉 미술품은 자체 완결적이고 내적인 동일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로 개방되어 있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해가는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의 공원 조성에서도 이런 사유의 영향이 나타나는데, 이런 공원들은 20∼3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더 풍부한 형태로 완성되어 간다. 키네틱 아트는 예술사적 의미에서의 객관성과 작품의 현실성을 확보했다. 작품은 저 멀리 떨어져서 관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들어와 흔들리고 영향을 끼치는 현실적 존재가 된 것이다. 그것은 작가 개인의 내면이나 의도에서 시작되긴 하지만 시간 속에서 그 의미를 변형시켜 나간다. 예술에 대한 이런 새로운 개념은 해프닝 예술에서 활짝 꽃피게 된다. 현장에 참여한 모든 이의 작품

사진/ 엘런 카프로, <사우샘프턴 파라다이스>(해프닝 '가스'의 부분), 1966, 뉴욕사우샘프턴 롱아일랜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