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의 철학카페 27 l 에곤 실레
현실의 공포를 극복하려는 고통의 언어… 일그러진 신체에 근원적 갈등 드러나
화가들은 늘 신체를 그려왔다. 몸 그리기의 역사는 회화의 역사이기도 하다. 인간이 인간의 몸을 어떻게 보았는가. 다른 사물이 아닌 자신의 몸을 어떻게 보았는가, 그것은 한 시대의 눈길을 드러내는 좋은 지표이다. 신체의 그림은 그 시대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 점에서 서구 회화가 이상적인 몸을 그려 왔다는 것은 곧 서구 회화의 존재론과 그대로 맞물린다. 전통 회화가 그린 몸들은 현실의 몸들이 아니다. 그것은 수학적 비례까지 동원해 측정된 이상적인 몸들이며, 추상적인 공간에서 성립하는 몸의 형상들이다. 마네의 <올랭피아>가 그토록 떠들썩한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 회화에 그려진 몸이 추상적인 이데아 세계에서의 몸이 아니라 당시 파리에 실제 살고 있었던 한 여인의 몸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 회화의 영향을 받아) 마치 스페이드의 여왕처럼 납작해진 몸 말이다. 누드는 그것이 이상 세계에 존재하는 한에서만 용인되었다. 현실의 여인을 그리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선정적 회화로 혐오스러움 부추겨 에곤 실레의 회화들은 전통 회화가 추구해온 이상적인 몸들과는 너무나도 판이한 몸들을 화면에 드러낸다. 그 몸들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뒤틀리고 일그러진 몸들이다. 실레의 회화는 ‘선정적’이다. 즉 정(情)을 부채질하는(扇) 작품들이다. 그러나 실레의 회화가 선정적인 것은 다른 선정적인 작품들과는 판이하다. 다른 회화들이 주로 에로틱한 분위기를 통해 희(喜), 낙(樂), 애(愛), 욕(慾)을 부추긴다는 점에서 선정적이라면, 실레의 회화는 차라리 노(怒), 애(哀), 구(懼), 오(惡)를 부추긴다는 점에서 선정적이다. 실레의 그림들은 그것들이 분노, 슬픔, 두려움, 혐오스러움을 부추긴다는 의미에서만 선정적인 것이다. 이 점에서 실레의 그림은 서구 회화에서 유니크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겠다.
실레가 그린 많은 자화상들은 그가 스스로의 실존을 바라보는 시선을 잘 나타낸다. <서 있는 자화상>(1910), <이빨을 드러낸 자화상>(1910), <뺨을 잡아당기는 자화상>(1910)으로부터 <쭈그리고 앉은 자화상>(1916), (가족과 함께 그린) <가족> 등에 이르기까지 실레는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서의 자화상은 자신이 자신을 포착하고 드러내려는 고통스러운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10년에 그린 자화상들은 한 인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괴물 같은 느낌을 준다. 몸은 균열하고 있는 유리 조각처럼 흉하고, 표정은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가족>은 결혼생활이 가져온 온기 때문인지 이전의 그림들보다 훨씬 부드럽게 처리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초점이 맞지 않는 시선이나 구겨진 듯한 몸이 실레의 그림임을 눈치챌 수 있게 해준다.
실레의 자화상들 중 그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마도 <쭈그리고 앉은 자화상>일 것이다. 화가는 쭈그리고 앉아 있으나 옆으로 몸을 뉨으로써 그림 전체가 불안정한 사선을 그리고 있다. 젊은 화가는 헝클어진 머리에 위로 치켜 뜬 눈으로 세상을 조소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아직 젊은이인데도 그의 몸은 다 늙은 노인의 몸처럼 쭈글쭈글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화가의 성기(性器)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인간과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성기란 한 인간의 가장 부끄러운 곳이며 그래서 ‘치부’(恥部)라 한다. 그런데 화가의 그림은 자신의 치부를 자기 자신이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노출증인가? 아마 인간은 세상에 대해, 삶 그 자체에 대해 근원적인 회의를 느낄 때 그것을 성(性)에 연관시키는 것 같다. 대부분의 욕들은 성과 관련된다. 어떤 사람들은 상대방을 욕할 때 손으로 성기 모양을 만들어 상대방에게 내민다. 실레가 스스로의 성기를 노출한 것은 세상에 대해, 더 근원적으로는 삶 자체에 대해 도발적인 몸짓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서구에서 일찍이 누드가 그려져 왔으나 음모(陰毛)는 그려지지 않았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몸에 나 있는 털은 그런 아름다움을 해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음모를 그린다는 것은 인간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작업이다. 음모를 그리지 않는 성기는 사실상 성기로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실레는 그의 그림에서 인간의 성기, 특히 음모를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인간과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려는 몸짓이다.
인간이 인간을 ‘적나라하게’ 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적나라한 드러냄은 늘 불안과 혐오, 두려움과 분노와 관련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사람들은 삶이 스스로를 옥죈다고 생각할 때 사태를 적나라하게 보기를 원한다. 추상적인 개념이나 아름다운 치장 등은 모두 ‘가식’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인간이 삶의 밑바닥을 체험했을 때 모든 추상적인 것, 고상한 것은 가식과 위선으로 다가온다. 그런 체험의 소유자들은 그런 것들을 끌어내려 자신들이 체험한 밑바닥으로 가져오기를 원한다. 그럴 때 그들은 삶을 적나라하게 보기를 원하며, 그런 적나라함은 반드시 성과 관련을 맺게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이런 과정의 선명한 한 예이다. 프로이트의 사유를 통해서 사람들은 삶을 적나라하게 보기 시작했으며,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모든 고상하고 추상적인 이해를 벗어던졌다. 에곤 실레가 활동하던 시대는 바로 프로이트의 시대였다.
현실에 다가서 불안을 떨치려 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서구의 전통 사회는 거의 와해되기 시작하며 혼란스럽고 불안한 현실이 유럽을 감돌았다. 위대한 유럽은 소멸하고 불안스럽고 어두운 미래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그 미래는 이윽고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으로 현실화되었다). 사람들의 내면에는 죽음과 공포, 인간의 위선과 더러운 실상이 각인되었고, 그 모든 것이 성과 연관되었다. 에곤 실레는 인간이란 껍데기를 벗고 나면 그 추한 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이라는 신념을 프로이트와 공유했다.
이 점에서 에곤 실레의 그림은 칸딘스키 등의 추상회화와 대척점에 놓인다. 두 흐름은 공히 현실을 응시했고, 그 현실에서 미래의 공포를 보았다. 그리고 그 공포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추상회화가 ‘추상’을 통해서 현실을 벗어나고자 했다면, 실레는 그 현실을 더 자세히 응시하고 그에 더 깊이 들어감으로써 그것을 극복하고자 했다. 도망갈 것이냐, 뚫고 나갈 것이냐. 이 점에서 실레의 그림은 서구 회화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를 마련했다 할 것이다. 그 이후 무수한 고통의 언어들이 서구 회화를 수놓게 된다.

