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을 벗어난 새로운 보편의 논리 찾아… 동양의 열쇠로 세계의 문을 연다
지난해 좀 별스런 일이 한 가지 있었다. 하나는 김경일 교수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일이고, 다른 하나는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가 교육방송에서 ‘노자와 21세기’란 이름으로 방송강의를 해 큰 화제를 모은 일이다. 김경일 교수의 책은 공자로 대변되는 ‘전통’의 가치를 매우 거칠게 부정한 글이었고, 김용옥씨의 강의는 <노자>라는 2천년 전의 문자에서 새 밀레니엄의 갈길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편 것이었다.
황희 정승이라는 위대한 조상을 가진 한겨레인지라, ‘전통’이란 우리 발을 묶는 족쇄이니 깡그리 내다버리고 이른바 ‘세계화’에 일로매진하자는 주장이 나와도 “니 말이 옳다” 하고, 21세기의 비전을 전통 고전에서 찾자는 거의 정반대 주장이 나와도 “니 말이 옳다”고 한 형국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이래서 되겠느냐!”는 주장을 펴면, 반드시 “그럼 니 말도 옳다”는 반응이 되돌아올 것이다. “이래서 황희 정승 같은 전통은 정말 문제다”라고 해도 “니 말이 옳다”고 하고, “이렇게 황희 정승의 전통은 위대한 포용력을 지녔다”고 해도 “니 말이 옳다”는 대답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황희 정승의 태도, 그 현대적 계승
“이 황희 정승 같은 놈!”이란 욕(어쩌면 칭찬일지도)을 먹을 일인지 몰라도, “니 말도 옳다”는 식의 판단태도가 썩 나쁘지만은 않다. “니 말도 일리는 있다”는 식의 판단태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내 말만 이치에 맞는다”는 독단적 태도에 비하면 훨씬 열려 있는 태도다. 공자와 노자라는 인물의 차이는 있지만, 두 사람 모두가 동아시아에서 ‘전통’을 대표하는 거인이라는 점에서 그쪽 진영의 ‘공동 대표’ 같은 인물임에도, 이들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열광을 받은 일은, 황희 정승의 빛나는 전통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은 ‘전통’의 가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생각이 좀더 다듬어질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지금 한국에는 이른바 ‘지구화’(globalization)라는 거창한 구호와 더불어 ‘동양 전통에 대한 우호적 관심’이라는 양극 현상이 공존하고 있다. 남한에서 ‘세계화’란 번역어로 더 친숙한 ‘지구화’란 신조어는, 거칠게 요약하자면 “전 지구적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은 무엇이든 도태한다. 상품이든 사상이든 가치관이든 전 지구적 수준에 맞도록 구조조정 하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지구화’ 논리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목청을 높이기 시작했다.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이후 “제3세계는 이제 갈 곳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80년대 유행하던 사회과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른바 ‘비(非)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은 가능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오로지 시장경제를 빨리 채택해서 국내 산업과 경제를 전 지구적 수준으로 뜯어고치는 ‘지구화’를 달성하는 길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자본주의의 ‘모순’을 넘어서는” 길에 대해 말을 꺼내거나 고민하는 사람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런 지구화의 논리는 지난날 W. 로스토 등 성장론자들이 내세웠던 단선적 발전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구화라는 구호에는 “후진국이 중진자본주의를 거쳐 지구화의 일정 수준에 도달해야만 선진국에 이를 수 있다”는 논리가 배경에 깔려 있지만, ‘모든’ 후진국이 다 이런 행복한 여정을 밟으리라고 기대하는 건 매우 순진무구한 일이다. 무엇을 ‘지구적 수준’의 표준으로 삼을 것인지도 문제다. 오늘날 지구화의 논리는 서유럽에서 발전해온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자연과학을 표준으로 삼고 있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결국 서방 선진국만이 ‘정상적’인 발전의 길을 밟았고, 나머지 지역은 ‘수준 이하의 역사’를 만들어왔을 뿐이다. 그 역사의 정점에는 미국이 서 있고, 그것은 오늘날 미국이라는 초강대국 중심의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로 귀결되고 있다. 