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의 철학카페 31 ㅣ 살의 외침(II)-베이컨론
아르토적 잔혹함 깃들인 감각의 회화… 추상적 힘에 의한 기의 광란 드러내
현대회화는 재현을 목적으로 하는 전통회화(= 구상회화)를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그러나 그 길은 하나가 아니었다. 추상회화는 감각과 역사가 지배하는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플라톤적 실재를 추구했으며, 그것은 구조를 향해 간 칸딘스키, 몬드리안 등의 추상과 힘을 향해 간 폴락 등의 추상으로 갈라졌다. 추상회화는 힘겨운 현실을 초월하려는 욕망을 담고 있다. 적지 않은 추상화가들이 그노시스파를 비롯한 초월적 사상들에 매료되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반면 의미의 산종(散種)을 꾀한 마그리트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은 실재의 다면성과 의미의 불확정성 등을 추구함으로써 추상회화와는 달리 실재 개념을 다원론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세계의 복잡함을 초월하기보다는 그 복잡함을 복잡함 자체로서 포착하고자 했다.
살의 외침을 추구한 사유/회화 계열은 또 다른 방식으로 현대를 맞았다. 에곤 실레에서 베이컨, 신디 셔먼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화가들은 지적인 회화가 아니라 감성의 회화를, 그러나 일상적 의미에서의 ‘감정’이 아니라 아르토적 잔혹함이 깃들인 ‘감각’의 회화를 추구했다. 극작가 아르토는 어떤 재현이나 구상도 개입하지 않는 순수한 감각, 순수한 외침에 대해 ‘잔혹’이라는 말을 썼다. 때문에 그의 극을 ‘잔혹극’이라고 한다. 이 말은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잔인함’과는 구별된다.
감정이 아닌 감각을, 마음이 아닌 신경
살의 외침을 그리려고 한 이런 회화들은 분명 20세기라는 잔인한 시대를 통과하면서 생겨났다. 전례없이 힘겨웠던 20세기라는 시대가 현대인의 감성을 짓이겨놓았다. 이 단말마의 고통을 이미지화한 방식은 화가들마다 달랐다.
베이컨 역시 유럽인으로서 전쟁의 참상을 겪었으며, 영국인으로서는 아일랜드의 폭력을 경험했다. 그의 그림에는 그러한 폭력, 인간의 신체를 ‘고기’로 만드는 잔인함이 배어 있다. 그는 그런 공포와 잔인함을 십자가형 등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베이컨 그림의 핵심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잔인함보다는 아르토적인 의미에서의 잔혹함에 있다고 해야 하리라. 그가 목표한 것은 전쟁의 참상이나 삶의 공포를 고발하거나 재현한 것이 아니다. 그는 공포 그 자체, 감각적 잔혹함 그 자체를 그리고자 했다. 이 점에서 그의 그림은 존재론적이다. 베이컨에게서 역사와 존재론의 융합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융합을 요구하는 것은 한 사람의 화가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베이컨에게서 우리는 살·고기·공포·피…. 이 모든 것들이 감각으로서, 오로지 감각으로서만 표현되고 있음을 본다. 베이컨은 감정이 아니라 감각을, 마음이 아니라 신경(神經)을 그리고자 했다.
생생한 감각은 살로 표현된다. 베이컨의 그림은 지적인 뼈가 아니라 감각적인 살을 그린다. 십자가형을 통해서 살은 밑으로 축 처진다. 추락하는 살이다. 운동을 통해서 살은 이완하기도 하고 수축하기도 한다. 베이컨에게서 살이란 생리학적인 의미에서의 살은 아니다. 그의 살은 메를로-퐁티적인 살이다. 그러나 베이컨의 그림은 현상학 너머로 나아간다. 그는 조직화된, (잠재적으로) 의미가 구성되어 있는 현상학적인 신체가 아니라 그 이전의 신체, 아직 신체라고 하기에도 뭣한 신체를 그린다. 그렇다고 그가 폴락처럼 모든 것이 해체되고 힘과 선들만이 남아 있는 추상을 추구한 것은 아니다.
제대로 조직되지 못한 기의 흐름
베이컨은 폴락적인 운동과 유기화된 현실 사이를 그린다. 즉 ‘기관 없는 신체’와 유기적인 신체 사이를 그린다. 그래서 그의 기관들은 미처 완성되지 못한 채 그려지기도 하고, 마구 뒤섞이기도 하고, 때로 해체된 모습 그대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되기’(devenir)의 세계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A와 B 두 개체보다는 그 ‘사이’를 또는 그 둘을 모두 포함하는 장을 사유하고자 했다. 이럴 때 A, B 같은 개체들은 그 장의 한점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A, B와 같은 고정된 점이 아니라 유동적인 되기, ‘becoming’을 사유하게 된다.
베이컨의 세계는 얼핏 기(氣)의 세계를 연상시킨다. 온전하게 조직되기 이전의 기, 취산(聚散) 과정 중에 있는 기. 그러나 그의 기는 동북아의 사유가 추구해온 조화롭게 잘 흐르는 기가 아니라 뒤틀린 기, ‘잘 못’ 길을 든 기, ‘제대로 조직되지 못한’ 기를 그린다. 그의 그림은 기와 현실 사이를, 기괴한 사이를 그린다. 베이컨은 유기체가 아니라 생명을 그린다. 유기체는 생명을 가둔 감옥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서 우리는 유기체라는 감옥을 부수고 격렬하게 솟아나오는 생명을 본다. 그러나 그 생명에서 우리는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보기보다는 잔혹함과 어중간함을 본다. 그것이 바로 20세기의 생명, 아우슈비츠 유대인들의 생명, 마루타들의 생명인 것일까.
어떤 재현도, 어떤 의미도, 어떤 구상도 거부하는 감각의 잔혹성, 현존(presence) 그 자체. 그것은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유기적 재현과 철저하게 대립한다. 베이컨의 그림은 잘 계획된 질서가 아니라 우발점(偶發点)들의 유통(流通)과 기의 광란을 보여준다.
베이컨은 힘을 그리고자 했다. 살의 외침을 그리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그린 힘은 폴록적인 힘은 아니다. 왜인가? 베이컨에게 힘은 철저하게 신체의 힘이기 때문이다. 폴록의 힘은 베이컨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전적으로 추상적인 힘이다. 거기에서 얼핏 미시물리학이 제공하는 이미지가 느껴지기도 한다.
두뇌는 비관적이어도 신경은 낙관적
베이컨 회화의 지평은 단적으로 신체이다. 신체를 전제하지 않는 힘은 베이컨적인 힘이 아니다. 베이컨에게서 힘은 파동이고 떨림이며 신경의 놀람이다. 그 힘은 시각·청각 등보다 앞선다. 베이컨이 그리려고 한 것은 그 살떨림, 피의 파동인 것이다.
베이컨은 자신을 가리켜 두뇌에서는 비관적이지만 신경에서는 낙관적이라고 했다. 분명 그는 두뇌로 20세기의 비극을 느꼈을 것이고 누구나 그렇듯이 비관적이겠지만, 잔인함과 공포에서 잔혹함과 감각으로 이행함으로써 감각적 현존을 그 자체로서 즐겼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삶의 근저에 육박하는 것, 삶의 원초적 현실을 응시하고 만지는 것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또 하나의 방식일 것이다.
철학아카데미 원장

사진/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스에서 영감을 얻은 3부작> 중 하나. (1981).
감정이 아닌 감각을, 마음이 아닌 신경

사진/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스에서 영감을 얻은 3부작> 중 하나. (19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