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의 철학카페 29 ㅣ 역설과 무의미- 마그리트론
기존의 익숙한 배치들을 뒤집으며 만들어낸 역설의 공간
수술대 위의 우산과 재봉틀. 너무나도 이질적인 사물들의 낯선 만남. 로트레아몽이 창출해낸 이 놀라운 이미지는 의미를 관계 속에서 사유해야 함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상식의 세계에서 사물들은 계열을 형성한다. 수술대, 의사, 환자, 메스… 우산, 비, 연인들, 포도(鋪道)… 재봉틀, 할머니, 옷…. 이 세계에서 사물들은 계열을 형성함으로써 어떤 의미를 창출해낸다. 우리는 사물들의 ‘존재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물들이 우리 옆에 친숙하게 있다는 것, 그것은 사물들이 일정한 계열 속에서 차지해야 할 자리를 차지하였음을 뜻한다.
자리-옮김의 존재론
마그리트의 그림은 자리-옮김의 존재론을 뚜렷하게 나타낸다. 사물들이 친숙하게 놓이 공간, 즉 독사의 공간을 뒤바꾸어 파라독사의 공간을 창조해내기. <붉은 모델>(1935)은 발과 구두의 관계를 기묘하게 바꿔놓았다. 그러나 마그리트의 자리-옮김은 단순한 상호치환이 아니다. 구두의 바깥과 발의 안은 단순히 자리를 바꾼 것이 아니다. 구두와 발은 하나가 되어 있으며, 일상세계에는 없는 별도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마그리트가 스스로의 사유를 헤겔의 변증법에 비교한 것은 이 때문이다. 사실 그의 그림의 많은 부분들은 변증법을 연상시킨다. <헤겔의 휴일>(1958)은 컵과 우산이 하나가 되어 독특한 존재를 만들어낸다. 컵과 우산의 ‘모순’이 ‘지양되어’ 제3의 존재가 새롭게 태어난 것일까. 그러나 마그리트의 그림과 헤겔의 변증법은 전혀 다른 세계를 이루고 있다고 해야 하리라. 헤겔은 모순에서 출발하지만 마그리트는 모순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마그리트에서 출발점은 열려져 있다. 헤겔은 모순이라는 특정한 형태의 부정(否定)에서 출발하지만, 마그리트에서 사유의 출발점은 가능한 모든 형태의 낯선 만남들이다. 낯선 만남, 그것은 기존 세계가 내포하는 모순이 아니라 기존 세계가 아닌 다른 어떤 세계의 도래다. 마그리트는 이런 낯선 만남에서 사유한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의 합체는 헤겔적 지양의 산물이 아니다. 헤겔적 지양은 기존의 두 모순이 내포하는 한계성을 넘어 그 이상의 존재를 창출해내는 과정이다. 두 모순 사이의 낯섦(타자-존재)은 극복되고 새로운 존재의 내면성(즉자-대자-존재)으로 흡수된다. 낯선 것은 보다 고차적인 존재의 품에서 해소되고 편안한 고양이 성취된다. 마그리트 그림에서의 사물들은 결코 그런 식으로 지양되지 않는다. <공동 발명>(1953)은 아름다운 인어가 아니라 기괴한 괴물을 보여준다. 마그리트의 세계는 모순이 해소되는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독사가 파괴되고 낯선 파라독사가 생겨나는 세계, 센스(의미)가 파괴되고 낯선 난센스(무의미)가 생성하는 세계다. 헤겔적인 절대성의 붕괴 [%%IMAGE1%%] 그렇다고 그의 세계가 맹목적인 낯섦만은 아니다. 그의 그림들은 모두 심사숙고 끝에 탄생한 그림들이며(어떤 작품들은 그렇지 않지만) 대개 명료한 존재론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마그리트는 초현실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지적인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마그리트의 그림을 아인슈타인의 물리학 이론에 비교하는 것 또한 정확하지 못하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은 의미를 산종시키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통일시키기 위한 장치다. 다양한 관찰자들이 서로 다르게 본 자료를 수학적 변환을 통해 통일시킴으로써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장치다. 따라서 ‘상대성’ 이론이 겨냥하는 것은 절대성이지 상대성이 아니다. 다만 단순한 절대성이 아니라 인식의 상대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넘어 다시 추구되는 절대성일 뿐이다. 나아가 우연도 없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마그리트 역시 우연은 없다고 보았지만, 그것은 아인슈타인적 결정론을 뜻한 것이 아니라 현실세계에서의 우연 개념이 띠는 피상성을 지적한 것뿐이다. 마그리트의 세계는 (파르메니데스의 후예인) 아인슈타인의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현대에 와서야 발견된, 의미가 산종되는 세계인 것이다.
