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이정우 선임기자
‘눈물’로 보도된 투쟁 현장, 노동자들은 “오늘이 제일 재미있어”
여러 매체에서 그들의 투쟁을 ‘눈물’로 보도했지만, 그는 달랐다. 매일 청소해야 하는 노동공간인 학교에서 여성노동자들은 처음으로 학생들과 밥도 먹고 연대의 시간을 나누며 “오늘이 제일 재미있어!”라고 말했고, 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다른 시선이 담긴 글은 여성주의 저널 <일다>를 통해 보도됐다. 그의 첫 기록 글이었다. “<일다>를 시작으로 반도체 직업병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바로 연재를 이어갔어요. 그 글을 모아 첫 책인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이 나올 수 있었고요. 첫 기록 글 덕분에 글 쓰며 살 수 있게 됐습니다.”그는 요즘 반도체 사업장 내 직업병 문제 규명을 위해 투쟁하는 비영리단체인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의 사무실에서 글을 쓴다. 반도체 사업장에서 일한 노동자의 자녀들에게 생기는 질환을 직업병으로 인정받기 위해 어려운 싸움을 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은 책을 쓰고 있는데, 반올림에서 선뜻 사무실 공간 한편을 내주었다. 희정 작가에게 특별한 작업 공간은 없다. 지금처럼 글쓰기 강의를 다니고 기록노동자로 살며 시위 현장, 농성장 천막 등 아무 데나 앉아서 썼다. 더욱이 쉼 없이 써내는 작가 중 한 명이라 요즘에도 강의 갔다가 취재 사이 틈이 나면 주로 근처 카페에서 글을 쓴다. 긴 호흡을 가져가는 글을 쓸 때는 자료나 책 등을 모아놔야 해 여러 단체의 도움으로 작업실을 옮기며 썼다. 그렇기에 서울 구로구 구로동에 위치한 반올림 사무실 공간은 그에게 특별하다. 반올림은 상담실 공간을 깨끗이 청소해 그만을 위한 집필 공간으로 바꿔줬다. “피해 당사자와 사건을 지나치는 일반인과의 거리가 굉장히 먼데 이 먼 거리를 이어주는 틈새 다리 구실을 하는 게 활동가라고 한다면, 반올림은 그 일을 굉장히 잘한 단체라고 생각해요. 저뿐만 아니라 반올림 일과 연대하는 모든 이에게 마음 품을 잘 내줘요. 그 힘으로 첫 책을 썼고 지금 책도 쓰고 있습니다.”그를 만나러 간 반올림 사무실은 법률사무소 ‘노동과 삶’ 사무실 안에 있었다. 법률사무소가 반올림에 공간을 내주고 반올림이 다시 희정 작가를 위해 공간을 내준 것이다. 문을 열자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지면서 반도체 공정의 직업병을 세상에 처음 알린 고 황유미씨의 조각상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희정 작가가 유가족을 통해 취재한 첫 번째 반도체 직업병 노동자다. 이 특별한 공간에서 2022년 3월5일 그의 삶에 기록노동이 어떤 의미인지 들을 수 있었다.
사진=이정우 선임기자
기록노동은,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드는 과정
“기록하러 가서는 여전히 꺼내지 못한 말, 묻지 못한 질문을 가지고 되돌아온다. 하지만 더는 홀로 끙끙대지 않는다. 나 혼자 풀 수 없는 문제임을 이제는 안다. 기록노동이라는 것을 놓지 않는 한, 내가 묻지 못한 말에 자기 방식으로 결국 답을 만들어가는 이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움직이고 나아가고 살아간다. 그걸 인정하고 지켜보는 일이 나의 노동이 된다. 그들의 시간을 훔쳐보며 나 역시 아주 살짝 단단해진다. 그러니 오늘도 살아가고 싸우고 견뎌내는 일을 기록한다.” -<두 번째 글쓰기> 희정 작가에게 ‘기록노동’은 자신을 가장 자기답게 만드는 과정이다. 자기 이야기를 하기보다 타인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이 적성에 맞는 점도 있다. 하지만 이 일을 계속하면서 깨달았다고 한다. 타인을 기록한다는 건 그들이 자기 삶을 해석하고 편집해나가는 과정을 보는 것이라고. 그러면서 기록자 역시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해석하고 편집할지 고민할 수 있다고. 일례로 책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를 쓸 때는 ‘도대체 나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 또는 ‘나다운 노동을 하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에 부딪혀 있었다. 그는 자기다운 삶을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만나 기록하면서 그 답을 찾아갔다. 오랜만에 쓴 단행본이었고 취재도 어느 때보다 어려웠기에 인터뷰이들이 전해준 깊은 이야기를 올곧이 담아냈다고 자신할 순 없지만 그의 인생에 중요한 의미를 던져준 책으로 남았다. 작가에겐 돋보이는 기획력, 수려한 문장력 등 여러 자질이 필요하다. 희정 작가가 ‘아, 내가 작가로 살아가는구나’ 느끼는 순간은 이처럼 인생의 과제를 글로 풀려고 하는 자신을 마주할 때다. 살면서 마주하는 여러 문제와 과제를 글로 풀고 해결하려는 면모를 만났을 때 말이다.*희정, 살아가고 싸우고 견뎌내는 일을 쓰는 기록노동자 [21WRITERS②]로 이어집니다.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1777.html출간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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