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정 작가가 반올림 사무실에 놓인 고 황유미씨 조각상을 바라보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무도 쓰지 않아서
그가 노동에 관한 글쓰기를 계속 이어가는 힘은 어디에서 올까. “일본의 르포 작가 야스다 고이치가 <거리로 나온 넷우익>(후마니타스, 2013)을 쓴 배경에 대해 ‘아무도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한 것처럼, 저도 이야기되지 않은 것을 쓰려고 애쓰는 편이에요. 세상이 관심 두지 않는 서사가 있는데 사람들에게 잘 가닿지 않고 읽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잘 쓰지 않거든요.” 그는 “결국 계속 말하는 사람이 있으니 쓰게 된다”고 덧붙였다. 활동가들만큼 빠르게 움직이진 못해도 자신의 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결단코 들으러 간다. 책에서 빌려오는 힘도 있다. 희정 작가는 글을 쓰다 길을 잃을 때면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민음사, 2003)을 펼친다. 이 책은 니베아-클라라-블랑카-알바 중심으로 이어지는 트루에바 가문 여인들의 가족사를 다뤘다. 피와 고통으로 얼룩진 라틴아메리카 역사 속에서 끔찍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주인공 알바에게 어느 날 외할머니의 환영이 나타나 말을 건다.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도록 글을 쓰라고,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겪고 있는 지금의 고통을 세상에 알릴 수 있도록 증거가 되는 글을 쓰라고. “극한의 좌절과 고통과 고립 속에 존재한 적은 없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을 살아남게 하는 힘 중 하나로 ‘이야기’ ‘기록’ ‘서사’가 존재하는구나 깨달았어요. 그리고 클라라 외할머니가 글을 쓰라고 한 이 장면을 떠올리고 붙잡고 있을 때가 있어요.”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의 평온하고 정돈된 삶 한편으로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만방에 알려야 한다고 했다. 정상적인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는 환상에 빠진 사람들과 자신들이 뗏목에 몸을 싣고 슬픔의 바다 위를 정처 없이 표류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그 참상을 알려야 한다고 했다. 행복에 겨운 그들의 세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어두운 곳에서는 방황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나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했다. “얘야, 너는 할 일이 아주 많단다. 그러니 너 자신을 그만 동정하거라. 자, 이제 물을 마시고 글을 써보도록 해라.” -<영혼의 집>
반올림에서 마련해준 희정 작가의 집필 공간. 이정우 선임기자
시선이 가닿는 곳, 그 세계를 넓히는 것
이사벨 아옌데의 <운명의 딸>(민음사, 2007)을 함께 추천한 그에겐 아끼고 사랑하는 두 권의 책이 더 있다. 노동 현장을 누비며 노동자 건강을 위해 분투하는 과학자가 쓴 <보이지 않는 고통>(캐런 메싱, 동녘, 2017)과 여성주의 시각으로 질병과 장애 문제를 다룬 <거부당한 몸>(수전 웬델, 그린비, 2013). 주로 몸과 노동에 관해 쓰다보니 ‘정상 프레임’에 자신도 모르게 갇힐 때가 많은데, 그때마다 두 책이 경각심을 심어준다고 한다. <거부당한 몸>은 질병과 장애, 소수적 정체성을 가진 몸의 사회적 의미를 말해주고, <보이지 않는 고통>은 그 ‘건강한’ 신체가 일터에서 어떻게 선별되고 활용되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해주기 때문이다. “전 기록이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세계가 만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시선이 가닿는 데까지가 자신의 세계라고 생각하는데요. 그 세계를 어떻게 넓혀갈 수 있는지가 기록자 또는 비문학 작가의 중요한 자질이라고 생각해요.”그가 말한 ‘시선이 가닿는 곳, 그 세계를 넓히는 것’은 단순히 시야를 넓힌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생생함으로 전하기 위해 무조건 여러 현장 취재를 가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부지런히 주변 시선을 빌려야 하는 노력이다. 인터뷰 막바지에 그가 지금 쓰는 책에 들어가는 한 인터뷰이 이야기를 들려줬다.일터에서 얻은 병 때문에 경기도에 살며 서울에 있는 대형병원에 다니는데 몸이 아프다보니 식전 약 먹는 시간 때문에 아침 7시 기차를 타려면 새벽 5시에 몸을 일으킨다. 이후 기차 타고 종일 진료와 치료를 받는다. 집부터 병원까지는 왕복 4~5시간 거리. 몸이 불편해 움직임이 느려 대중교통 이용이 어렵지만 산재 처리가 되지 않아 비용 부담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집으로 돌아와선 아이들 밥 챙기고 집안일을 하다보면 하루가 저물어간다. 그 피곤한 상태에서도 희정 작가의 인터뷰에 열심히 응해준다. 이미 오랫동안 기록 일을 한 희정 작가는 인터뷰할 때마다 새삼 깨닫는다. “이런 분들이 자기 삶에 대해 ‘힘들다’ ‘대단하다’ 이야기하지 않잖아요. 그냥 ‘병원 다녀왔네요’라고 덤덤하게 말하는 거죠. 기록자는 이렇게 자기 삶을 책임지는 사람을 조금 더 열심히 보려고 애쓰는 사람인데, 이런 분들을 보면 그냥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돼요. 최소한 저들과 맞닿은 부분의 삶만큼은 책임지며 살아야겠다고요. 그게 저에게는 기록인 거죠. 그래서 계속 쓰고 있습니다.”세상의 응답을 받아내 돌려주는 꿈
희정 작가는 공간과 사건, 삶과 시대에 대한 해석을 들려주는 이들에게 꾸준히 응답하려 한다. 세상의 응답을 받아내 다시 그이에게 돌려주는 꿈을 꾸기도 한다고 말했다. 응답을 기대하는 말 속에서 관계를 맺고 관계를 맺었기에 현장으로 간다.알고 보니 우린 서로의 오래된 독자였다. 각자 ‘발로 쓴 글’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말해준 대로 동시대 구성원들의 시야를 빌려 멈추지 않으려는 노력과 인터뷰이의 삶을 해석하는 시선과 세계를 넓히려는 시도를 이어가고자 한다. 그렇게 그와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쓰는 사람’이고 싶다.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