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자연스레 배치하는 것으로 유명한데요. 어떤 작품은 과도한 피피엘 때문에 조명되기도 해요. 이 과정에도 나름의 고충이 있을 것 같아요.
“드라마는 굉장히 많은 사람의 이권이 합쳐져 있어요.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죠. 사실 큰 제작비를 쉽게 받으면 문제가 없을 텐데 현실적으로 어려우니까요. 그래서 저는 정말 협조를 잘하는 편이에요. 제가 비즈니스를 오래 했기 때문에 피피엘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가능하면 제작사를 위해 피피엘을 다 넣어주려 하죠.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도외시할 순 없으니까요. 다만 피피엘도 규제가 있어 일정 기준 이상은 못 넣어요. 안 그러면 광고 드라마가 될 테니까요. 제가 가장 잘하는 스토리텔링과 피피엘의 기본 목적을 자연스레 합치하려 해요. 본질만 흐트러지지 않으면 괜찮아요. 중요한 건 그거예요.”
―<품위있는 그녀>에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기묘한 관계가 등장해요. 우아진(김희선 분)은 박복자가 위로받고 싶고 닮고 싶은 여성으로 나오거든요. 그런데 이 둘은 남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에요. 적도 아니지만 완전한 아군도 아니고요.
“쓰기 쉽지 않았어요. (웃음) 우리나라 드라마는 전형적인 도식을 갖고 있잖아요. 내 편 혹은 네 편. 그래서 시청자 반응도 응원하거나 응징하기 바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뉘죠. 그런 현실에 박복자라는 입체적인 캐릭터로 사람들에게 다양한 의미를 던지고 싶었어요. 사실 누구나 마음속에 박복자가 있어요. 이루지 못한 꿈이나 가지지 못한 걸 욕망하죠. 그런 욕망이 없다면 우리가 어떤 동력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겠어요. 스스로 가장 잘 썼다고 생각한 부분은 우아진이 마음공부를 하며 유언장을 남기는데, 박복자가 죽은 뒤 그의 유품에서 우아진의 유언장이 발견되는 장면이에요. 그 유언장 내용도 결국 박복자의 삶과 죽음을 은유하거든요. 두 사람이 그렇게 연결되죠. 제가 봐도 잘 썼더라고요. (웃음) 사실 <품위있는 그녀>는 초반 편성이 잘 잡히지 않았던 작품이에요. 중년 여자 둘이 나오는 드라마를 누가 보겠냐는 업계 반응이 대부분이었거든요. 하지만 다행히도 시청자 반응이 좋아서 그 뒤로 드라마 시장에 여성 서사가 더 많이 나올 수 있었죠.”
―<품위있는 그녀>는 실화를 바탕으로 극화한 이야기예요. 영풍제지를 모티브로 했죠.
“영풍제지 직원들을 만나 인터뷰도 했지만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어요. 아무래도 내부 이야기를 솔직하게 전해주지 않거든요. 영풍제지 이야기는 워낙 기사에 많이 나오고 온라인에도 정리된 글이 많아 거기서 비롯한 이야기를 따온 거죠. 하지만 둘이 완전 다른 이야기이긴 해요. 박복자는 훨씬 더 입체적인 캐릭터에서 시작했으니까요. 박복자와 우아진, 다른 두 여자를 한데 연결하고 싶은 마음이었고 영풍제지는 소재와 배경으로서 흥미를 느낀 거예요. 배우들이 캐릭터을 잘 연기해줬죠. 김선아가 아니었다면 박복자를 누가 소화할 수 있었을까요.”
백미경 작가의 작업실 벽에 걸린 드라마 <날 녹여주오>의 포스터. 오른쪽 벽면에 작가의 작품별 스케줄과 작품 정리도가 빼곡하다.
―대본 작업을 할 때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며 쓰잖아요. 내 그림과 가장 일치했던 장면은 무엇인가요.
