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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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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7-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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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철학카페 36 ㅣ 팝아트

대량생산 사회의 몰개성적 반복성 표현… 대중문화 아이콘을 작품세계로 끌어들여

사진/ 앤디 워홀의 (1962). 183.5×132.5cm, 프랑크푸르트 현대미술관.
서구 사유의 한편에는 시원(origin)에의 추구가 가로놓여 있다. 시원이란 다른 것들을 변화시키지만 그 자신은 변화하지 않는 것, 변화하는 세상에 비해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 시간을 초월해 영원한 것, 그리고 만물이 그것을 흠모하여 그리로 가까이 가고 싶어하는 것이다. 서구의 고·중세 철학은 시원의 탐구에 매진했으며, 이에 입각해 가치-존재론을 구축했다.

가치-존재론이란 말하자면 100점의 존재를 기준으로 그에 비해 얼마나 마이너스인가를 측정하는 가치론이라 할 수 있다. 복사를 할 때마다 복사본은 원본보다 흐려진다. 그 흐려짐의 정도가 그 사물의 가치를 결정한다.


초월적 의미 사라진 ‘원본의 다원화’

플라톤은 이런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모방’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현실의 사물들은 그것의 형상(形相)을 모방한다. 적토마와 로시난테는 모두 말의 형상을 모방한다. 그러나 적토마는 로시난테보다 말의 형상에 훨씬 가깝다. 달리 말해 말의 형상은 로시난테보다 적토마에 더 많이 나타나 있다. 다시-나타나-있음을 우리는 재현(再現)이라 부른다. 때문에 서구 존재론의 근저에는 재현 개념이 깔려 있다.

전통 미학이 재현 개념에 기반해 있었다는 것은 달리 말해 그 미학이 실재의 모방이라는 개념을 축으로 삼았음을 뜻한다. 실재 즉 ‘리얼한 것’의 추구가 전통 미학을 지배했다. 현대예술은 실재를 포기하거나 새로운 형태로 구축하고자 했으며, 이것은 곧 원본의 포기 또는 원본의 다원화로 나아간다.

원본의 재현이라는 미학에 입각할 때 그림의 의미는 원본과의 유사성(ressemblance)에 의해 결정된다. 즉 원본과 얼마나 닮았는가, 원본에 얼마나 가까운가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원본 없는 세상에서 이제 원본과의 유사성은 미학적 기준의 자격을 상실한다. 그 자리를 상사성(similitude)이 채운다. 원본이 없다면, 각 사물들은 원본과의 유사성이 아니라 각각 사이에서의 동일성과 차이를 가질 뿐이다. 거기에는 어떤 목적론도 배제된 차이와 반복이 있을 뿐이다.

앤디 워홀은 캠벨 회사에서 만들어낸 통조림 깡통들을 열거한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유사성만이 존재하는 세계를 표현했다. 워홀의 세계는 복제와 반복의 세계다. 어떤 원본도 없이 똑같은 제품들이 약간씩의 차이만을 동반한 채 반복된다. 거기에는 로드코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저 위’에의 갈망도, 뉴먼에게서 볼 수 있는 숭고미도, 또 폴록에게서 볼 수 있는 개인적 내면의 고뇌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대량생산되는 세계, 어떤 초월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 상품들만이 존재하는 세계가 그것이다. 워홀은 모든 초월성이 사라진 채 모든 것이 상품으로서 대량생산되는 현대사회를 냉혹하게 묘사했다.

기술에 매료된 상업적 사유의 산물

사진/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꽝!(Whaam!)>(1963). 172×269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워홀 등으로 대표되는 ‘팝아트’는 추상표현주의의 대척점에 존재한다. 추상표현주의가 개인적 내면성을 표현했다면, 팝아트는 몰개성적 반복성을 표현했다. 추상표현주의가 숭고한 종교의식에 의해 지배되었다면, 팝아트는 싸구려 문화들이 풍기는 속물성에 의해 지배되었다. 추상표현주의가 유일무이의 절대에 대한 추구에 매료되었다면, 팝아트는 무수히 반복되는 대량생산의 세계에 매료되었다. 추상표현주의가 철학적-예술적 사유의 산물이라면, 팝아트는 기술적-상업적 사유의 산물이다.

팝아트는 이름이 보여주듯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미술과 20세기에 형성된 대중문화의 구분을 허물어버렸다. 워홀은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사진 등을 가지고 작업했다. 원본의 유일함이나 그것이 풍기는 숭고미는 거부된다. 이 점에서 팝아트는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통한 예술이나 다다이즘의 파괴적 예술과 통한다. 그러나 팝아트에는 기존 사조들에서 풍기는 현실 비판이나 비극적 정조는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기술사회·대중사회에 대한 낙관과 상업주의에 입각한 속물성이 깔려 있다. 영국의 팝아트가 비판정신을 기조로 한 데 비해 미국이 팝아트는 비판정신의 엄격함이나 묵직함조차도 비웃는다.

대중문화는 기본적으로 미국문화의 소산이다. 미국문화는 영화와 팝송과 프로스포츠를 만들어냈다. 유럽이 2차 세계대전으로 고통받고 그 후유증으로 고통스러워할 때 미국은 전쟁 특수로 유례 없는 강국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고도의 소비사회가 도래한다. 거대한 백화점, 스포츠센터, 영화관 등이 건립되고 무수한 대중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팝아트는 이렇게 형성된 미국 대중문화의 한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면의 고뇌·지적 성찰을 요구 말라

팝아트는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들을 무수히 작품으로 끌어들였다. 코카콜라, 만화, 쇼윈도, 광고 이미지들과 카피들, 청바지, 영화(섹스, 스포츠와 더불어 3S를 형성했던) 자동차, 만화 등이 그것들이다. 리히텐슈타인은 기성의 만화 작품에서 일정한 부분을 택해 작품활동을 하기도 했다. 거기에서 작가의 내면의 고뇌나 지적 성찰은 거의 없으며 차이와 반복만이 존재하는 냉혹한 세계가 펼쳐진다.

팝아트의 한 특징은 익명성이다. 팝아티스트들이 만들어낸 작품들에는 어떤 고유한 개성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팝아티스트들은 그러한 익명성을 표현하는 독특한 기법들을 발명해냄으로써 그들 자신은 큰 이름을 얻었다. 반복만이 존재하는 세계를 표현한 앤디 워홀이 현대 미술사에 큰 이름을 남겼으니 말이다. 작가의 죽음이 회자되는 시대의 한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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