여러 형태로 자주 그려진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마그리트의 세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1920년대 말에 그려진 <단어의 사용> 연작에서 우리는 마치 고전시대의 식물학 도감과도 같은 그림들을 만난다. 화면을 가득 채운 파이프, 그리고 그 아래에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는 글이 쓰여 있다. 왜 파이프가 아닐까. 분명 그림은 꽃이나 쥐가 아니라 파이프를 보여주고 있다. 같은 구성으로 그린 <대기와 노래>(1964)의 파이프는 담배연기까지 뿜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파이프가 아니다. 그것은 종이 위에 묻어 있는 물감이지 파이프가 아니다. 그림은 사물이 아니다. 이 단순하면서도 어려운(누구도 그것을 문제삼지 않으므로) 사실을 마그리트는 아이러니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림 속의 파이프가 파이프인가
<두 가지 신비>(1966)는 그림 속의 파이프와 그림 속에 그려진 그림 속의 파이프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림 속의 파이프는 떠 있다. 파이프가 어떻게 떠 있을 수가 있을까. 그림 속의 그림에 그려진 파이프는 그림 속의 그림 바깥의 파이프를 그린 것일까? 그림 속의 그림에 쓰여 있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말은 그림 속의 파이프를 가리키는가, 아니면 그림 속에 그려진 그림 속의 파이프를 가리키는가? 그러나 어느 것을 가리킨들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그림 속의 파이프나 그림 속의 그림 속의 파이프나 파이프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이 그림에서 무려 7가지 의미의 불확정성을 밝혀내기도 했다.
마그리트의 세계는 의미가 끝없이 산종되는 역설과 무의미의 세계를 드러냈으나, 그 드러냄의 방식은 매우 논리적이고 이지적이다. 여기에 마그리트 회화의 독창성이 있다. 그는 세계의 비논리성을 논리적으로, 비일상성을 일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철학아카데미 원장

사진/ <붉은 모델>
마그리트의 그림은 자리-옮김의 존재론을 뚜렷하게 나타낸다. 사물들이 친숙하게 놓이 공간, 즉 독사의 공간을 뒤바꾸어 파라독사의 공간을 창조해내기. <붉은 모델>(1935)은 발과 구두의 관계를 기묘하게 바꿔놓았다. 그러나 마그리트의 자리-옮김은 단순한 상호치환이 아니다. 구두의 바깥과 발의 안은 단순히 자리를 바꾼 것이 아니다. 구두와 발은 하나가 되어 있으며, 일상세계에는 없는 별도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마그리트가 스스로의 사유를 헤겔의 변증법에 비교한 것은 이 때문이다. 사실 그의 그림의 많은 부분들은 변증법을 연상시킨다. <헤겔의 휴일>(1958)은 컵과 우산이 하나가 되어 독특한 존재를 만들어낸다. 컵과 우산의 ‘모순’이 ‘지양되어’ 제3의 존재가 새롭게 태어난 것일까. 그러나 마그리트의 그림과 헤겔의 변증법은 전혀 다른 세계를 이루고 있다고 해야 하리라. 헤겔은 모순에서 출발하지만 마그리트는 모순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마그리트에서 출발점은 열려져 있다. 헤겔은 모순이라는 특정한 형태의 부정(否定)에서 출발하지만, 마그리트에서 사유의 출발점은 가능한 모든 형태의 낯선 만남들이다. 낯선 만남, 그것은 기존 세계가 내포하는 모순이 아니라 기존 세계가 아닌 다른 어떤 세계의 도래다. 마그리트는 이런 낯선 만남에서 사유한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의 합체는 헤겔적 지양의 산물이 아니다. 헤겔적 지양은 기존의 두 모순이 내포하는 한계성을 넘어 그 이상의 존재를 창출해내는 과정이다. 두 모순 사이의 낯섦(타자-존재)은 극복되고 새로운 존재의 내면성(즉자-대자-존재)으로 흡수된다. 낯선 것은 보다 고차적인 존재의 품에서 해소되고 편안한 고양이 성취된다. 마그리트 그림에서의 사물들은 결코 그런 식으로 지양되지 않는다. <공동 발명>(1953)은 아름다운 인어가 아니라 기괴한 괴물을 보여준다. 마그리트의 세계는 모순이 해소되는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독사가 파괴되고 낯선 파라독사가 생겨나는 세계, 센스(의미)가 파괴되고 낯선 난센스(무의미)가 생성하는 세계다. 헤겔적인 절대성의 붕괴 [%%IMAGE1%%] 그렇다고 그의 세계가 맹목적인 낯섦만은 아니다. 그의 그림들은 모두 심사숙고 끝에 탄생한 그림들이며(어떤 작품들은 그렇지 않지만) 대개 명료한 존재론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마그리트는 초현실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지적인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마그리트의 그림을 아인슈타인의 물리학 이론에 비교하는 것 또한 정확하지 못하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은 의미를 산종시키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통일시키기 위한 장치다. 다양한 관찰자들이 서로 다르게 본 자료를 수학적 변환을 통해 통일시킴으로써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장치다. 따라서 ‘상대성’ 이론이 겨냥하는 것은 절대성이지 상대성이 아니다. 다만 단순한 절대성이 아니라 인식의 상대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넘어 다시 추구되는 절대성일 뿐이다. 나아가 우연도 없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마그리트 역시 우연은 없다고 보았지만, 그것은 아인슈타인적 결정론을 뜻한 것이 아니라 현실세계에서의 우연 개념이 띠는 피상성을 지적한 것뿐이다. 마그리트의 세계는 (파르메니데스의 후예인) 아인슈타인의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현대에 와서야 발견된, 의미가 산종되는 세계인 것이다.

사진/ <단어의 사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