“4회 엔딩에 박복자와 우아진이 처음으로 붙어요. 비가 내리고 천둥도 치는데 폭주하는 박복자에게 우아진이 ‘여기서 멈춰!’ 하고 소리를 지르고 원하는 게 뭔지를 물어요. 그리고 박복자는 이 집에서 한 발짝도 안 나갈 거라고 대응하고요. 둘의 긴장감과 박복자의 표정, 우아진의 목소리까지 배우들의 연기는 물론 연출까지 완벽했다고 생각해요.”
―<품위있는 그녀>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 게 <마인>이에요.
“처음부터 <품위있는 그녀2>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에서 시작했어요. 같은 베이스와 같은 소재지만 조금 더 확장된 버전으로 쓰고 싶었어요. 개인적으로 제 한계를 분명하게 느꼈던 작품이라 아쉬워요. 결과적으로 불륜을 다루게 되고 혼외자가 나오잖아요. 다시 쓴다면 그렇게 안 쓰고 싶어요. 모성을 조금 더 부각하고 싶었어요. 모성을 강요하는 것과는 다른 결의 맥락인데요, 드라마에서 키운 자식에 대한 모성이 나타나잖아요. 서희수(이보영 분)는 자신이 낳지 않은 자식을 잘 키워서 세상에 내보내겠다는 책임감을 갖고 있고요. 이게 일반적 시선에선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거든요. ‘제 자식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싶잖아요. 강자경도 그 육아를 함께하겠다고 이야기하고, 정서현(김서형 분)도 자기만의 모성을 보여주죠.”
―그래서일까요. 편견에 맞서 싸워나가는 네 여성(미혼모, 새어머니, 성소수자, 빈곤층 여성)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이는 장면이 바로 희수가 피를 흘리며 유산할 때예요.
“모두가 아이를 잃은 서희수를 감싸는 장면은 제가 <마인>에서 제일 공들여 쓴 장면이기도 해요. 여자가 여자를 따뜻하게 감쌀 수 있는 포인트이기도 하죠. 가장 아픈 일이잖아요. 강자경도 거기서 같은 여자로서 엄청 아파하고 연민하고요.”
―특히 성소수자를 섬세하게 다룬 것으로 호평이 잇따랐어요. 성소수자가 현실과 타협하는 것과 그로 인한 내적 갈등을 세세히 그리다보니 오직 극을 위해 예민한 사안을 차용했다는 느낌을 주진 않아요.
“그렇게 쓰지 않으려 정말 노력했어요. 또 다른 사랑의 형태로서 조심스레 다루려 했어요. 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사랑이 있잖아요. 그런데 드라마가 조명하는 건 대부분 20대 남녀의 사랑이에요. 이상하지 않나요? 당장 이 아파트를 탈탈 털어도 50가지의 헤테로(
서로 다르다) 연애담을 들을 수 있을 텐데. 저는 편견, 선입견, 차별 등과 싸우는 사랑을 더 많이 그리고 싶어요. 그래서 <힘쎈여자 강남순>(
2023년 방영 예정)에도 노인의 사랑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어요.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데, 분명히 현실에 존재하는 사랑이거든요. 많은 시청자가 원하는 게 아닐지라도 소수의 사랑을 말하려 해요. 왜 노인들이 트로트 방송만 보고 싶다고 생각하나요? 그들이 주인공이 된, 사랑 이야기도 보고 싶을 수 있잖아요. 저는 돈을 위해 글을 쓰지 않아요. 아무도 하지 않은 것, 시청률이 잘 안 나올까봐 머뭇거리는 것을 먼저 시도해서 길을 열어주고 싶어요. 다른 작가들을 위한 일이고 이 일에 대한 사명감과 책임감 때문이기도 해요.”
―문득 궁금해요. 이렇게 많은 글을 써온 작가님에게 가장 글 쓰기 편안한 환경은 어떤 상태인가요. 보통 작가는 올빼미족이라는 이미지가 있는데.
