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의 철학카페(33) 바넷 뉴먼
주체를 압도하는 거대한 아름다움…한 눈에 포착될 수 없는 지속성의 그림
깎아지른 듯한 절벽, 뜨거운 용암이 분출하는 화산, 바닥이 없을 것 같은 검푸른 바다…. 이런 광경들은 우리에게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을 다른 한편으로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이 양가적인 감정은 고대로부터 흥미로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훗날 이런 경험에 ‘숭고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스 문화에서 진선미는 구별되지 않았다. 참된 것은 곧 선한 것이요, 아름다운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아름다움은 선함과, 추함은 악함과 관련된다. 이들이 발견한 형상, 즉 이데아(개별적·감각적 존재들을 넘어서는 영원불변의 존재), 에이도스(한 사물의 변하지 않는 자기동일성), 파라데이그마(사물들이 그에 따라 만들어지는 본질) 등은 진리인 동시에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때문에 숭고의 현상은 그 자체로서 상세히 다뤄지지 못했다. 숭고라는 현상의 양가성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데아의 세계가 감성적 방식으로 드러나 그 뒤 숭고미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은 에드문트 바크를 거쳐 칸트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다뤄지게 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칸트에게서 아름다움이란 어떤 형태의 ‘이해’(利害)도 관여하지 않은 순수판단이다. 하나의 나무를 베어서 그루터기를 만들어 쉰다든가, 그것을 팔아서 이윤을 남기는 등의 행위는 순수한 판단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는 진리나 도덕도 ‘이해’의 범주에 들어간다. 다시 말해 칸트는 진리·도덕·미를 확연하게 구분한 위에서 논리를 전개한 것이다(그가 이것들을 통일적으로 이해하려 한 것은 물론이지만). 칸트에 이르러 진선미는 각자의 자율성을 가지고 뚜렷하게 구분되기 시작한 것이다. 칸트의 철학은 ‘구성’의 철학이다. 즉 주체가 감각으로 받아들인 인식 자료들을 오성을 가지고 구성하는 선험적 주체의 철학이다. 그런데 이 주체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능력들의 일치’가 보장되어야 한다. 감성능력·오성능력·구상력 등 여러 형태의 능력이 합치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칸트 말년 저작인 <판단력 비판>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데, 묘하게도 이 책에는 칸트 자신의 철학을 잠식해 들어가는 새로운 사유가 희미하게 나타나 있다. 칸트에게 숭고미란 양면성을 띤다. 한편으로 그것은 오성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에 의해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즉 그것은 인간의 범위를 초월하는 무엇인가가 덮치듯이 주체에게 다가와, 주체는 더 이상 구성하는 존재가 아니라 말하자면 넋을 잃고 그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런 경험은 물자체의 경험과 관련된다. 오성의 인식능력 범위를 넘어서는 물자체의 영역이 흘낏 모습을 나타내는 경험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칸트에게서 명확하게 정식화되지는 못했지만, 현대적인 개념으로 말해 숭고미는 “말할 수는 없고 오로지 보여질 수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데아의 세계가 감성적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숭고미의 경험은 주체를 압도하는 거대함과 더불어 등장한다. 단 그 거대함과 두려움이 관조하는 주체를 해할 정도는 아니어야 한다. 폭발하는 화산은 숭고미를 주지만, 그 용암이 관조하는 주체를 덮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기에 말이다. 따라서 숭고미란 압도하는 거대한 객관적 힘과 주관적 안정성이 함께 보장되어야만 성립한다. 송고미는 바넷 뉴먼 등을 비롯한 이른바 ‘색면화파’(色面畵派)의 그림을 통해서 현대에 부활했다(공상과학(SF) 영화는 현대적 숭고미의 또 하나의 예다). 색면화파는 폴록 등의 액션페인팅과 함께 ‘추상표현주의’로 분류되지만, 명료한 분류는 아니다. 폴록에게서 사물의 구조는 무너지며 모든 것은 잘게 나뉘어 운동하게 된다. 즉 차이를 발생시키는 장이 그려진다(<희미하게 빛나는 물질>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이에 비해 색면화는 힘들어(??) 하나로 종합되며, 화면 전체가 통합되어 적분된다. 이 점에서 두 회화는 추상과 표현이 함께 존재하는 느슨한 방식으로만 한 범주에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색면화 화가들의 작품들은 대개 거대하다. 사람들은 그 화면을 한눈에 보지 못하며 걸어가면서 비로소 전체를 보게 된다. 작은 화면은 인식 주체에게 ‘동시성’을 통해서 들어온다. 동시성을 통해서 들어온다는 것은 한 사물의 양 끝이 한꺼번에 보인다는 것이다. 작은 책의 양 끝은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서울의 양 끝은 우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헬리콥터를 타고 상공에 나가면 서울의 양 끝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인간은 사물을 장악하고 싶어하는 존재이며, 따라서 사물을 한눈에 포착하기를 원한다. 그것은 한 사물의 양 끝을 동시에 볼 때만 성립한다. 숭고미의 핵심에 무가 있다
그러나 바넷의 큰 화면은 그런 동시적 파악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동시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걷는 행위의 ‘지속’을 통해서 성립된다. 바넷의 지속은 베르그송의 지속과 다르다. 바넷의 지속은 사건으로 충만하고 운동변화하는 지속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은 있되 흐름은 없는 지속, 다질적(多質的)이지 않은 균질적인 지속, 흘러가면서도 동시에 멈추어 있는 듯한 지속이다. 화면의 크기는 주체를 압도하며, 주체는 멈추어 있는 듯한 시간을 통과하면서 숭고미를 느낀다. 주체는 더 이상 구성하는 주체가 아니다.