결국 지구화란 우리의 사고와 행동과 삶을 팍스 아메리카나의 표준에 맞추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표준은 절대로 “니 말도 일리는 있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이것만이 표준이다. 이것만을 따라오라”고 외친다. 지구화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 동양 전통에 대한 우호적 관심은 지구화의 논리에서 보자면 일종의 복고 취향이자 시간 낭비일 뿐이다. 최선의 경제제도는 시장경제 자본주의라는 결론을 얻었고 “역사는 끝났”는데 다시 옛날 얘기를 들춰서 뭐하자는 거냐는 핀잔을 듣기 좋은 일이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지구화라는 구호와 더불어 전통사상과 문화에 대한 우호적인 관심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한의학·침·기공 등 전통의학은 대체의학으로서 꾸준히 주목을 받고 있고, 유학·노장사상·불교 등 전통사상은 서양적 사고방식과는 또다른 세계관으로 관심을 끌고 있다. 심지어는 단군과 마고할멈까지 내세워 서양과는 다른 가치관을 회복하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이른바 ‘지구화’에 대한 남북의 서로 다른 번역어는 이 새로운 상황에 대한 두 극단의 인식을 대변한다. 지구화를 남한은 ‘세계화’로, 북한은 ‘일체화’로 번역한다. ‘세계화’란 번역어에는 전 지구적 가치 기준만이 보편적이라는 희망적 믿음이 담겨 있으며, ‘일체화’란 번역어에는 지구화가 사실상 팍스 아메리카나의 가치기준을 중심으로 한 획일적이고 폭력적인 통합과정이라는 비판이 담겨 있다. 황희 정승에게 물려받은 논리를 굳이 써먹지 않더라도, 이 두 관점은 일면의 진실만을 보여줄 뿐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현실 세계에서 자본주의에 견줄 만한 대안적인 체제가 등장할 가능성이나 조짐은 찾아보기 힘들다. 페르시아만 전쟁 때은 온 지구의 주민에게 전쟁을 생중계하는 초유의 볼거리를 만들어냈다. 인터넷의 급격한 발전은 지구마을 구석구석까지 통합의 구심력을 강화하고 있다. 그것은 가능성을 최대화하는 복음이기도 하고, 단일한 가능성만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재앙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내가 속한 집단(기업체든 국가든)만 일정 수준 이상을 넘어서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므로 다른 모든 가능성을 덮어두고 지구화의 길에 매진할 것인가, 아니면 지구화라는 이름의 또다른 폭군을 좀더 의심스런 눈으로 뜯어볼 것인가.
황희 정승의 전통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황희 정승의 유명한 일화에는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와 숨은 메시지가 있다.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 줄거리는 자기 판단력이 결여된 무골호인 이야기로 들리지만, 숨어 있는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재구성해보자면, “어떤 논리든 일리가 있지만 또한 어떤 논리도 배타적으로 유일하게 진리는 아니다”라는 태도일 수도 있다.
독단의 폭력성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오늘날 우리는 전통이든 현실이든 좀더 과감히 부정해볼 필요가 있다. 지구화의 논리도 일리는 있지만, 그것만이 배타적이고 유일한 진리는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실에 눈을 감고 복고 취향에서 전통적 가치를 옹호하는 일은 호사스런 취향일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부닥치고 있는 현실을 헤쳐나갈 역량과는 무관한 일일 터이다.
서양이 제국주의적으로 팽창해 자신의 근대화 논리를 다른 세계에 획일적으로 강요하기 전, 비유럽세계는 나름의 논리와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공자·노자 할아버지나 마고할멈에게서 우리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목소리일 것이다. 서양 근대화 논리의 전일적 지배 이후 미약한 목소리로 변했지만, 우리는 이런 목소리가 담고 있는 ‘일리’를 저버릴 이유가 없다.
우리는 근대화 과정은 ‘개’같이 겪었지만, 새로운 전망에 대한 판단은 좀 ‘정승’처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런 정승 같은 판단태도로 새로운 보편의 논리를 모색할 때, “이것만이 배타적인 진리”라는 독단의 폭력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비유럽지역의 전통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지구마을의 사상적 풍요에 기여할 수 있는 일종의 의무이기도 할 것이다.
(학술적으로 보면 많은 취약점과 불완전함을 지니고 있을) 이 새로운 연재는 이런 정승 같은 태도로 역사에 등장했던 논리들이 가진 ‘일리’들을 견주어보면서, 덜 폭력적이고 덜 일방적인, 좀더 넓은 영역에까지 설득력을 지니는, 새로운 보편의 논리를 감히 모색해보고자 한다.