“아우, 그럼 오래 일 못해요. 아침에 막 일어났을 때, 그때 에너지가 가장 좋아요. 다른 직장인처럼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하는 루틴이 가장 맞아요. 밤 11시에는 자야 하고요. 주말에는 무조건 쉬죠. 해의 순환에 따라 일해야 몸이 건강해요. 몸이 건강해야 글이 잘 써지고요. 신이 인간에게 햇빛을 줬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예요. 건강을 위한 필수 요소인데 심지어 공짜잖아요. 잘 이용해야죠.”
글 이자연 <씨네21> 기자·사진 백종헌 <씨네21> 기자
사회문제와 다양한 가치관, 소수를 위한 이야기를 다루는 백미경 작가는 어디서 흥미로운 글감을 찾을까. 신문을 통해 세상의 다양한 소식을 많이 접하지만 그보다 더 자주 하는 행동은 바로 상상이다.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으면 우리의 문화유산은 어떤 방식으로 바뀌었을까요? 백설공주가 일곱 난쟁이 중 잘생긴 애랑 눈이 맞는다면? 막상 왕자를 만났는데 상당히 폭력적이라면?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진 건 자의였을까 타의였을까? 이런 식으로 상상해요.” 백미경 작가는 세상이 참이라고 내세운 명제를 무조건 옳다고 믿지 않고, 그 의미를 비틀어내며 새로운 가상세계를 계속 구축한다.
백미경 작가의 드라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힘쎈여자 도봉순>을 꼽았을 때, 그가 건넨 첫 번째 질문은 “기자님에게 <힘쎈여자 도봉순>은 로맨스예요, 히어로물이에요, 코미디예요?”였다. 어떤 점이 좋았는지 물어보는 질문이 돌아올 줄 알았건만 완전히 예상을 비껴갔다. 그런데 맞는 말이다. <힘쎈여자 도봉순>은 로맨스이자 히어로물이고 코미디다. 어디 그뿐일까. 마지막 작품 <마인>도 미스터리 스릴러이자 블랙코미디에 로맨스, 추리물이기도 하다. 약간의 하이스트 무비적 요소까지. 한 작품에 여러 색깔을 담는 것이 요즘 트렌드라 하지만, 백미경 작가는 더더욱 색다른 장르적 믹스 앤드 매치로 유연한 조합을 이뤄내는 데 능하다.
그러니 그는 작가이지만 조향사와 화학공학자 사이 어드메쯤 같은 느낌을 물씬 풍긴다. 무슨 재료를 더할 때 어떤 화학반응이 올지 예리하게 예측하고 과감하게 선택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현실 속 변화를 이끌어내는 지반이 되고 만다. 그가 작품으로 제시한 세상을 간접경험한 시청자가 현실에 돌아와 낙차를 느끼며 더 좋은 세상을 꿈꾸고 실천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힘쎈여자 강남순>(JTBC, 2023년 방영 예정)
<마인>(tvN, 2021년): 세상의 편견에서 벗어나 진짜 자기 것을 찾아나가는 여성의 이야기, 연대의 힘을 보여준다.
<날 녹여주오>(tvN, 2019년): 24시간 냉동 인간 프로젝트에 참여한 남녀 주인공이 20년 뒤 깨어나 마주한 세상의 이야기를 다룬다.
<우리가 만난 기적>(KBS, 2018년): 평범한 가장이 이름과 나이가 같지만 정반대의 삶을 사는 남자의 인생을 살게 된 휴먼 멜로 드라마.
<품위있는 그녀>(JTBC, 2017년): 가감 없는 욕망 앞에서 엇갈린 두 여성의 삶을 다룬다. 동경, 위로, 연민, 연대 등 다양한 키워드가 펼쳐진다.
<힘쎈여자 도봉순>(JTBC, 2017년): 여성 히어로 드라마. 모계 중심으로 내려오는 괴력을 지닌 봉순이 삶의 모험과 사랑을 이야기한다. TV 토크쇼에 나와 백미경이 가장 애정이 깊다고 말한 작품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은동아>(JTBC, 2015년): 첫 장편 드라마.
<강구 이야기>(SBS, 2014년): 단막극. 백미경 작가의 데뷔작. 영덕 강구항을 배경으로 연인의 이야기를 다룬다. </k팝스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