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의 철학카페 26 l 잭슨 폴락
구조에서 힘으로 가는 추상표현주의… 예술의 코스모스 해체하고 카오스 창조
20세기 전반에 이루어진 다양한 추상회화들은 물질성의 초월, 기하학적 형태의 추구, 추상적 단순성의 추구를 공통항으로 가진다.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은 그노시스파에 몰두했다. ‘절대주의 회화’의 대가인 말레비치는 러시아 허무주의와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당대의 많은 그림들에 플라토니즘이 강하게 스며들었다. 이런 것들은 이 시대 회화가 추구한 전반적인 경향이 탈물질성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물질을 초월한다는 것은 인간 개체에 초점을 맞출 경우 신체를 초월한다는 것을 뜻한다. 플라톤적-피타고라스적-오르페우스적 시각에서 볼 때 “육체는 정신의 감옥이다.” 그리고 그노시스파는 욕체를 초월해서 영혼들만이 있는 세계를 꿈꾸었다. 따라서 이런 흐름에서 신체는 초월해야 할 그 무엇이었다.
신체의 역할 극대화한 전위적 회화
폴락의 추상표현주의는 미술에서 신체의 역할을 새롭게 부각시켰다. 폴락의 ‘액션페인팅’ 또는 ‘드리핑’은 예술적 창조에서 신체가 맞는 역할을 극대화한다. 예술은 정신의 사유와 계산에 의한 것이고, 신체는 그 사유와 계산을 형상화하는 도구일 뿐인 것이 아니다. 예술작품 자체가 신체의 운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폴락은 캔버스를 바닥에 누이고 그 위를 누비면서 물감을 떨어뜨리고 모래를 뿌렸다. 캔버스와 화가의 신체가 하나가 되어 뒹군다. 그것은 이전의 어떤 회화와도 구분되는 혁명적인 회화였다. 폴락은 예술사에 또 하나의 분기점을 그었다. 이 점에서 같은 ‘추상’이라 해도 칸딘스키·몬드리안과 폴락에서의 추상은 전혀 그 의미가 다르다.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에게 추상이란 물질을 초월하는 것, 가시적인 형태를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칸딘스키가 강조했듯이 ‘정신적인 것’이다. 현실로부터의 추상(칸딘스키)이든 현실에서 단절된 추상(몬드리안·말레비치)이든 그것은 정신적 가치와 통하는 것이었으며, 물질과 신체의 초월을 꿈꾸는 것이었다. 폴락에게 추상이란 모든 계산과 숙고, 측정, 결정성 등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것은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또는 현실을 초월한 모든 형태의 규정성들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폴락의 그림에서 형태는 소멸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무한히 역동화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폴락은 형태들을 해체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들을 모두 갈가리 찢어 캔버스에 흩뿌린다. 어떤 면에서 이는 후기 칸딘스키, 몬드리안, 말레비치의 기하학적 추상보다는 오히려 초기 칸딘스키의 표현주의적인 추상에 가깝다. 그러나 폴락에게서는 칸딘스키에서 볼 수 있는 현실과의 상응이나 연계성은 완전히 소멸된다.
바라보지 말고 상상의 나래를 펴라
모든 형태들이 소멸하고서, 모든 형태들이 그 공간적 마름질을 해체당하고 나서 남는 것은 무엇일까? 공간이 소멸하는 곳에는 흐름이 남는다. 폴락이 그린 그림들에서 우리는 모든 형태가 해체되고 오로지 물질의 흐름만이 있는 캔버스를 만나게 된다. 형태의 공간에서 형태는 물질을 구속한다. 형태는 물질을 마름질해 사물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형태가 사라진 곳에 남아 있는 것은 물질뿐이다. 그러나 물질은 늘 힘을 동반한다. 힘 없는 물질은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폴락의 캔버스에서 무엇보다도 힘을 느낀다. 구조에서 힘으로.
캔버스에서 힘이 솟구친다. 다양한 색깔들이 흩뿌려지면서 화면을 흘러다닌다. 그리고 그 흐름들이 교차하면서 각 힘들을 넘어서는 또 다른 복합적인 힘의 계열화가 성립한다. 형태가 무너지고 힘이 도래했지만, 그 힘은 다시 계열을 이루며 그 계열들이 다시 형태를 이룬다. 그러나 이 형태는 더 이상 이전의 형태가 아니다. 그것은 해체 이전의 형태가 아니라 해체된 흐름들이 만들어내는 메타적인 구조다. 그래서 사람들은 폴락의 캔버스를 보면서 상상을 나래를 편다. 현실의 형태가 아니라 메타적인 형태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구름으로 이것저것을 만들어보듯이 여러 형태들을 만들어본다. 캔버스는 무한한 이미지들이 탄생하는 잠재적 장이 된다.
폴락의 그림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상상하게 하고 그림그리기에 참여하게 한다. 폴락이 잠재적 장을 던져주면 관객들은 나름대로 그것을 현실화한다. 따라서 작가의 ‘의도’나 완벽한 ‘기획’이 아니라 작가·작품·관객이 하나의 계열을 형성하고 그 계열에는 우발성이 함께 한다. 폴락도 우발성을 통해 그림을 그리고, 작품도 우발성을 통해 형성되며, 관객 역시 우발성에 참여해 나름대로의 의미를 그림에 부여한다. 때문에 폴락의 그림에는 제목이 없다. ‘3번’, ‘5번’ 하는 식의 번호만을 매길 뿐이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이미 하나의 표상을 부여하는 것이겠기에 말이다.
표상을 거부하며 관객 참여 유도
그러나 폴락의 그림이 오로지 우발성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카오스는 예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폴락이 이전 예술의 코스모스를 해체하고 카오스를 창조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순수 카오스가 아니다. 카오스에는 이미 폴락의 인격이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인격은 폴락의 의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무의식이라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래서 폴락의 그림은 모든 위대한 현대 예술이 그렇듯이 카오스모스를 형성한다. 폴락의 그림에서 우리는 카오스모스를 경험하게 된다.

사진/ <대성당>(부분·1947). 댈러스 미술관, 텍사스. 폴록의 '뿌리기'작업 가운데 초기 작품에 해당한다.
신체의 역할 극대화한 전위적 회화

사진/ <넘버3>(1949). 캔버스에 유채, 에나멜, 금속성 에나멜, 노끈, 담뱃재, 157.5×94.6cm, 워싱턴, 허시혼 미술관.

사진/ <심연>(1953). 캔버스에 유채와 래커, 220.3×150.2cm, 파리, 국립현대미술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