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29일 서울 고려대학교 산학관 디올연구소 사무실에서 이종근 대표가 저시력자·고령자를 위한 글꼴인 ‘디올폰트’의 개발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이승준 기자
문장을 훑는 숙련된 독자의 안구는 0.2~0.4초 간격을 두고 멎고(보고) 움직이기를 반복한다.(단속성 운동) 그렇게 보는 건 띄엄띄엄 글자 몇 개뿐.(통상 10자 중 3~4자) 본 것을 잇고, 못 본 것을 추정해 의미를 이해한다. 어차피 보지 않은 글자를 차라리 생략해버린다면? 문장은 그저 불완전한 몇 단어의 나열이다. 의미는 사라진다.
이제 잠깐 잡지를 덮고.
방금 본 글자 모양을 떠올릴 수 있을까? 연구 결과는 대부분 그럴 수 없다고 한다. 다만 윤명조130 글꼴로 적힌 <한겨레21> 지면 본문 글꼴이 실수로 뒤바뀐다면? 독자 항의가 빗발칠 수 있다. 글꼴이 바뀐 기사는 이전과 전혀 다른 감정과 생각을 불러일으킬지 모르겠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글을 읽는다. 글자를 본다. 낱낱이 있을 때 알아챌 수 없던 것들이 한데 모여 일상을, 정보를, 생각을 바로 전한다. 세계를 짓는다. 신비한 일이다.
한글날 즈음, 한글꼴 세 개와 거기 얽힌 사람들을 만난다. 비장한 마음으로, 애틋한 마음으로, 따뜻한 마음으로 각자의 글자를 말한다. 둥근 줄기와 가로 줄기와 기둥과 그 사이 공간… 너무 작은, 낱낱이 흩어진 획과 획 사이 어떤 마음은 기어코 전해진다. 또한, 신비로운 일이다._편집자주
참고 문헌: 헤라르트 윙어르 <당신이 읽는 동안>, 요스트 호훌리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회사를 다녀요?” 1990년대 중반, 서울 강서운전면허시험장을 찾은 이종근(53)씨는 장애인 면허 시험장에 줄을 선 이들에게서 비슷한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100여 명 가운데 직장인 행색을 한 장애인은 자신을 포함해 두어 명에 불과했다. 그는 2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오른쪽 다리에 철제 보조기기를 착용하고 생활하는 지체장애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장애인 회사원’은 낯선 존재였다. “대기업 계열사에 다닐 때였어요. 제가 잘해서 회사를 다닌다고 생각했는데 시험장에 모인 장애인을 보니 ‘내가 참 특별한 케이스구나, 운이 좋은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구나면허시험장에서 느꼈던 ‘부채감’이 마음 한쪽에 쌓여갔다.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며 컴퓨터그래픽을 일찍 접한 그는 30대 초반 회사를 그만두고 정보기술(IT) 벤처 창업을 했다. 교육용 소프트웨어, 멀티미디어 콘텐츠 사업 등에 뛰어들어 꽤 성공했다고 한다. 그래도 “장애인이 당당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을 언젠가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계속 자리잡았다. 2017년 숙제를 더 이상 미루지 않기로 했다. 치매를 앓던 아버지의 급격한 변화를 보며 “하고 싶은 일을 나중으로 미루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겪은 장애, 고령화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하는 사업을 해보고 싶었다.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유니버설 디자인 폰트’(UD폰트)가 눈에 들어왔다.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이란 연령, 성별, 국적, 장애 유무 등과 관계없이 모든 시민이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설계하는 디자인을 뜻한다. 글꼴 디자인에선 저시력자·고령자를 위한 일본의 이와타 서체, 난독증 독자를 위한 네덜란드의 디슬렉시(Dyslexie) 서체 등이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도 몇 차례 서체를 개발했지만 활성화되지 않았다. 그는 노안, 저시력자를 위한 글꼴 개발에 도전하기로 했다. 마침 그에게도 노안이 찾아오고 있었다. 9월29일 서울 고려대학교 산학관에서 만난 서울시 예비사회적기업 ‘디올(Design for all의 줄임말, ‘모두를 위한 디자인’이라는 뜻)연구소’ 이종근 대표의 이야기다. 그는 “건축 분야에선 장애인이나 고령자를 위한 유니버설 디자인은 법적으로 강제하며 많은 발전이 이뤄졌어요. 이제는 글꼴도 그래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저시력자나 노안을 겪는 이들에겐 글자가 뭉쳐 보이거나 흐릿하게 보이는 일이 많다. ‘ㅃ’ 같은 쌍자음이나 ‘ㅞ’처럼 획이 많은 글자일수록 알아보기 힘들다. 작은 글씨는 더 그렇다. 디올연구소는 먼저 고령자, 저시력자, 디자인·마케팅·서체 전문가 등에게 글자를 읽을 때 느끼는 불편함을 조사했다. 이를 바탕으로 글꼴을 만들고 다시 사용자에게 평가받았다. 다섯 차례 사용성 평가를 거쳐 수정·보완하는 과정을 밟았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디올폰트’다. 일반 글꼴은 개발하는 데 보통 5개월 안팎이 걸리지만, 디올폰트는 이 대표와 개발자 5명이 1년을 매달렸다. “일반 글꼴은 예쁘게 만들거나, 마케팅 트렌드에 맞춰 개발돼요. 디올폰트 같은 기능성 폰트는 글꼴의 가독성과 판독성이라는 관점에서 일반 글꼴과 다른 변별력을 확보하는 과정이 어려워요.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고 (글꼴이 사용될) 시장이 없다보니 다들 잘 접근을 안 하죠.”

디올연구소 제공
http://h21.hani.co.kr/arti/SERIES/2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