사진/ <서 있는 자화상>(1910). 수채화와 연필, 55.8×36.9cm,비엔나.
선정적 회화로 혐오스러움 부추겨 에곤 실레의 회화들은 전통 회화가 추구해온 이상적인 몸들과는 너무나도 판이한 몸들을 화면에 드러낸다. 그 몸들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뒤틀리고 일그러진 몸들이다. 실레의 회화는 ‘선정적’이다. 즉 정(情)을 부채질하는(扇) 작품들이다. 그러나 실레의 회화가 선정적인 것은 다른 선정적인 작품들과는 판이하다. 다른 회화들이 주로 에로틱한 분위기를 통해 희(喜), 낙(樂), 애(愛), 욕(慾)을 부추긴다는 점에서 선정적이라면, 실레의 회화는 차라리 노(怒), 애(哀), 구(懼), 오(惡)를 부추긴다는 점에서 선정적이다. 실레의 그림들은 그것들이 분노, 슬픔, 두려움, 혐오스러움을 부추긴다는 의미에서만 선정적인 것이다. 이 점에서 실레의 그림은 서구 회화에서 유니크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겠다.

사진/ <가족>(1918). 캔버스에 유채, 152.5×162.5cm,비엔나.

사진/ <뺨을 잡아당기는 자화상>(1910). 수채화와 목탄, 44.3×30.5cm,비엔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