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의 철학카페 30 ㅣ살의 외침(I)- 베이컨론
신체의 고통·혐오 형상화한 순수 형상들… 마음이 깃들인 감각적인 생명체 질료 묘사
전통 회화에서 캔버스에 그려진 것은 무엇인가를 대신했다. 초상화는 어떤 사람을, 풍경화는 어떤 특정한 지역을 대신했으며, 문학적·역사적 배경이 있는 그림들은 어떤 사건을 대신했다. 현대 회화가 걸어온 길은 재현으로서의 회화 개념을 버리고, 회화의 ‘자기지시성’을 즉 자체의 ‘존재’를 확보해온 길이었다(‘자기지시성’이란 무엇인가를 지시하기보다는 자기자신을 지시함을 뜻한다). 풍경은 광경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원근법이 파기되고 화면은 납작해졌다. 피카소의 초상화는 인물과 별로 닮지 않았다. 그럼에도 회화의 자기지시성이 자기폐쇄성을 뜻하지는 않는다. 회화가 대상을 재현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상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초상화라는 장르 자체가 소멸되어야 하리라. 회화가 세계와 맺는 복잡한 관계를 해명하는 것이 현대 회화론의 주요 과제다.
본질적 규정을 솎아낸 감각적 표면
회화가 무엇인가를 대신하는 기호가 아니라 자기지시적인 존재라는 것은 곧 회화의 내용물은 리오타르적인 의미에서의 ‘형상(形狀)=figure’임을 뜻한다. 형상이란 감각적 존재다. 이 점에서 형상(形狀)은 형상(形相)과 대조적이다. ‘形相’은 한 사물에서 물질성을 뺀 순수 규정성들이지만, ‘形狀’은 한 사물에서 모든 비감각적 규정성들을 뺀 존재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회화가 ‘形相’을 그리려고 했다면, 현대 회화는 ‘形狀’을 그리려고 한다. <모나리자>는 지오콘다 부인의 ‘形相’을, 그 ‘본질’을 그렸다. 베이컨의 그림들은 ‘形狀’을 그린다. 형상을 그리려는 시도는 두 가지 길로 나뉘었다. 한편으로 추상 회화는 플라톤적 실재를 찾아 나섰으며, 칸딘스키의 상응론적 추상을 거쳐 몬드리안, 말레비치 등의 절대 추상으로까지 나아갔다. 절대 추상에 다다른 회화는 이제 기하학적 형상(形狀) 자체만을 표현하기에 이른다. 다른 한길에서 폴록은 구조가 아닌 힘을 그리고자 했다. 같은 추상이지만 플라톤적 구조를 그려나간 길과 역동적 힘을 그려나간 길은 감성적으로 매우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베이컨은 추상의 길을 통해서 사물의 심층으로 들어가는 길이 아니라 사물의 심층을 표층으로 불러내 오는 길을 걸어갔다. 추상 회화는 사물들의 표면을 제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상적 지각에 드러난 사물 대신 그 사물의 심층적 본질을 드러내고자 했다. 베이컨의 그림은 추상 회화보다 비교적 사물들의 표면을 보여준다. 그가 그린 그림들은 초상화 또는 움직이는 신체들이다. 우리는 그림의 제목과 그림을 어느 정도 맞춰볼 수 있다. 베이컨은 추상 회화와 달리 훨씬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방식을 택했다. 그럼에도 베이컨이 그리려고 한 것은 사물이 아니라 형상(形狀)이다. 즉 사물에 들어 있는 정보를 모두 솎아냈을 때 드러나는 그 순수 형상들이 베이컨의 캔버스를 채우고 있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그 형상들이란 어떤 것들인가. 