이상수 기자leess@hani.co.kr

“이 황희 정승 같은 놈!”이란 욕(어쩌면 칭찬일지도)을 먹을 일인지 몰라도, “니 말도 옳다”는 식의 판단태도가 썩 나쁘지만은 않다. “니 말도 일리는 있다”는 식의 판단태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내 말만 이치에 맞는다”는 독단적 태도에 비하면 훨씬 열려 있는 태도다. 공자와 노자라는 인물의 차이는 있지만, 두 사람 모두가 동아시아에서 ‘전통’을 대표하는 거인이라는 점에서 그쪽 진영의 ‘공동 대표’ 같은 인물임에도, 이들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열광을 받은 일은, 황희 정승의 빛나는 전통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은 ‘전통’의 가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생각이 좀더 다듬어질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지금 한국에는 이른바 ‘지구화’(globalization)라는 거창한 구호와 더불어 ‘동양 전통에 대한 우호적 관심’이라는 양극 현상이 공존하고 있다. 남한에서 ‘세계화’란 번역어로 더 친숙한 ‘지구화’란 신조어는, 거칠게 요약하자면 “전 지구적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은 무엇이든 도태한다. 상품이든 사상이든 가치관이든 전 지구적 수준에 맞도록 구조조정 하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지구화’ 논리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목청을 높이기 시작했다.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이후 “제3세계는 이제 갈 곳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80년대 유행하던 사회과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른바 ‘비(非)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은 가능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오로지 시장경제를 빨리 채택해서 국내 산업과 경제를 전 지구적 수준으로 뜯어고치는 ‘지구화’를 달성하는 길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자본주의의 ‘모순’을 넘어서는” 길에 대해 말을 꺼내거나 고민하는 사람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런 지구화의 논리는 지난날 W. 로스토 등 성장론자들이 내세웠던 단선적 발전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구화라는 구호에는 “후진국이 중진자본주의를 거쳐 지구화의 일정 수준에 도달해야만 선진국에 이를 수 있다”는 논리가 배경에 깔려 있지만, ‘모든’ 후진국이 다 이런 행복한 여정을 밟으리라고 기대하는 건 매우 순진무구한 일이다. 무엇을 ‘지구적 수준’의 표준으로 삼을 것인지도 문제다. 오늘날 지구화의 논리는 서유럽에서 발전해온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자연과학을 표준으로 삼고 있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결국 서방 선진국만이 ‘정상적’인 발전의 길을 밟았고, 나머지 지역은 ‘수준 이하의 역사’를 만들어왔을 뿐이다. 그 역사의 정점에는 미국이 서 있고, 그것은 오늘날 미국이라는 초강대국 중심의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로 귀결되고 있다. 결국 지구화란 우리의 사고와 행동과 삶을 팍스 아메리카나의 표준에 맞추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표준은 절대로 “니 말도 일리는 있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이것만이 표준이다. 이것만을 따라오라”고 외친다. 지구화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 동양 전통에 대한 우호적 관심은 지구화의 논리에서 보자면 일종의 복고 취향이자 시간 낭비일 뿐이다. 최선의 경제제도는 시장경제 자본주의라는 결론을 얻었고 “역사는 끝났”는데 다시 옛날 얘기를 들춰서 뭐하자는 거냐는 핀잔을 듣기 좋은 일이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지구화라는 구호와 더불어 전통사상과 문화에 대한 우호적인 관심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한의학·침·기공 등 전통의학은 대체의학으로서 꾸준히 주목을 받고 있고, 유학·노장사상·불교 등 전통사상은 서양적 사고방식과는 또다른 세계관으로 관심을 끌고 있다. 심지어는 단군과 마고할멈까지 내세워 서양과는 다른 가치관을 회복하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이른바 ‘지구화’에 대한 남북의 서로 다른 번역어는 이 새로운 상황에 대한 두 극단의 인식을 대변한다. 지구화를 남한은 ‘세계화’로, 북한은 ‘일체화’로 번역한다. ‘세계화’란 번역어에는 전 지구적 가치 기준만이 보편적이라는 희망적 믿음이 담겨 있으며, ‘일체화’란 번역어에는 지구화가 사실상 팍스 아메리카나의 가치기준을 중심으로 한 획일적이고 폭력적인 통합과정이라는 비판이 담겨 있다. 황희 정승에게 물려받은 논리를 굳이 써먹지 않더라도, 이 두 관점은 일면의 진실만을 보여줄 뿐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현실 세계에서 자본주의에 견줄 만한 대안적인 체제가 등장할 가능성이나 조짐은 찾아보기 힘들다. 페르시아만 전쟁 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