그 숭고미의 핵심에는 무(無)가 있다. 바넷의 화면은 놀라울 정도로 간단하다. 화면 전체가 난색으로 채워져 있으며 거기에 하나 또는 몇개의 선이 그어져 있을 뿐이다. 따라서 바넷의 화면 앞에 선 사람은 일종의 무 앞에 서게 된다. 무의 미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근원적인 숭고미다. 무 앞에서 인간은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존재에의 경외심을 느낀다. 뉴먼에게 이런 경험은 초월의 경험이다. 그것을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일 것이다. 뉴먼은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말로 할 수 있다면 무엇하러 그리겠습니까?”
뉴먼이 그린 수직선을 몬드리안을 비롯한 선배 화가들에게서 나타나는 초월에의 의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뉴먼의 초월성은 칸딘스키의 영지주의(靈知主義) 같은, 직접적으로 종교적인 초월성은 아니다. 그것은 순수하게 형이상학적인 초월성이다.

사진/ (1950~51년). 뉴욕현대미술관.
이데아의 세계가 감성적 방식으로 드러나 그 뒤 숭고미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은 에드문트 바크를 거쳐 칸트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다뤄지게 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칸트에게서 아름다움이란 어떤 형태의 ‘이해’(利害)도 관여하지 않은 순수판단이다. 하나의 나무를 베어서 그루터기를 만들어 쉰다든가, 그것을 팔아서 이윤을 남기는 등의 행위는 순수한 판단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는 진리나 도덕도 ‘이해’의 범주에 들어간다. 다시 말해 칸트는 진리·도덕·미를 확연하게 구분한 위에서 논리를 전개한 것이다(그가 이것들을 통일적으로 이해하려 한 것은 물론이지만). 칸트에 이르러 진선미는 각자의 자율성을 가지고 뚜렷하게 구분되기 시작한 것이다. 칸트의 철학은 ‘구성’의 철학이다. 즉 주체가 감각으로 받아들인 인식 자료들을 오성을 가지고 구성하는 선험적 주체의 철학이다. 그런데 이 주체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능력들의 일치’가 보장되어야 한다. 감성능력·오성능력·구상력 등 여러 형태의 능력이 합치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칸트 말년 저작인 <판단력 비판>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데, 묘하게도 이 책에는 칸트 자신의 철학을 잠식해 들어가는 새로운 사유가 희미하게 나타나 있다. 칸트에게 숭고미란 양면성을 띤다. 한편으로 그것은 오성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에 의해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즉 그것은 인간의 범위를 초월하는 무엇인가가 덮치듯이 주체에게 다가와, 주체는 더 이상 구성하는 존재가 아니라 말하자면 넋을 잃고 그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런 경험은 물자체의 경험과 관련된다. 오성의 인식능력 범위를 넘어서는 물자체의 영역이 흘낏 모습을 나타내는 경험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칸트에게서 명확하게 정식화되지는 못했지만, 현대적인 개념으로 말해 숭고미는 “말할 수는 없고 오로지 보여질 수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데아의 세계가 감성적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숭고미의 경험은 주체를 압도하는 거대함과 더불어 등장한다. 단 그 거대함과 두려움이 관조하는 주체를 해할 정도는 아니어야 한다. 폭발하는 화산은 숭고미를 주지만, 그 용암이 관조하는 주체를 덮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기에 말이다. 따라서 숭고미란 압도하는 거대한 객관적 힘과 주관적 안정성이 함께 보장되어야만 성립한다. 송고미는 바넷 뉴먼 등을 비롯한 이른바 ‘색면화파’(色面畵派)의 그림을 통해서 현대에 부활했다(공상과학(SF) 영화는 현대적 숭고미의 또 하나의 예다). 색면화파는 폴록 등의 액션페인팅과 함께 ‘추상표현주의’로 분류되지만, 명료한 분류는 아니다. 폴록에게서 사물의 구조는 무너지며 모든 것은 잘게 나뉘어 운동하게 된다. 즉 차이를 발생시키는 장이 그려진다(<희미하게 빛나는 물질>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이에 비해 색면화는 힘들어(??) 하나로 종합되며, 화면 전체가 통합되어 적분된다. 이 점에서 두 회화는 추상과 표현이 함께 존재하는 느슨한 방식으로만 한 범주에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색면화 화가들의 작품들은 대개 거대하다. 사람들은 그 화면을 한눈에 보지 못하며 걸어가면서 비로소 전체를 보게 된다. 작은 화면은 인식 주체에게 ‘동시성’을 통해서 들어온다. 동시성을 통해서 들어온다는 것은 한 사물의 양 끝이 한꺼번에 보인다는 것이다. 작은 책의 양 끝은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서울의 양 끝은 우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헬리콥터를 타고 상공에 나가면 서울의 양 끝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인간은 사물을 장악하고 싶어하는 존재이며, 따라서 사물을 한눈에 포착하기를 원한다. 그것은 한 사물의 양 끝을 동시에 볼 때만 성립한다. 숭고미의 핵심에 무가 있다

사진/ <약속>(1949년). 뉴욕, 개인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