사물이 아니라 형상… 뒤집힌 표면과 심층 베이컨 그림의 기본적인 대상은 인간의 신체다. 그러나 그가 그린 신체들은 전통 회화에 등장하는 신체들과는 너무나 다르다. 가장 적나라한 그림들 가운데 하나는 1946년에 그린 <회화>다. 제목이 그림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두판들 가운데 첫 번째 판은 우산을 쓴 한 사람, 그러나 거의 괴물과도 같은 사람을 보여준다. 그의 뒤에는 거대한 고기가 매달려 있다. 두 번째 판은 좀더 베이컨적인 터치를 보여주며, 역시 우산을 쓴 남자 뒤에 거대한 고기가 매달려 있다. 베이컨에게서 신체는 고전적인 그림에서처럼 우람하고 아름답지 않다. 그의 그림에서 인간은 괴물에 가깝다. 그것은 인간 “이다”와 “아니다” 사이에 놓여 있다. 베이컨은 신체가 느끼는 고통스럽고 혐오스러운 경험에 유난히 민감했다고 한다. 성교·구토·배설 등은 모두 이런 고통과 혐오를 동반한다. 그 극한은 한편으로 어떤 작은 구멍을 통해서 우리 신체가 녹아내리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인간 신체의 표면과 심층이 뒤집어져 속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정육점에 걸린 고기, 특히 통째로 매달린 고기는 우리에게 미묘한 파토스를 가져다준다. 조선 시대 사람들이 백정을 폄하한 것은 편견이지만 이유가 없지는 않은 것 같다. 고기는 생명체와 물질 사이에 있다. 고기는 해체된 생명체지만 물질과 완전히 가공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갈비뼈와 그에 묻어 있는 피, 잘린 살 등을 드러내며, 이런 “속이 뒤집어지는” 형상들은 말 그대로 신체의 속을 뒤집어놓는다. 신체는 물질이 아니라 살로 되어 있다. 물질은 물리적 법칙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그러나 살은 마음과 함께 존재한다. 그것은 아픔을 느끼고 달콤함을 느낀다. 생명체의 질료는 살이지 물질이 아니다. 베이컨의 그림은 살이 겪는 고통과 혐오를 극한의 강도(强度)를 가지고서 나타내고 있다. 베이컨의 그림에서 우리는 살의 외침을 듣는다.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센트 10세 초상화에 따른 연구>(1953)는 교황의 거대한 외침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교황의 외침은 그의 크게 벌린 입에서보다는 오히려 수직으로 그린 노란 줄들에서 느껴진다. 모든 살이 쭈뼛 올라가는 그런 외침이 들린다.
고통의 언어 극한에서 그를 만난다
20세기 서구 회화는 고통의 언어를 말한다. 에곤 실레의 추한 몸에서 베이컨의 고기 같은 몸에 이르기까지 서구 회화는 신체의 고통을 형상화해왔다. 왜 20세기 회화는 이토록 고통스러운 신체의 형상화에 몰두했을까? 두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맞닥뜨린 인간의 극한에 놓인 추한 모습 때문일까? 아니면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맞닥뜨린 불안과 공포 때문일까? 역사적 맥락이든 형이상학적 맥락이든 서구 회화는 고통의 언어를 말해왔으며, 그 극한에서 우리는 베이컨의 그림을 볼 수 있다.
철학아카데미 원장

사진/ <회화>(1946).
