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애영씨의 젊은 시절 손글씨. 지수진씨 제공
‘함께 걸어요’ 글꼴 내려 받는 곳 https://blog.naver.com/clova_ai/221700027837글을 읽는다. 글자를 본다.
문장을 훑는 숙련된 독자의 안구는 0.2~0.4초 간격을 두고 멎고(보고) 움직이기를 반복한다.(단속성 운동) 그렇게 보는 건 띄엄띄엄 글자 몇 개뿐.(통상 10자 중 3~4자) 본 것을 잇고, 못 본 것을 추정해 의미를 이해한다. 어차피 보지 않은 글자를 차라리 생략해버린다면? 문장은 그저 불완전한 몇 단어의 나열이다. 의미는 사라진다.
이제 잠깐 잡지를 덮고.
방금 본 글자 모양을 떠올릴 수 있을까? 연구 결과는 대부분 그럴 수 없다고 한다. 다만 윤명조130 글꼴로 적힌 <한겨레21> 지면 본문 글꼴이 실수로 뒤바뀐다면? 독자 항의가 빗발칠 수 있다. 글꼴이 바뀐 기사는 이전과 전혀 다른 감정과 생각을 불러일으킬지 모르겠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글을 읽는다. 글자를 본다. 낱낱이 있을 때 알아챌 수 없던 것들이 한데 모여 일상을, 정보를, 생각을 바로 전한다. 세계를 짓는다. 신비한 일이다.
한글날 즈음, 한글꼴 세 개와 거기 얽힌 사람들을 만난다. 비장한 마음으로, 애틋한 마음으로, 따뜻한 마음으로 각자의 글자를 말한다. 둥근 줄기와 가로 줄기와 기둥과 그 사이 공간… 너무 작은, 낱낱이 흩어진 획과 획 사이 어떤 마음은 기어코 전해진다. 또한, 신비로운 일이다._편집자주
참고 문헌: 헤라르트 윙어르 <당신이 읽는 동안>, 요스트 호훌리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엄마는 춤추듯 글씨를 썼다. 오랜만에 잡아보는 연필이다. 연필은 손의 흔적을 남길 도구다. 이것은 하나의 시도다. 시도는 엄마한테 중요하다. 구태여 연필과 종이를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카페로 나왔다. 거창한 일을 벌이는 듯 요란을 떨었다. 엄마와 딸한테 거창한 일이 맞기는 했다.가로 8칸 세로 8칸, 한 장에 64칸. 종이 넉 장을 카페 탁자에 놓았다. 다 합치니 256칸이다. 엄마는 막막한 표정이다. 한칸 한칸, 칸에 맞춰 글자를 써넣는 일이 어렵다. 엄마의 손은 흔들리니까. 아니 춤추니까. 연필 끝을 네모 칸 안에 정확히 대는 것부터 쉽지 않다. 삐져나온 글씨가 엄마는 못마땅한 눈치다. 지우개를 쥔다. “지우지 마. 괜찮아.” 말만 할 뿐 돕지 않는다. “못 알아보겠지?” 엄마는 말한다. 자신 없는 표정이다. 옆에 앉은 친구가 고개 젓는다. “엄마 글씨 멋있어. 개성 있어. 상형문자 같아.” 엄마 얼굴에 송글, 땀이 맺는다. “그렇게 엄마가 256글자를 다 써냈어요. 도움 없이, 혼자, 스스로. 우리끼리 성취감이 대단했어요.” 지수진(31 . 존칭 생략)이 2019년 가을 엄마의 모습을 그리듯 말한다. 지수진은 시각디자이너다. 엄마는 희귀성 난치 질환인 소뇌위축증을 앓는다. 네이버 클로바는 256글자를 적어 보내면, 109명을 뽑아 인공지능(AI) 기술로 손글씨 글꼴을 제작해준다고 했다.(44쪽 상자기사 참조) 뽑히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ㄱ’은 ‘ㄲ’처럼 보였고, ‘이’자의 닿소리(자음) ‘ㅇ’과 홑소리(모음) ‘ㅣ’ 사이에 정체 모를 점도 찍혀 있다. “제가 봐도 엄마 글자는 사람들이 쓸 만큼 정형화된 글자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시도해보는 것 자체가 나와 엄마한테 무척 중요했어요.” 쓰지 않게 된 글씨로 256칸을 채우다엄마가 소뇌위축증을 진단받은 지 10년 정도 됐다. 몸의 균형 감각을 잃어가는 병이다. 진단받던 날 “죽는 병은 아니에요”라고 의사가 말했다. “점점 삶의 질은 떨어진다”고 했다. ‘점점’의 속도는 저마다 달라 예측하기 어려웠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힘들어진다는 뜻인 것만은 분명했다. 퇴행성 질병이라고 했다. 치료법은 없었다. 점점 일상이 사라졌다. “처음부터 갑자기 아무것도 못하는 게 아니라, 점점 하나씩 힘들어져요.” 특히 손의 빈자리가 컸다. 혼자 옷을 입기 힘들었고, 수저 드는 것이 어려웠다. 어떤 것은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어떤 것은 하지 않는 일이었다. 엄마의 손은 명백히 전처럼 청소하거나 밥 지을 수 없다. 글씨 쓰기는 하지 않는 쪽에 가까웠다. “글씨를 전혀 못 쓸 정도가 아닌데도 삐뚤빼뚤해지는 글씨가 엄마 눈에도 보이니까, 그게 싫어서 아예 쓰지 않게 되신 것 같아요.” 소뇌위축증은 자주 우울감을 동반한다. 못하겠고, 안 하고 싶은 것이 하나둘 늘어가며 “집에서 엄마 손의 흔적이 사라지고 있었다”. 일상의 흔적을 지키려는 즐거운 시도가, 그래서 중요했다. 엄마가 의기소침하지 않도록, 지레 포기하지 않도록. “엄마가 즐겁게 사는 모습을 보여줘야 비슷한 병을 가진 사람들도 엄마 보고 힘을 낸다. 사람들이 이 병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된다”고, 지수진은 엄마한테 의무감을 불어넣었다.부자연스럽대도 음악 리듬에 맞춰 한발 한발 엄마가 걷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렸다. 손글씨 공모전 응모 과정도 찍어 올렸다. SNS 계정 이름은 소뇌위축증의 대표 증상인 ‘아탁시아’(운동실조증)에 춤 ‘탱고’를 더해 ‘아탁시아 탱고 클럽’이라고 지었다. “엄마랑 영화 <여인의 향기>를 같이 봤는데 거기 ‘실수해도 계속 추면 그것도 탱고가 된다’는 말이 나왔거든요. 딱 우리 엄마한테 어울리는 말이잖아요.” 이름 붙이고 보니, 엄마는 정말 애쓰는 게 아니라 춤추는 것 같았다.

건강했던 젊은 시절에 쓴 글씨보다, 병을 앓는 지금 쓴 글씨가 글꼴이 되길 바란 정씨의 생각을 담아 네이버 클로바가 ‘함께 걸어요’ 글꼴을 제작했다. 지수진씨 제공
http://h21.hani.co.kr/arti/SERIES/2338/