회화가 무엇인가를 대신하는 기호가 아니라 자기지시적인 존재라는 것은 곧 회화의 내용물은 리오타르적인 의미에서의 ‘형상(形狀)=figure’임을 뜻한다. 형상이란 감각적 존재다. 이 점에서 형상(形狀)은 형상(形相)과 대조적이다. ‘形相’은 한 사물에서 물질성을 뺀 순수 규정성들이지만, ‘形狀’은 한 사물에서 모든 비감각적 규정성들을 뺀 존재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회화가 ‘形相’을 그리려고 했다면, 현대 회화는 ‘形狀’을 그리려고 한다. <모나리자>는 지오콘다 부인의 ‘形相’을, 그 ‘본질’을 그렸다. 베이컨의 그림들은 ‘形狀’을 그린다. 형상을 그리려는 시도는 두 가지 길로 나뉘었다. 한편으로 추상 회화는 플라톤적 실재를 찾아 나섰으며, 칸딘스키의 상응론적 추상을 거쳐 몬드리안, 말레비치 등의 절대 추상으로까지 나아갔다. 절대 추상에 다다른 회화는 이제 기하학적 형상(形狀) 자체만을 표현하기에 이른다. 다른 한길에서 폴록은 구조가 아닌 힘을 그리고자 했다. 같은 추상이지만 플라톤적 구조를 그려나간 길과 역동적 힘을 그려나간 길은 감성적으로 매우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베이컨은 추상의 길을 통해서 사물의 심층으로 들어가는 길이 아니라 사물의 심층을 표층으로 불러내 오는 길을 걸어갔다. 추상 회화는 사물들의 표면을 제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상적 지각에 드러난 사물 대신 그 사물의 심층적 본질을 드러내고자 했다. 베이컨의 그림은 추상 회화보다 비교적 사물들의 표면을 보여준다. 그가 그린 그림들은 초상화 또는 움직이는 신체들이다. 우리는 그림의 제목과 그림을 어느 정도 맞춰볼 수 있다. 베이컨은 추상 회화와 달리 훨씬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방식을 택했다. 그럼에도 베이컨이 그리려고 한 것은 사물이 아니라 형상(形狀)이다. 즉 사물에 들어 있는 정보를 모두 솎아냈을 때 드러나는 그 순수 형상들이 베이컨의 캔버스를 채우고 있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그 형상들이란 어떤 것들인가. 사물이 아니라 형상… 뒤집힌 표면과 심층 베이컨 그림의 기본적인 대상은 인간의 신체다. 그러나 그가 그린 신체들은 전통 회화에 등장하는 신체들과는 너무나 다르다. 가장 적나라한 그림들 가운데 하나는 1946년에 그린 <회화>다. 제목이 그림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두판들 가운데 첫 번째 판은 우산을 쓴 한 사람, 그러나 거의 괴물과도 같은 사람을 보여준다. 그의 뒤에는 거대한 고기가 매달려 있다. 두 번째 판은 좀더 베이컨적인 터치를 보여주며, 역시 우산을 쓴 남자 뒤에 거대한 고기가 매달려 있다. 베이컨에게서 신체는 고전적인 그림에서처럼 우람하고 아름답지 않다. 그의 그림에서 인간은 괴물에 가깝다. 그것은 인간 “이다”와 “아니다” 사이에 놓여 있다. 베이컨은 신체가 느끼는 고통스럽고 혐오스러운 경험에 유난히 민감했다고 한다. 성교·구토·배설 등은 모두 이런 고통과 혐오를 동반한다. 그 극한은 한편으로 어떤 작은 구멍을 통해서 우리 신체가 녹아내리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인간 신체의 표면과 심층이 뒤집어져 속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정육점에 걸린 고기, 특히 통째로 매달린 고기는 우리에게 미묘한 파토스를 가져다준다. 조선 시대 사람들이 백정을 폄하한 것은 편견이지만 이유가 없지는 않은 것 같다. 고기는 생명체와 물질 사이에 있다. 고기는 해체된 생명체지만 물질과 완전히 가공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갈비뼈와 그에 묻어 있는 피, 잘린 살 등을 드러내며, 이런 “속이 뒤집어지는” 형상들은 말 그대로 신체의 속을 뒤집어놓는다. 신체는 물질이 아니라 살로 되어 있다. 물질은 물리적 법칙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그러나 살은 마음과 함께 존재한다. 그것은 아픔을 느끼고 달콤함을 느낀다. 생명체의 질료는 살이지 물질이 아니다. 베이컨의 그림은 살이 겪는 고통과 혐오를 극한의 강도(强度)를 가지고서 나타내고 있다. 베이컨의 그림에서 우리는 살의 외침을 듣는다.

사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센트 10세 초상화에 따른 연구>(19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